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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지금 청혼하신 거예요? (93/97)


#93. 지금 청혼하신 거예요?
2023.07.21.


하트만의 심장이라면 하트 모양의 대형 루비가 달린 티아라 말인가?

제국과 황후를 상징하는 그것?

주작, 현무, 청룡, 백호에 버금가는 명문가 황비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이는 그걸 내게 주겠다고?

뒷골이 당기는 아찔함은 둘째치고, 황당함이 밀려왔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세요?”

“나는 농담 따위 즐기지 않는다. 그대도 알다시피.”

“이거 몇 개로 보여요?”

시력 테스트를 하듯 니콜라이의 눈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니콜라이가 방정맞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꼭 쥐었다.


“장난으로 듣지 마라, 엘리자벳.”

“멀쩡한 폐하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아주 오래, 여러 측면을 고려해서 한 말이다.”

“!”

“모든 고려가 끝났고, 끝난 즉시 그대의 뒤를 쫓았다.”

니콜라이의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날 추격해 온 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두근. 두근. 두근.

또다시 심장을 둘러싼 모든 근육과 뼈가 조여왔다.

그가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손에 넣고 싶은 줄만 알았다.

늘 어긋나던 마음이 먼 길을 돌아 이제야 마주한 기분이었다.

나는 니콜라이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었다.

날 원하는 그의 간절함만큼은.


“제가 진정 황후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으세요?”

“지금껏 그대만큼 훌륭한 황후감은 본 적이 없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지금처럼 진실한 얼굴로.

나 역시 황후가 되는 꿈을 꾼 적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부유해도, 눈부시게 아름다워도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는 총애를 받는 황비가 고작이었다.

그게 싫었다.

그의 총애마저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다른 황비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사는 삶을.


“황제, 니콜라이 롭 예브레이의 황후가 되어다오, 엘리자벳.”

혼란을 틈타 니콜라이가 쐐기를 박았다.

말발굽 소리보다 관자놀이에서 뛰는 맥박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손끝은 깨진 얼음 조각처럼 차가웠다.

반면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폐하……. 지금 제게 청혼을 하신 거예요…….”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은 채 혼잣말처럼 물었다.

니콜라이 역시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더 깊이 날 파고들었다.


“물론이다. 이게 청혼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머릿속에서 뎅그렁뎅그렁 종소리가 울렸다.

첫눈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와 검은 턱시도를 입은 니콜라이의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꽃가루와 웃음소리.

그런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고?

단두대 동기에 불과하던 나와 니콜라이가?


 


“나와 혼인해다오. 세상 모든 부귀와 영화를 그대에게 주겠다. 누구도 그대를 모욕하지 못할 것이다. 상황 파악 못 하는 멍청이가 또 나온다면 모두 황족모독죄로 다스릴 것이다.”

니콜라이가 맹세하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청혼을 받은 여자들은 눈물부터 흘리던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실감이 안 나서 그런가.

마른 눈꺼풀만 깜빡이며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원작 니콜라이도 엘리자벳을 황후로 만들려다가 실패했어. 모두의 반대에 부딪혔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 욕심 때문에 반역이라도 일어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진 않을까?’

쉬 대답하지 못했다.

그와 나는 물론 제국 전체의 운명이 달린 결정이기 때문이었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니콜라이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마. 너무 오래 기다리지만 않게 해 다오.”

 

***

황제의 욕실은 우윳빛 대리석과 황금 조각상으로 장식된 우아한 공간이었다.

검푸른 천장에 금빛 물감으로 태양과 달, 그리고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었다.

스무 명이 동시에 쓸 수 있을 법한 초대형 욕조에는 사자와 인어 조각상이 더운물을 뿜어댔다.

가운 한 장을 걸친 니콜라이가 천천히 욕실로 걸어들어왔다.

수증기 사이로 완벽한 근육질 몸이 드러났다.

실크 가운이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욕조 속에서도 니콜라이는 온통 엘리자벳 생각뿐이었다.


‘기뻐할 줄 알았다. 단번에 승낙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망설이고 있었어…….’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물로 세수를 했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역시 너무 성급했던 걸까?

방법이 서툴렀던 걸까?

분위기가 마땅치 못했던 걸까?

수심에 잠겨 있던 엘리자벳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떤 여인도 흙먼지가 묻은 말 안장 위에서 청혼받고 싶지는 않겠지. 반지도 없이…….’

곱씹을수록 제 어리석음만 도드라졌다.

밀물같은 후회가 밀려왔다.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폐하.”

어깨가 드러난 튜닉 드레스를 입은 시녀들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시녀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풍만한 몸매에 걸음걸이, 손짓 하나하나까지 나긋나긋했다.

순종적으로 내리깐 속눈썹과 존경이 담긴 눈빛.

니콜라이가 고개를 까딱한다면 그녀들은 기쁘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거였다.

하지만 그 어떤 여인도 니콜라이의 가슴을 흔들지 못했다.

