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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고백할 게 있는데 (94/97)


#94. 고백할 게 있는데
2023.07.25.


원작이나 현실이나 클라우디아는 정의로운 캐릭터였다.

사사로운 성공과 욕망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황제 앞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을 만큼 기개가 곧았다.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구석도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인물이랄까.


‘악녀 따위가 황후가 된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용납할 수 없어!’

그렇게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겨우 니콜라이와 프란츠 쪽에 서게 된 클라우디아를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나와 니콜라이, 프란츠를 위해서.’

그런 마음으로 물어본 건데.

고양이처럼 날렵한 클라우디아의 눈매가 휘둥그레졌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더 참기 힘들다는 듯 한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하하하!”

고개를 뒤로 젖힌 클라우디아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땀을 쥔 상황만 아니었다면 계를 탔다고 흥분했을 거였다.

최애를 웃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면서.


“왜 웃으시는 거죠?”

“풋. 미안. 실례를 했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클라우디아가 사과했다.

자세를 반듯하게 편 그녀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악녀라 생각하시오?”

“……아닙니까?”

“악녀였소. 과거의 엘리자벳은 모자람이 없는 악녀였지. 하지만 뭔가 굉장히 달라. 적어도 지금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클라우디아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끝을 살며시 쥐었을 때, 나는 숨을 멈추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대의 선홍색 머리칼도, 아리따운 외모도 예전과 똑같소. 하지만 알맹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오. 내가 모르는.”

그것이 원망스럽다는 듯 클라우디아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악녀가 아니오.”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악녀가 아니오, 라고 내게 말했다. 나의 최애가.

왠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악녀가 아니라서 안타까우신가요.”

“조금은 그렇소. 솔직히 말하자면.”

“저를 베지 못해 아쉬운 건가요?”

잠시 망설이던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조금 괴로울 뿐이오. 당신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게.”

스산한 바람이 나와 클라우디아를 훑고 지나갔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뒤로 더글라스의 순한 미소가 겹쳐졌다.

열세 번째 신전으로 향하며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여행 때문에 고초를 당할 수도 있잖아요. 이유라도 알고 계셔야죠.」

「상관없습니다. 엘리자벳이 원하니까요.」

더글라스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날 위해 헌신했다.

내가 니콜라이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곁을 지켜줬다.

나는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다.

그의 애정에 응답할 수도 없었다.

비겁하게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클라우디아는 여전히 더글라스를 짝사랑하고 있구나. 그는 변함없이 내 뒤만 쫓고 있는데…….’

나, 더글라스, 클라우디아.

우리 세 사람은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모퉁이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삼각형 안에 프란츠가 들어왔어. 나도, 더글라스도, 클라우디아도 그 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그게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나는 황후가 된 이후를 계산해 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우면서도 니콜라이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서고 싶었다.

청혼의 답을 미루면서까지 클라우디아를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와 니콜라이를 처형했던 최애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마성의 팜므파탈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황후가 누구든 신경쓰지 않소. 나는 내 일을 할 뿐이오.”

클라우디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강직한 신념의 화신이 황후의 자질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


“이왕 생기는 황후라면 똑똑한 편이 좋겠지. 어린 황태자를 보살필 줄 알면 더 좋고.”

“클라우디아 님……!”

“어쩌면 평민 출신이 귀족보다 백성을 더 아끼는 황후가 될지도 모르오. 물론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거요.”

시선을 옆으로 돌린 클라우디아가 툴툴댔다.

감격을 이기지 못한 내가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았다.


“오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발갛게 달아오른 날 흘낏거리며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모르셔도 괜찮아요. 제가 다 알아들었으니까요!”

“경고하는데 앞으로 사소한 일로 날 귀찮게는 하지 마시오.”

부끄러워서 더 냉랭하게 말하는 걸까?

클라우디아가 전에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최애와 한층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다시 검을 쥐는 그녀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섰다.

등 뒤로 클라우디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결심이 섰으면 더글라스에게 알리시오. 다른 사람을 통해 소식을 듣는다면 크게 상심할 것이오.”

 

***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엘리자벳 님!”

니사가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힘이 얼마나 좋은지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그 통증마저도 반가웠다.


“탈주범이 팔자 좋네? 뭘 먹었길래 피부가 삶은 달걀처럼 반들반들 한 거야?”

프란츠의 독설도 약간은 그리웠다.

사랑을 듬뿍 담아 소년의 볼을 옆으로 쭈욱 늘였다.


“내가 피부는 원래 좋았어, 프란츠.”

“아파!”

“아파도 좋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변태!”

프란츠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내 손을 밀쳐냈다.

하여간 좋으면서.


