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첫날밤까지 기다려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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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첫날밤까지 기다려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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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첫날밤까지 기다려주실래요?
2023.08.04.
“그대를 만나러 갔었다. 침대가 비어있어 깜짝 놀랐다.”
“카나리아 방에 가셨다고요?”
“그대를 또 잃어버린 줄 알았다. 향기를 쫓을 수 없었다면 심장이 터져버렸을지도.”
니콜라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절 걱정시켰던 내가 괘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심신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사실 저도 폐하께 갔었어요.”
“이 차림으로?”
니콜라이가 못마땅한 눈으로 날 훑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얇은 슬립 한 겹을 뚫고, 그 안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숄을 여몄다.
달아오른 얼굴까지는 가리지 못했지만.
“자꾸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설마 황궁에 치한이라도 있겠어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그대는 너무 무모하다.”
니콜라이가 투덜거리며 재킷을 벗었다.
내 어깨를 감싸는 니콜라이의 체취.
나보다 체격이 큰 그의 옷을 덮자 꼬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니콜라이 몰래 재킷에 은은하게 벤 향기를 들이마셨다.
“오며 가며 누구를 만났는지 한 명도 빠짐없이 말해라.”
니콜라이가 진지하게 명령했다.
“어쩌시려고요?”
“황후가 될 여인의 속옷 차림을 봤으니 살려둘 수 없다.”
“엄연한 잠옷이에요!”
대번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니콜라이가 새치름하게 고집을 부렸다.
“남자들 눈엔 그게 그거다. 야해 보이긴 똑같으니까.”
야하다고?
뚫린 곳도 없고 비치는 데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 미쳤다고 속옷만 입고 돌아다녀요?”
허리에 손을 올린 내가 항변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니콜라이가 머뭇거리며 두 팔로 날 감쌌다.
“폐하?”
그의 심장은 전속력으로 달려온 소년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내 맥박도 덩달아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농밀하게 짙어지는 침묵을 뚫고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만 보고 싶단 말이다.”
한숨이 가득 섞인 중저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뜨거운 무언가가 뱃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내 허리에 닿은 손이, 날 내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뭘 원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대의 모든 걸 혼자 갖고 싶다. 머릿결도, 속눈썹도, 뺨도, 코도, 입술도…….”
차례차례 손길이 옮겨갔다.
머리를 쓰다듬고, 속눈썹을 매만지고, 뺨을 간지럽히고, 코와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낯선 전율이 온몸을 핥고 지나갔다.
늦은 밤, 황궁 정원은 아직 만개하지도 않은 장미향으로 가득했다.
“그대를 사랑한다, 엘리자벳.”
한 마디에 이성이 무너져내렸다.
꽉 잡고 있던 영혼도 멀리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오래 참았던 눈물 한 조각이 밀려 나왔다.
‘내일이면 사라지는 꿈은 아니겠지?’
사랑하는 남자가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날 사랑한다니.
그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새로운 삶을 선물 받던 때보다 황홀했다.
너무 기쁘면 사람이 우는구나.
새삼 깨달았으나 꾹, 참았다.
기다리고 기다려온 이 순간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치도록 후회했다. 예물도 없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청혼한 것에 대해서.”
그의 목소리에 회한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내 안의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후회했어요. 바로 승낙하지 않은 것을요…….”
두 뺨이 끓어 넘치는 주전자처럼 새빨개졌다.
명치 끝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럼 나와 혼인해 주는 것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
잘게 떨리는 그 눈동자에 안도와 환희가 넘실댔다.
“……네.”
터질듯한 가슴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오해도 끝내고 싶었다.
그를 향한 나의 욕망 또한 같은 마음으로 긍정하고 싶었다.
“반지는 집에 많아요. 폐하의 진심이 제일 예쁜 반지예요.”
“……!”
“저의 남편이 되어주실래요, 폐하?”
“이 세상 가장 멋진 남편이 될 것이다, 엘리자벳!”
니콜라이의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내 눈도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내겐 그대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폐하를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엇나갔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서로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상처받기 싫어서, 거절당하기 싫어서.
둘 다 조금씩 겁쟁이였고, 그 때문에 오래도록 상처 입었다.
“그대를 보내줘야 할 거라 믿었다. 나처럼 복잡한 사내 말고, 그대만을 바라보는 사내에게로…….”
모든 걸 가진 줄 알았던 남자가 두려움을 달래며 고백했다.
저릿저릿한 손을 꼭 쥐고 대답했다.
“폐하가 절 이용만 하시는 걸까 봐 두려웠어요. 언젠가는 이용 가치가 사라질까 봐…….”
테라스에서의 첫 만남이, 그날의 첫 키스가 기억 속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그날처럼 달이 밝았다.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도, 아찔하도록 농밀한 분위기도 똑같았다.
무엇보다 그대로인 건, 나의 모든 걸 빨아당기는 듯 빛나는 니콜라이의 눈동자였다.
“그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엘리자벳이란 여자를 평생 내 곁에 두고 싶었다.”
니콜라이의 입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폐하……!”
“엘리자벳!”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잃어버릴까 두렵다는 듯 서로의 몸이 맞붙이고, 밀착했다.
이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삼켰다.
더운 숨결이 밤바람에 섞여들었다.
뜨겁고 매끄럽고 촉촉한 살점이 내 안을 파고들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오색찬란한 불꽃이 터졌다.
불꽃이 꺼지기도 전에 새로운 열기가 끓어올랐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니콜라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나를 탐했다.
나 역시 그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싶었다.
