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 황제는 옷을 벗고 잔다 (96/97)


#96. 황제는 옷을 벗고 잔다
2023.08.01.



 
머리를 감싼 날 니사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봤다.


“엘리자벳 님. 후궁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누가 보낸 건데?”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니사가 하늘색 봉투를 건넸다.

발신인에 프레이아, 신시야, 엠마 이 모두가 적혀 있었다.


‘혹시 황후 책봉 소식을 들은 건가? 클라우디아, 카레스밖에 모르는 일인데…….’

카레스의 목에 걸려 있던 로켓 목걸이가 떠올랐다.

분명 여성용 장신구였다.

카레스가 황비 중 하나와 내통하며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면?

지나친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답답했다.

향수가 뿌려진 초대장을 열었다.

-엘리자벳 엠스터 양을 티파티에 초대합니다. 정성껏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참석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무례하다 여겨질 만큼 단조로운 초대였다.

대답을 짐작하고 있으면서 니사가 물었다.


“초대엔 응하실 건가요?”

초대장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차와 과자를 공짜로 준다는데 안 갈 수 없잖아?”

 

***



“신시야 황비님. 블랙폴드 백작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신시야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반사적으로 옷매무시를 확인했다.

치마의 주름을 펴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버지.”

신시야가 인사를 건넸다.

블랙폴드 백작은 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처소 곳곳에 쌓인 책을 둘러봤을 뿐이었다.


“논리학 공부는 잘돼 가고 있느냐?”

검은 콧수염을 비비 꼬며 블랙폴드 백작이 물었다.


“철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론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필요 없다. 철학은 유행이 지난듯한데 다른 학문을 시작해라. 요즘은 약학이 대세라지?”

“아버님의 권유로 여러 학문을 섭렵했습니다만…… 약학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누가 가볍게 하라더냐? 그런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황후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못마땅한 얼굴로 블랙폴드 백작이 질책했다.


“너도 눈이 있다면 알겠지. 네가 프레이아보다 미모가 처진다는 걸.”

“죄송합니다.”

“엘리자벳이란 계집보다도 훨씬 못하다. 네가 황후가 되는 길은 그나마 똑똑한 머리로 다른 골 빈 황비들을 압도하는 것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하진 않아도 신시야는 특유의 도도함이 돋보이는 미녀였다.

하지만 블랙폴드 백작의 눈에는 늘 모자란 딸이었다.


“네 동생이었다면 벌써 황후가 됐을 것이다. 너보다 훨씬 아름답고, 영리하니까.”

신시야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난 학자가 되고 싶었어. 입궁해서 딱 하나 좋았던 점은, 신디랑 비교당하지 않는 거였는데…….’

블랙폴드 백작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방구석에서 책만 읽지 말고 외모를 좀 가꾸거라. 창백하고 우울해 보이는 여잘 좋아하는 남자는 없다.”

“노력하겠습니다.”

“아비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느냐? 우둔한 것. 쯪.”

딸을 바라보는 블랙폴드 백작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신시야는 목 끝까지 치미는 말을 밀어 넣었다.


‘지식을 쌓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하셨잖아요. 이제는 외모를 가꾸라고요? 제가 황후가 된다고 신디가 과연 기뻐할까요?’

질투심 많은 여동생을 떠올리며 신시야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자신이 뭘 하든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신디에게 쏠린 사랑과 관심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열어 봐라.”

블랙폴드 백작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엔 금과 루비로 만들어진 로켓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섬세한 세공을 보니 값비싼 물건이 틀림없었다.


“제 생일을…… 기억해주신 건가요?”

생일은 이 주 전에 지났지만 기쁨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제 생일을 기억해준 것도, 선물을 준 것도 처음이었다.

잠시 눈썹을 치켜뜨던 블랙폴드 백작이 피식 웃었다.


“뭐, 그리 생각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소중히 보관할게요.”

“그래야 할 것이다. 그 안에 맹독이 들었으니까.”

“!”

블랙폴드 백작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감돌았다.

신시야의 손에서 목걸이가 툭 떨어졌다.

바로 매서운 꾸중이 날아왔다.


“어허! 그러다 독이 새어나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하지만…… 독을 쓰는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황태자에게 독을 쓴 건 잘했다. 실패했지만,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지.”

그토록 바라던 칭찬을 들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잊고 있던 두려움이 심장을 쾅쾅 때렸다.


‘만약 내가 중독사건의 배후라는 게 알려지면…… 얼음탑이 아니라 단두대로 보내질 거야. 아버지는 날 외면할 테고.’

신시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도록 뒤로 감췄다.

어린 황태자를 해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 없이 외롭게 자라는 황태자가 늘 가여웠다.

블랙폴드 백작이 다정한 손길로 신시야를 쓰다듬었다.

