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루엠 상단의 방문 (5/65)



〈 5화 〉루엠 상단의 방문


"여어! 오랜만이네 한센! 요새 별일은 없지?"
"하하. 여러 신들께서 마을을 가여히 여기시는지 큰 문제가 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상인은 자신의 앞에 공손한 자세로 서있는 한센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넸고, 한센은 그런 그에게 정중한 태도로 답하며 마을쪽을 가리켰다.

일개 상인에게 마을의 촌장이 취하는 태도 치고는 과하다 여겨질  있었으나 한센의 앞에 서있는 이 제이콥이라는 사내는 마를르 남작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상단에서도 부단주의 직위를 가진 지위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언제나 머물던 장소를 비워두었습니다. 케인! 나는 제이콥님을 모실것이니 네가 다른 일행분들을 안내하도록 해라. 곧 해가 저물테니 서두르도록해."
"네 아버지. 그럼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큰아들 케인이 다른 상인들과 호위용병들을 이끌고 마을의 중심부에 임시로 마련한 장터로 이동하는것을 잠시 지켜보던 한센은 제이콥의 곁에 두터운 로브를 뒤집어쓴 한사람이 남아있는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제이콥은 릴리나를 한센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분은 상행을 출발하기 직전에 합류하신 엘프이시네. 이번에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가시는 길에 아르덴 숲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궁금하다 하여 모시고 왔지."
"오! 숲의 수호자분이셨군요 언제나 숲의 푸르름이 함께하시길. 미력하게나마 이 마을의 촌장직을 수행하고있는 한센이라고 합니다."
"푸른 숲의 어머니의 자애가 함께하기를. 반갑습니다. 릴리나라고 합니다."


한센은 마을에 직접 엘프가 찾아온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인사를 건넸다. 솔라스제국의 패망후 엘프들이 적극적으로 외부활동을 시작하면서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그들의 지위역시 자연스럽게 상승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느 귀족가문에서건 엘프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두고싶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한센의 입장에서는 마을에 귀족에 준하는 귀한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것과 다름없었다. 일단 둘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한센은 지금까지 조용히 자신의 뒤를 따르던 막내아들 칼스를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아참! 여기 이녀석은 제 막내아들인 칼스라고합니다. 안그래도 오늘 제이콥님께 이녀석을 소개해 드리려 했는데 아르케 여신님이 이녀석을 아끼긴 하나봅니다. 이런 자리에 숲의 수호자분이 함께해주실 줄이야."
"그래 이제 너도 본격적으로 마을일에 나설 나이가 된 모양이구나. 마을에 오가며 몇번 얼굴은 본 기억이난다."
"안녕하십니까. 칼스라고합니다."

제이콥은 에올론 마을에 물건을 가지고 올때 늘 한센의 집에 머물렀고, 그당시 몇번 집에서 칼스와 마주하기도 했으나 그때는 어린 아이인지라 큰 관심을 두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촌장인 한센이 굳이 막내아들인 칼스를 소개시켜주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살피기 시작했고, 칼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방금전 한센의 의미심장한 소개를 듣게된 엘프 릴리나였다.


"아르케 여신께서  아이를 아끼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네요."
"아! 사실 이녀석이 꿈에서 아르케 여신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한센 이사람이 막내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네만. 그렇다고 해서 여신님의 이름을 함부로 팔면 큰일이   있다네."
"아이쿠. 제이콥님 제가 어찌 여신님의 이름을 함부로 팔겠습니까. 게다가 숲의 수호자 분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서 말입죠."


마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촌장 한센이었으나 그의 영향력은 고작 인구가 백명을 겨우 넘긴 작은 마을에서 통용되는것에 불과했다.

이에반해 제이콥이 몸담고있는 루엠상단은 마를르 남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들의 눈밖에 났다가는 여러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었고, 귀족가와의 관계를 배제하더라도 마을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그들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배풀어야했다.


그렇게 굽실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칼스의 머릿속은 예상밖의 등장인물로 인해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와. 엘프라는게 실존하는 것이었구나. 확실히 미와 조화의 종족이라는 수식어 답게 예쁘기는 하네. 그나저나 하필 아르케 여신의 추종자인 엘프가 이 타이밍에 마을에 오다니. 설마 지구에서  소설에 나오는 엘프마냥 거짓말탐지기를 체내에 탑재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지구의 삶에서 보았던 몇몇 장르소설에 등장하는 엘프는 지금 칼스의 눈앞에 있는 릴리나 매우 흡사한 외형을 띄고있었는데, 그랬기에 책에서 봤던것처럼 거짓말을 하면 들통나는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 칼스였다.


그러나 어쨋든 일단 부딪혀봐야한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자신이 만든 벌통에대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아주 아름다운분이 숲에서 나와 제게 벌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처음에는 그냥 일반적인 꿈인가 싶어 무시했는데. 몇차례 더 비슷한 꿈을 꿔서 한번 그대로 따라해봤는데 정말로 벌을 키울  있게 되었죠."
"호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네. 사실 그분이 아르케 여신님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언제나 꿈속에서 나타나실때면 숲이 있는곳에서 나타나셨고, 제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거든요. 마치 지금 앞에 계시는 엘프님 처럼 말예요."


릴리나는 귀향길에 우연히 들린 마을에서 자신들이 모시는 여신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소년을 보자. 혹시 자신이 이 마을에 들르게 된것도 알게모르게 여신님의 힘이 작용한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시골마을의 작은 아이가 배웠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진 그녀였다.


