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이번엔 내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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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이번엔 내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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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이번엔 내 차례인가?
2023.07.28.
“전보다 수척해졌네요. 폐하 대신 업무 처리를 하느라 바빴죠?”
내가 물었다.
카레스의 회색 눈동자 아래로 검푸른 혈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늘 하던 일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지요?”
“엘리자벳 님이라면 언제든지요.”
카레스가 날 안락의자로 안내했다.
마성의 유효기한은 진작에 끝났지만 날 바라보는 카레스의 눈빛은 여전히 따스했다.
「내무대신님은 냉혈한으로 유명하시잖아요!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벌레 보듯 쳐다보시니까요.」
어깨를 오그린 니사가 증언했다.
사교계에서도 카레스의 평판은 대체로 비슷했다.
‘일은 잘하지만, 지나치게 까칠한 남자. 황제보다 더 오만한 측근.’
카레스 정도의 외모와 스펙이면 영애들이 군침을 흘릴만한데 그의 주위엔 매파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신학에 관심이 많으시더니,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겁니까?”
맞은 편에 앉은 카레스가 물었다.
나는 카레스가 준 문병 선물을 떠올렸다.
‘대주교가 쓴 책이었는데, 어디에 뒀더라? 황태자궁이던가?’
기억을 되새기며 카레스를 응시했다.
그 책을 프란츠가 몇 번이나 읽었다는 사실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도 까맣게 모르고.
“폐하를 뵈었나요?”
“그간의 일을 보고드렸습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청혼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드디어 하셨군요.”
카레스는 놀라지 않았다.
축하를 건네지도, 골치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예전부터 엘리자벳 님을 황후로 맞이하길 원하셨습니다. 엘리자벳 님처럼 훌륭한 황후 감은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고요.”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와 기쁨이 피어올랐다.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사랑하는 남자가 오랫동안 절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싫어할 여자는 없을 거였다.
‘충동적 청혼은 절대 아니었어…… 오래 고민했다는 말이 모두 사실이었고.’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카레스 님은 제가 황후가 되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날 빤히 바라보던 카레스가 눈시울을 문질렀다.
“복잡한 절차와 길고 지루한 반대가 이어질 겁니다. 혼례식과 황후 즉위식이 무사히 거행될지 장담하긴 힘들군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4대 가문 황비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이제 3대 가문이라 불러야 할 겁니다. 브렌든 후작이 자백을 대가로 형량 거래를 시도했으니까요.”
브렌든 후작의 동향은 니콜라이에게 전해 들었다.
그는 다른 혐의를 인정하는 대가로 반역죄와 로즈의 도주 방조죄를 피했다.
불법으로 축적한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나머지 명문 가문의 죄를 밝히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래봤자 북부 탄광행은 피할 수 없겠지만.
“고생 많으셨어요.”
“클라우디아 경께서 하신 일입니다. 브렌든 후작은 3대 명문가 당주들의 비위를 잘 모르더군요. 그들 내부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모양입니다.”
“사병 문제만 털어놓아도 큰 성과 아닌가요?”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카레스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고하지 않은 사병은 반역 모의라고 했어. 명문가 당주들이 워든 왕국과 내통한다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고.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
그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사병을 키웠을까?
제 딸을 황후로 만드는 게 목적 아니었나?
찐득찐득한 불안감이 뱃속을 불쾌하게 어지럽혔다.
“돈으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다 모았어요. 그 이상은 어려웠지만요.”
“그래서 황궁을 뛰쳐나가신 겁니까?”
카레스가 물었다.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카레스는 요란하게 추격대를 움직였죠. 귀족들의 시선을 돌려 폐하가 절 뒤쫓기 쉽도록요.”
“저는 그리 영리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아뇨. 카레스는 누구보다 영리해요. 그런 당신이 왜 분란의 씨앗을 키우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카레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불편해 보이는 것만은 확실했다.
“왜 황태자 전하께 옥새를 달라고 하셨죠?”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전하의 뒤를 밟고, 괴한을 보낸 것도 당신인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카레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제 지인의 아틀리에에서 습격을 받으셨어요. 더글라스 님도 함께 계셨고요.”
“아니, 어찌 그런 일이……!”
“솔직하게 말해줘요, 카레스. 무슨 사정이 있는 거죠?”
“설마 저를 의심하십니까?”
카레스의 회색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폐하는 누구보다 당신을 신임하고 계세요. 저승꽃과 늑대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폐하께서도 저를 의심하고 계시군요.”
카레스가 허허롭게 대답했다.
짧게나마 서러움과 슬픔이 스쳤다.
나는 그것이 그의 진심이기를,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기를 두 손 모아 바랐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 니콜라이에게 물었다.
「카레스가 정말 배신했다면 어쩌실 거예요?」
「처형할 것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대답했다.
청록색 눈동자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카레스보다, 친구이자, 충신이자, 가족을 벌해야 할지도 모르는 니콜라이가 더 염려됐다.
“폐하께 믿음을 드리세요, 카레스.”
“믿음이 견고하다면 의심이 싹틀 리 없겠지요.”