신시야는 그 손길을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착하지, 신시야. 이번에 독을 먹여야 하는 사람은……”

 

***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를 껴안고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소용없었다.


‘내일은 니콜라이의 청혼을 받아들여야지. 날 밝는 대로 찾아가는 거야!’

잠이 안 오는 것도 당연했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데 소풍 전날 어린애처럼 눈이 말똥말똥했다.

따뜻한 우유 한 잔도, 카모마일 향낭도 도움되지 않았다.

뻐근한 허리를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 서서 본궁을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니콜라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맥박이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꼭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까? 지금 가서 말하면 되잖아. 우리 결혼하자고.”

두근거림과 함께 불끈 용기가 솟았다.

예전에 니콜라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거든 찾아오라. 그대의 방문은 언제든 환영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다 큰 처녀가 늦은 밤에 남자의 침실을 찾아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하지만 그 남자는 낮이든 밤이든 내킬 때면 내 방에 찾아왔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을 이용해서.


“나라고 못 할 건 없잖아?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

혼잣말해놓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부라는 말이 조금도 실감 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내 남편이 되는 것도, 내가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것도 다 거짓말 같았다.

또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건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니콜라이를 만나야만 했다.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옷을 갈아입을까? 아니야, 우연히 들른 것처럼 보여야 해. 그래도 슬립 차림은 너무 야하잖아?”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을 거듭했다.

끝내 어깨에 숄만 걸쳤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머, 여기가 폐하의 침전이었다고요? 전혀 몰랐어요. 밤 산책 중이었거든요.’라는 식으로 대꾸할 계획이었다.

허접한 변명이지만, 상관없었다.

마성만 있으면 빠져나오는 건 시간 문제니까!

***

고민이 무색할 만큼 침전의 호위 기사가 날 반겨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엘리자벳 님. 폐하께서는 침전에 계십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올 줄 알고 계셨나요?”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자벳 님께서 찾아오시면 아무 이유 묻지 말고 안내하라고요.”

기사가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럴 만도 했다.

잠옷과 슬리퍼 차림의 여인이 진짜 찾아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기사한테 말해둔 걸 보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말도 진심이었네…….’

수줍은 기쁨과 왠지 모를 안도감이 차올랐다.

문을 열어주는 기사에게 미소로 고마움을 전했다.

침전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폐하…… 계세요?”

어색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간질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세 좋게 나섰던 것과 달리 긴장감이 넘실댔다.


‘자다가 깨면 짜증 날 텐데…… 그냥 돌아갈까?’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니콜라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날 휘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용기를 그러모았다.

황금 조각과 대리석 기둥, 금실 자수가 들어간 붉은색 천으로 장식된 거대한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다 멈칫했다.

그의 수면 습관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었다.


‘니콜라이는 옷을 벗고 자는데! 아랫도리까지 몽땅 벗고 있으면 어쩌지……?’

완벽한 근육을 자랑하는 니콜라이의 상반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각칼로 새긴 것처럼 예리한 각을 자랑하는 복근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지는 이불!

그리고 그 아래…….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그것도 잠시, 펄펄 끓던 쇳물이 굳어버리듯 싸늘히 식었다.

니콜라이의 침대는 텅 비어있었으므로.


“어디 간 거지? 기사가 안에 있다더니?”

주름 하나 없이 정돈된 이불을 들춰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껏 달아올랐던 가슴이 우중충, 가라앉았다.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면서도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왜 벌써 가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사의 물음이 나를 한층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

카나리아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유난히 밝은 별도,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장미 넝쿨도 꼴 보기 싫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니콜라이의 얼굴이 짜증을 돋웠다.

무엇보다 열받는 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나 자신이었다.


“조신하게 잠이나 잘 것이지! 다 큰 남자가 겁도 없이 어딜 나간 거야? 이 야밤에!”

허공에 주먹질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발길질도 했다.

벗겨진 슬리퍼가 포물선을 그리며 휙 날아갔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밤이슬에 젖은 잔디를 밟고 대차게 미끄러졌다.


“아앗!”

몸이 공중에 붕 떴다.

하늘이 한 바퀴 휙 돌면서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이대로 떨어지면 허리가 멀쩡할 리 없었다.

예견된 고통보다 쪽팔림이 두려웠다.

여기서 허리를 삐면 뭐라고 변명한다는 말인가!

두 눈을 질끈 감는데 누군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엘리자벳?”

니콜라이였다.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놓으면 내가 다시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산책 중이었어요.”

“제법 격렬한 운동을 하던데?”

니콜라이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들끓던 원망과 분노가 사르르 녹았다.

아니, 거의 그럴 뻔했다.


“폐하야말로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제법 날카롭게 물었다.

니콜라이가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을 건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