"으음. 제가 여신님의 외모와 견줄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확실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르케님이 가르침을 주셨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군요. 혹시 날이 밝으면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만들었다는 벌집을 한번 구경해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안그래도 이번에 루엠상단에서 오시는 상인분들에게 꿀이랑 밀랍을 판매하고 싶기도 했거든요."


칼스는 그녀가 딱히 자신의 말의 진위를 의심하는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흔쾌히 허락했다. 오히려 그녀로 인해 루엠상단의 부단주인 제이콥마저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이득을  셈이었다.


"자자 그럼 오늘은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테니 빠르게 저녁식사를 하고 쉬시지요. 부단주님은 늘 사용하던 방을 비워두었으니 그곳에서 머무시면 될테고..."
"저는 이슬을 피할 지붕만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마을에 방문한 귀한 손님분을 그리 홀대할수는 없습니다. 아이들 방을 하나 비워드릴테니 거기서 쉬시지요."

잠시 대화의 흐름을 쫒던 한센은 어느정도 아들의 말이 먹혀들었다 싶자 준비된 식사자리로 둘을 안내하며 부인 안나에게 일러 에일린의 방을 급히 비워 릴리나에게 내어주라 했다.


그덕에 졸지에 방에서 쫒겨나게된 누이에게 밤새 괴롭힘을 당한것은 다름아닌 칼스였다.

다음날아침 여느때보다도 훨씬 더 북적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칼스는 자신의 배위에 한쪽발을 올리고  배를 훤히 드러낸채 잠에 취해있는 에일린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이제  시집갈 자리를 알아봐야할 때가 되어가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여나 잠에서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누이의 발을 치워낸 후 밖으로 나서자 어제 급하게 짐을 풀었던 루엠상단의 상인들이 마차에 실려있던 물건들중 일부를 촌장인 한센의 집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고있었다.


정기적으로 에올론 마을에 들르는 루엠상단의 경우 이전 상행에서 미리 정해둔 물량의 식량(주로 곡식)들을 가지고왔고, 반대로 에올론 마을에서는 마을의 주요 상품인 훈제고기와 치즈와같은 유제품을 비축해두었다가 그것들과 교환하곤 했다.


그런 마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거래외에도 상인들은 마을사람들에게 팔만한 물건들을 챙겨오기도 했는데, 그러한 물품을 거래하기위한 임시 장터가 마을 공터에 만들어져있었다.


릴리나는 대부분의 엘프들이 그러하듯 아침 동틀무렵에 바깥에 나와 일출때 순간적으로 방출되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이 믿고있는 여신 아르케에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는 상인들과 그런 상인들의 일을 도우며 약간의 품삯을 받는 에올론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일어나는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소년은... 여신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던..."


그곳에는 아직 한참 잠에 빠져있을법한 자그마한 소년이 생소한 방법으로 아침운동을 하고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어제 여신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그 아이였다.

"아직 한참 꿈나라에 있어야할시간 아닌가요? 그 시기에는 푹 자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답니다."


20여분간 끊임없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나서야 아침운동을 마무리하고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는 칼스에게 다가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 엘프님이시군요. 저는 항상 이시간쯤에 일어나 움직이는게 습관이 되어있어서요."
"부지런한 소년이군요. 하긴 새벽 동틀녘이야말로 아르케 여신님의 기운이 가장 풍성할 때지요.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분께서 가르침을 주실만도 해요."

칼스는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릴리나의 말에 내심 뜨끔한 심정이었으나. 겉으로는 쑥쓰럽다는듯 고개를 숙인채 몸을 배배꼬며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보일만한 반응을 연기했다.

"에이 그럴리가요. 그냥 우연히 여신님의 눈에 띄었나 보죠."
"그런가요? 하지만 그 우연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수를 세기 힘들정도로 많이 있답니다. 그러니 소년... 이름이 뭐라고 했죠?"
"칼스입니다. 에올론 마을의 칼스예요."
"그래요 칼스. 칼스는 좀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될거라 생각해요."


무언가 확신에 찬듯한 그녀의 말에 오히려 당황한것은 칼스였다. 그로서는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의 출처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급하게 지어낸 궁여지책이었는데. 그것을 이렇게까지 진실되게 믿어준다는것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요정님은 아직 제가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모르시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비록 오랜시간 인간들이 살고있는 도시나 마을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과 접하고 그들의 행동을 봐왔지요. 칼스의 모습은 여태껏 보아온 일반적인 어린아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것 정도는 금방 파악할수 있답니다."
"그말은 제가 애늙은이같다는 말씀이신가요?"
"후후. 보통의 그 나이또래의 아이라면 그런 질문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릴리나에 말에 칼스는 허를찔린듯한 기분에 대답조차  수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렇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묻는것 자체가 열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보일 행동은 아니었던 터였다.

그녀는 그렇게 곤란해하는 칼스를 배려라도 하듯 집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나오는 한센과 제이콥을 언급하며 화제를 돌려주었다.

"아! 저기 다른사람들도 슬슬 밖으로 나오네요. 아침에 칼스가 여신님께 배워 만들었다는 벌통을 보러 가기로 했었죠?"
"네. 하지만 저도 약간의 준비를 해야하니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움직이는것으로 하죠. 아버지와 부상단주께는 제가 말씀을 드리도록 할게요."
"알았어요. 그럼 아침먹을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릴리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칼스의 옆을 지나쳐 이제 막 건물을 빠져나온 한센과 제이콥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칼스는 이른아침부터 아름다운 외모의 요정과 이야기를 나눈것은 좋았지만 여러모로 심력소모가 많았기에 한숨을 내쉰  아침식사 후에 있을 벌통 내검을 위한 준비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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