“그 믿음을 이용해 의심을 피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진실을 말해요.
당신이 뭘 숨기고 있는지.
“저는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해치려 한 사실도 없습니다.”
씹어 뱉듯 말한 후 카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주십시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등을 돌린 카레스가 말했다.
하얀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만요.”
카레스가 뒤돌아볼 때를 기다려 마성이 듬뿍 담긴 윙크를 보냈다.
손 키스도 빼놓지 않았다.
깜짝 놀란 듯 커다랗게 확장되었다가 몽롱하게 풀어지는 눈동자.
찌푸려져 있었던 눈썹도, 팽팽하게 당겨진 입매도 순간 느슨해졌다.
“내 질문에 진실만 말하세요, 카레스, 당신은 무얼 숨기고 있죠?”
카레스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숨을 죽인 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묻지 말아 주십시오.”
마성에 저항하는 걸까?
카레스의 표정 근육이 조금씩 경련하기 시작했다.
창백한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오듯 떨어졌다.
괴로워하는 그를 몰아세우는 것이 힘겨웠다.
하지만 카레스는 너무나 위험한 내부자였다.
잃고 싶지 않기에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대답하세요. 당신은 정말 폐하를 배신한 건가요?”
내가 한 번 더 윙크했다.
카레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저의 주군은 영원히 폐하 한 분뿐입니다. 폐하를 보필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오해했다는 건가요?”
“저는, 저는……!”
카레스가 두 손으로 제 목을 움켜쥐고 털썩 주저앉았다.
“카레스!”
“누구보다 폐하를 존경합니다. 그분의 신임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폐하를…….”
카레스는 망가진 라디오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가 제 목을 조르는 줄만 알고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목에 걸린 로켓 목걸이를 감싸 쥐고 있었다.
‘상아와 은으로 만든 로켓 목걸이? 카레스의 것일까? 아내도 연인도 없다고 들었는데…….’
마성으로 진실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슬프도록 확실한 건, 카레스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거였다.
그의 충성심이 흐려지거나 훼손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
오랜만에 마성을 써서 그런 걸까.
아니면 카레스를 향한 의심이 커졌기 때문일까.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통 기운이 없었다.
스프를 떠먹다가 은스푼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새 스푼을 꺼내주며 니사가 염려했다.
“여독이 쌓이신 것 같아요. 당분간 푹 쉬셔야겠어요.”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많이 왔다며?”
“엘리자벳 님이 무고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챈 거죠. 다들 엘리자벳 님과 어울리고 싶어서 난리예요.”
소문은 나를 황태자 시해범으로 몰았다.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고, 추격대가 움직이면서 내가 범죄자란 것이 진실처럼 알려졌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평민 여자가 알고 보니 악녀였다! 행실이 문란해서 과거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니콜라이와 나의 러브스토리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브렌든 후작이 날 음해했다는 자백을 한 뒤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내가 니콜라이의 보호를 받으며 환궁하자 날 옹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황태자 전하와 네틀톤 후작 각하께서 엘리자벳 님의 무고함을 널리 알려주셨어요. 수잔 님도요.”
“초대장이 쏟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겠네.”
“브렌든 후작은 어떻게 될까요?”
“목숨은 겨우 건지겠지. 딸이 나타나서 이상한 말만 하지 않는다면.”
“로즈 황비는 제국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잠시 잊고 있었지만 로즈의 탈옥은 수상했다.
조력자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얼음탑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던 걸까?
“로즈를 지키던 간수들은 전부 처벌받았다지?”
“얼음탑의 아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까요.”
“그들이 뭐라고 했대?”
“저도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니사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고문을 했는데도 끝까지 기억 안 난다고 했대요. 간수 다섯 명 전부요.”
“기억을 잃었다고?”
“술을 퍼마신 거겠죠. 우리도 비슷한 작전을 썼잖아요?”
한쪽 눈을 찡끗하며 니사가 미소 지었다.
‘날 지키던 병사들과 얼음탑의 간수들은 달라. 실수하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데 술을 마셨다고? 죄수가 도망칠 때까지 다섯 명이 전부?’
마성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마성에 걸렸다 해도 목숨이 위험해지거나,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생존 본능이 마성을 압도하기 때문이 아닐까?
간수들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마성보다 훨씬 강력한 뭔가에 조종당한 것이 분명했다.
‘누가 그런 힘을 가졌을까? 내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이 로즈를 도왔다는 건가?’
카레스를 둘러싼 비밀과 이해할 수 없는 로즈의 탈옥.
축축하고 서늘한 어둠이 황궁을 휘감은 것만 같았다.
“황궁에 돌아오길 잘한 것 같아.”
은스푼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니사가 노래하는 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럼요. 누명을 벗었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좋은 일이란 말에 자연히 니콜라이가 떠올랐다.
애써 실망한 기색을 숨기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번엔 니콜라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러면 내가 청혼해야 하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장면이 떠올랐다.
니콜라이의 창문 아래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나.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며 ‘평생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줄게!’라고 고백하는 나.
상상만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한다고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