“고초를 겪으신 스승님을 반기지는 못할망정 변태라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간지럼을 태우려는데 수잔이 날 말렸다.


“참으세요, 언니. 전하께서도 반가워서 저러시는 거예요.”

수잔도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사슴처럼 순한 외모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갈색 눈망울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걸.


“수잔. 잘 지냈어?”

“네. 언니는 건강하셨나요?”

“보다시피.”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만에 하나라도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저는…… 흑흑.”

수잔이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동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 믿고 기다려준 이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치솟았다.

수잔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프란츠가 제법 의젓하게 굴었다.

바짝 굳어서 장난감 병정처럼 움직일 때는 언제고?

수잔의 등을 토닥이는 프란츠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봤다.


“나 없는 동안 둘이 무척 친해졌네?”

“수잔이 날 많이 도와줬어.”

“곱셈을 가르쳐줬구나? 수학 교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수잔은 보리츠의 농장을 오가며 진척 상황을 말해줬어. 내 건강도 살펴주고.”

기회를 놓칠세라 프란츠가 수잔을 칭찬했다.

수잔이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 쳤다.


“오히려 전하께서 절 챙겨주셨지요.”

“수잔이 매일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외로움을 참지 못했을 거야. 황궁은 쓸데없이 너무 넓어.”

“이젠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폐하와 엘리자벳 언니가 돌아오셨잖아요.”

수잔이 프란츠를 위로했다.

프란츠가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쓸쓸한 표정으로 수잔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계속 내 말동무가 되어줄 거지? 나 같은 어린애랑 어울리는 게 지겹겠지만…….”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는 저보다 훨씬 아는 것도 많으시잖아요? 저와 어울려주셔서 제가 더 영광이에요.”

“정말 고마워. 수잔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전하…….”

프란츠가 수잔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수줍음을 참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수잔도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수잔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 바람둥이 아버지가 아닌 순정파 할아버지를 닮길 바랐는데.’

서로 좋은 인연을 맺길 바라는 마음과 별개로 나는 수잔을 지켜야 했다.

교육담당관으로서 프란츠의 성장도 살펴야 했다.

6살 연상의 수잔을 짝사랑하는 프란츠와 달리, 수잔은 프란츠를 친절하고 든든한 황태자 전하로만 보는 것 같았다.

아직도 프란츠 같은 아들을 갖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휴가는 끝이야. 다들 바짝 긴장하자!”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엘리자벳?”

프란츠가 기대와 염려를 반씩 담아 물었다.

니콜라이를 닮은 연두색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청혼을 받아들이면, 내가 프란츠의 엄마가 되는 건데. 프란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받아들이기나 할까?’

카나리아 방을 차지했을 때도, 교육담당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프란츠는 격렬히 반대했다.

프란츠의 가슴에는 일찍 여읜 어머니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나도 소년의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프란츠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좋은 부모가 뭔지, 부모의 사랑이 뭔지 하나도 모르는데?’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외면할 마음은 없었다.

목적을 위해 황후 자리를 탐할 생각도 없었다.


‘니콜라이와 결혼하면 그의 책임과 인연도 받아들여야 해. 프란츠에게도 제국민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만약 황후가 될 수 있다면…….’

결정은 끝났다.

어떤 난관이 생기더라도 니콜라이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의 것이 되고 싶었고, 그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제 반격해야지. 복수도 빼먹으면 안 되고.”

내가 암흑가 여두목처럼 킬킬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프란츠 역시 속셈을 감춘 꼬마 악당처럼 미소 지었다.

수잔과 니사는 박수로 환영했다.

마침 떠올랐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 전에 고백할 것이 있는데…… 나 성녀 됐어.”

“뭐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으니까 너무 놀라진 마.”

고구마 한 상자를 주문했다거나, 보험에 가입했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상대로 프란츠, 수잔, 니사는 경악에 휩싸였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물었다.


“어디 아픈 사람 있어? 성녀 지인 찬스를 마음껏 쓰도록 해.”

 

***

해가 졌는데도 카레스는 내무대신 집무실에 있었다.

그의 방엔 온갖 책과 서류들이 무너지기 직전의 탑처럼 쌓여있었다.

잉크가 튄 종이와 찻물이 말라붙은 찻잔, 만년필 여러 개, 한 입 베어 문 오트밀 쿠키가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 묵은 먼지가 공처럼 말려 있었고, 화병엔 말라죽은 꽃이 을씨년스럽게 꽂혀 있었다.


‘일 처리만큼 주변 정리도 깔끔할 줄 알았는데. 엄청 지저분하네. 청소부도 못 들어오게 하나 봐.’

의외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카레스를 마주 보았다.

나의 니콜라이를 배신했을지도 모르는 충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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