젖은 살점이 비벼지는 야한 소리가 아찔하게 울려 퍼졌다.
니콜라이는 쉴 새 없이 민감한 말초를 건드렸고, 나는 속절없이 속눈썹을 떨었다.
그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내 목덜미에 닿았을 때 촉촉이 젖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읏……!”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이곳은 침대 위도 아니고, 방도 아니었다.
니콜라이를 원하는 마음과 별개로 때와 장소는 가리고 싶었다.
“이 이상은 안 돼요.”
니콜라이가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내 안에도 같은 불꽃이 담겨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혼인식까지 남겨두고 싶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 된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늑대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킁킁?”
장난기를 섞었지만, 본의 아니게 약점을 건드렸다.
탁하게 가라앉는 그의 눈빛이 죄책감을 찔렀다.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조심스레 물었다.
“첫날밤까지 기다려주세요.”
깊은 고민에 잠긴 듯 니콜라이는 대답이 없었다.
“폐하. 저도…… 꽤 참고 있다는 걸 믿어주실래요?”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옆으로 길어졌다.
“그대는 나를 이런 식으로 조련하는군.”
“저는 그저…….”
“내가 고작 늑대놈 따위에게 또다시 휘둘릴 줄 아느냐?”
분함을 참는 낮은 목소리가 가슴을 흔들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엾어 보일 만큼 축 늘어진 눈썹 때문에 하마터면 침대로 가자고 말할 뻔했다.
‘정신 차려, 엘리자벳! 미남계에 넘어가면 안 돼!’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새초롬하게 물었다.
“싫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첫날밤은 아껴두고 싶어요.”
“……그대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내 삶의 끝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니콜라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손등에 입술을 꾹 찍어눌렀다.
그의 입술이 닿은 살갗이 델 듯 뜨거웠다.
이번 생이 끝나고 다음 생이 시작되어도 잊지 못할 만큼.
***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기운이 펄펄 났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나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종일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댔다.
그때마다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내가 원작 폭군을 길들였다니……! 믿기지 않아.’
숱한 밤 단두대 동기였던 니콜라이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내 명령을 따르겠노라며 무릎을 꿇었다.
감정이 들끓었을 텐데,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무섭게 억눌렀으리라.
하지만 일말의 불안은 여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늑대를 아주 없앨 방법은 없는 걸까?
니콜라이는 영원히 늑대와 공존해야만 하는 걸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 봤던 초록 연기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늑대의 초록 연기에 대해 알아내야 해. 세 번째 신물에 대해서도.’
하얀빛은 내게 역마를 막으라고 했다.
저승꽃이 언제 창궐할지 아무도 몰랐다.
시몬의 발병처럼 기이한 일이 또 벌어질지 몰랐다.
황후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였다.
책임져야 할 일도 늘어날 테고.
‘프란츠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더글라스에게도…….’
프란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더글라스나 수잔의 반응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다음 달 개국기념일에 황후 책봉을 선언할 계획이었다.
혼인식과 즉위식은 라일락 축제에 거행하기로 했다.
원작 엘리자벳과 폭군이 처형되는 그 날이었다.
“니사. 후궁에 가봐야겠어.”
한 줄도 읽지 못했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티파티는 내일모레 아닌가요?”
니사가 일정을 되새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준비 없이 적진에 뛰어들 순 없잖아?”
“어쩌시려고요?”
“하녀 작업복 좀 구해줘. 허드렛일 하는 하급 하녀용으로.”
***
뻣뻣한 질감의 검은 하녀 옷을 입고 흰 앞치마를 둘렀다.
갈색 단발 가발까지 쓰고 나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니사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녀치곤 피부가 너무 하얘요. 손도 비단결처럼 부드럽고요. 들통날 수 있으니까 얼른 빠져나오셔야 해요. 제가 하녀장의 주의를 끌고 있을게요.”
니사가 화학약품 냄새가 나는 누리끼리한 화장품을 내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손에는 이불 빨래가 든 광주리를 쥐여줬다.
“빨래터에서 다시 만나요. 카나리아 방까지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하니까요.”
빨래터 위치를 알려주면서도 니사는 날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을 했다.
“절대 황비 처소엔 들어가지 마세요. 특히 신시야 황비는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신시야는 왜?”
“후궁 하녀들의 이름과 얼굴을 낱낱이 꿰고 있어요. 낯선 하녀가 나타나면 바로 눈치챌 거예요.”
니사가 연필로 내 콧잔등에 주근깨를 콕콕 찍었다.
손거울로 내 모습을 살폈다.
칙칙한 피부색과 주근깨 덕분에 빛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역시 예쁘다니까? 더 조심해야겠네. 아무렴.’
다시 한번 다짐하며 니사에게 물었다.
“프레이아는 어떤 편이야?”
“하녀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요. 자기 전속 시녀가 누구인지도 모를걸요?”
“엠마는 친절하다고 들었는데.”
“사용인들에게 제일 다정하시죠. 하지만 혼자 기도하시는 걸 좋아해요. 방해받는 걸 싫어하시고요.”
엠마는 독실한 모라신시아 교인으로 알려졌다.
경쟁과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적인 성정이라고도 했다.
‘성녀라는 사실을 알리면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파이프 후작 때문에 어려우려나?’
어쭙잖게 날 도발하던 로즈는 처절하게 몰락했다.
브렌든 후작가도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황비들이 섣불리 움직일 리 없지만, 변수에 대비해야 했다.
“절대 황비들 근처에는 가지 마세요!”
니사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니사의 충고를 어기게 되리란 걸 예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