찰나의 시선조차 잡아두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엘리자벳과 혼인할 수 있을까. 청혼에 성공하면 뭐부터 해야 하지?’

늑대는 엘리자벳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했다.

니콜라이도 그 사실을 인정했고, 거의 받아들일 뻔했다.


‘황제에게 사랑은 불필요한 감정이다. 제국을 지키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늑대와 공생하는 삶이라면 더 그렇지. 저승꽃을 감시하는 것만으로 하루하루가 전쟁 같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사랑하지도 말고, 행복하지도 말라는 부황의 유언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사람이었다.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내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내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여인이 생겼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상관없었다.

엘리자벳과 함께라면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의 향기와 달콤함만으로 충분하니까.


“옥수를 닦겠습니다, 폐하.”

시녀들이 비누 거품이 묻은 해면으로 그의 손가락 사이를 문질렀다.

손아귀에 아직도 엘리자벳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꼭 쥐면 부서질 듯 가느다란 손가락과 유리 공예품처럼 매끄럽던 살결이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꾹꾹 누르고 있던 소유욕이 들불처럼 일어나 니콜라이의 말초를 점령했다.


“용안을 닦겠습니다, 폐하.”

비단 수건으로 시녀들이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조심조심 닦아냈다.

수건이 입술을 스쳤을 때,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을 향한 열망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막 봉오리를 터뜨린 장미처럼 향기롭고 매혹적인 입술이 기억 속에서 요동친 탓이었다.


‘어떻게 엘리자벳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지? 상상만으로 돌아버릴 것 같은데. 대신전이 그녀를 빼앗기 전에 서둘러야 해.’

그녀는 모라신시아 여신에게 선택받았다.

신물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아칸소를 포함한 신관들은 성녀 재림 소식을 떠벌릴 게 분명했다.

엘리자벳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되리라.

어쩌면 엘리자벳은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이 칭송했던 선황제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엘리자벳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싹을 자르고 싶었다.

니콜라이의 갑작스럽고 어설픈 청혼의 배경에는 그런 조급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여인보다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황후를 내 손으로 지키면 된다. 늑대도 건드릴 수 없도록.’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한 자신이 바보스러웠다.

저보다 엘리자벳을 아껴줄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운명도 사명도 엘리자벳 앞에선 다 개소리였다.

일단 망설이는 그녀의 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필요하다면 권력이든 계략이든 모든 방법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망한 청혼은 끝이다. 반드시 성공해서 엘리자벳을 황후로 맞이할 것이다!’

예고도 없이 니콜라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꺄악!”

욕조에서 튄 물방울을 맞으며 시녀들이 비명인지 탄성인지를 내뱉었다.

이내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송,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를 구하면서도 시녀들은 조각 같은 니콜라이의 신체를 흘끔거렸다.

물론 그는 그녀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황궁을 떠날 때 반드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언제부턴가 황궁이 내 집처럼 친숙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황궁에 깃든 수많은 욕망이 손바닥의 지문처럼 낱낱이 들여다보이는 까닭이었다.

단 한 사람, 클라우디아를 빼면 말이다.


“여기 계셨군요.”

삐걱거리는 어색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빠져나왔다.

내 기척을 발견한 클라우디아가 검을 내렸다.

백옥처럼 새하얀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를 어떻게 찾았소?”

클라우디아가 무심히 물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궁금한 기색이었다.


“황궁 소식에 밝은 친구가 있습니다.”

마성을 이용하면 클라우디아의 뒤를 쫓는 건 간단했다.

그녀가 조용하고 쾌적한 황제의 연무장을 개인 훈련장으로 쓴다는 사실도 금방 알아냈다.

비밀이 지켜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지 클라우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는 그간 실례했다고 전해주시오.”

“클라우디아 님을 여기서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상대가 폐하일지라도요.”

“알아서 하시오.”

클라우디아의 파란 눈이 날 응시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해보란 뜻 같았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아름다워. 내가 상상했던 클라우디아보다 훨씬 더.’

푸른 눈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는 모를 거였다.

일자로 펴진 당당한 어깨와 고도로 단련된 기사의 육체.

하나로 묶은 은발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

그 모든 것을 동경했다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었어. 적어도 동료가 되길 바랐어. 당신은 언제나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지. 엘리자벳에 빙의한 뒤엔 더더욱 멀리.’

독자였을 때보다도 클라우디아가 더 멀게 느껴졌다.

원작 여주와 원작 악녀 사이에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강물이 흘렀다.

나는 그 강을 건너고 싶었다.

그래야 단두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까?

강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는 없는 걸까?

보폭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겠지만 그저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 닿지 않을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시오.”

“제가 황후가 된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클라우디아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처럼.

짧은 침묵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애꿎은 드레스 자락을 구기는 내게 그녀가 반문했다.


“뭘…… 내가…… 해야 하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까.

내 반응을 떠보는 걸까.

한 차례 심호흡한 뒤, 클라우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클라우디아 님은 제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악녀인 저를 폐하께서 황후로 맞이하려 하십니다. 그런 폐하, 구제 불능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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