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루엠 상단의 방문
평소보다 풍족하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마친후 칼스와 그 일행은 마을한켠에 위치한 벌통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조잡하게나마 몸을 보호할 수 있게끔 만든 장구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릴리나에게 각각의 용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준 칼스는 평소와 같이 말린쑥을 감은 횃대에 불을 붙여 연기를 쐬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거 참 독한냄새로군. 무슨 풀을 태운거지?"
"이것은... 알모즈군요. 생명력이 대단한 아이들이죠. 그만큼 다양한 효능을 가져서 일족들도 많이 활용한답니다."
"호오. 여기저기 잔뜩 돋아나는 잡초중에 하나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모양이군요."
"눈에 잘띈다는건 그만큼 생존력이 뛰어나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아무래도 숲속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다보니 기본적인 약초지식을 지닌 릴리나는 쑥을 활용하는 칼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자 그럼 칼스? 여신님에게 배웠다는 것을 한번 보여줄래요?"
"네. 일단 제 뒤를 따라오시구요. 혹시나 바닥에 벌이 있으면 밟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이녀석들은 동족의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으음. 나는 딱히 저 벌집안의 모습을 보고싶은 생각은 없으니 여기있도록 하겠네. 내가 궁금한것은 과연 저기서 제대로된 꿀과 밀납을 얻을수 있느냐이니 말이야."
"그럼 나도 부상단주님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요정님과 다녀오도록 해라."
한센과 제이콥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구경하겠다고 이야기했고, 호기심이 짙어진 표정의 릴리나는 거리낌없이 칼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칼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있다는것을 들키는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벌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부우우우웅!
"자... 이렇게 벌통에도 연기를 쐬어주면 녀석들이 흥분하지 않게되요. 그 사이에 안에있는 벌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꿀을 채집할 수 있다고 배웠어요."
"확실히 연기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잠잠해지는게 눈에 보이네요. 알모즈에 이런 효능도 있었군요."
릴리나는 새로이 알게된 쑥의 효능에 신기해하며 벌들의 모습을 살폈다.
"엘프님들도 벌집에서 꿀을 얻지않나요?"
"후후후. 일족중에는 이런 벌이나 나비와같은 작은 벌레들과도 교류를 하는 재주를 지닌 이들이 있지요. 그들이 벌집에서 꿀을 얻어다 마을에 나누어 준답니다. 하지만 꿀을 원하는 이들은 많은데 그것을 구해줄 이는 적다보니 언제나 모자란것이 바로 이 꿀이지요."
"일단 오늘은 꿀을 채집하지는 않을거니까 그대로 벌집안에 넣어두도록 할게요. 사실 며칠 내로 상인분들이 마을에 들를거라는 소식을 듣고 넉넉하게 꿀을 채집해두었거든요. 여기서 더 꿀을 빼앗으면 이녀석들이 먹을 양이 없어져요."
릴리나는 아직 어린 소년인 칼스가 상당한 가치를 지닌 꿀이담긴 벌집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벌통안에 꿀이 담긴 판을 집어넣는것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케 여신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그들 부자의 말에도 반신반의했던 그녀였으나 이른새벽부터 일어나 어디서도 본적이 없는 체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소년을 보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것이 칼스는 잘 모르고 있었으나 실제로 아르케 여신은 여타 다른 신들에 비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내리는 일이 많았던 탓이었다.
'저 소년은 벌들을 그저 단순히 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있구나. 이런아이라면 확실히 여신님께서도 흡족히 여기셨겠지.'
또한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확신하게 된것은 바로 벌통안의 벌을 바라보는 칼스의 눈빛이었다.
"여왕벌도 큰 문제없이 자리하고 있는걸 확인했으니 다시 벌통을 닫아둘까하는데.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엘프님?"
"딱히 벌들에 대해서는 궁금한게 없네요. 다들 건강해보이기도 하구요."
"그럼 벌통은 이만 닫아두도록 할게요. 사실 이렇게 오래 열어두면 벌들이 나쁜 병에 걸릴수도 있거든요."
"칼스는 자상하군요. 한낱 미물이라고 할수있는 벌들에게까지 그런 마음씀씀이를 보이는것을 보면."
"자상하다기보다는 저에게 많은것을 내어주는 벌들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라고 해야죠."
칼스는 실제로 벌들에 대해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진심이 담긴 눈빛은 릴리나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다지 길지않은 내검이 마무리 되었고, 하나의 고비를 넘긴 칼스는 이제 원래의 목표였던 제이콥 부단장의 마음을 사로잡을 물품을 소개할 준비를 했다.
"이게 제가 저 벌집에서 얻은 꿀과 밀랍입니다."
"호오... 한번 맛봐도 되나?"
"물론이죠. 아! 엘프님도 한번 드셔보세요. 얼마전에 갓 떠낸 꿀이라 향이 아주 좋거든요."
칼스가 며칠전에 미리 채밀을 해둔 꿀단지를 꺼내 작은 접시에 꿀을 담아 둘에게 건넸다.
제이콥은 접시에 담긴 꿀의 향과 색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는데 이에반해 릴리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양의 꿀을 입으로 털어넣더니 꽤나 마음에 드는듯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음음... 이건 아그네스 꽃에서 나온 꿀인가 보네요. 거기에 여러 꽃들의 향도 섞여있어 그야말로 조화로운 맛이에요."
"엘프님 말씀대로 확실히 향이 좋군요. 전혀 잡내가 나지않는걸보니 채밀을 하는 과정에서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칼스! 이정도면 성에 가져가도 꽤 비싼값을 받을 수 있겠어."
"정말입니까 제이콥님?"
제이콥의 말에 반색을 한것은 칼스가 아닌 바로 에올론마을의 촌장인 한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마을의 규모상 넓은 초지를 관리할 능력이 안됐기에 그다지 많지 않은 수의 가축을 키워 마을을 유지해야 했던 그에게 새로운 수입원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음. 물론일세. 문제는 꿀의 양과 지속적인 공급 가능여부겠지. 칼스라고 했느냐? 여신님께 아주 대단한 것을 배웠나보구나. 네가 배운대로라면 이 꿀을 얼마나 나에게 공급해줄수 있겠느냐?"
"그게 아직 이번이 첫해라서 정확한 양은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벌의 수가 어느정도까지 늘어날지 모르는데다 꿀은 어디까지나 꽃이 피어있는 동안에만 채밀이 가능하거든요. 확실한건 내년 이맘때쯤이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양의 꿀을 내어드릴 수 있다는 것 정도겠지요."
"지금 내게 줄 수 있는 꿀은 어느정도지?"
"아까 꿀을 따라드린 단지 보셨죠? 그정도 크기의 단지로 8통정도 채워져 있습니다."
칼스가 방금전 꺼내보였던 단지는 보통 800ml ~ 1L 정도의 꿀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근 7리터에 달하는 양이었고, 제이콥과 릴리나 거기에 한센마저도 그 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군. 게다가 앞으로 더 늘어날수 있다는 말이지..."
"네. 사실 아직 벌들의 수를 늘리는중이라 좀 더 채밀이 가능했지만 여유분을 많이 남겨둔 편이라서요. 그리고 아까 내년 이맘때를 말씀드린건 지금당장 이 주변의 꽃들이 다 져버렸을때를 가정한것이고, 꽃이 다 지지 않는다면 그때까지는 지금과 비슷한 양의 꿀을 모으는데 세달정도면 충분할거예요."
사실 칼스가 이번 채밀작업을 통해 얻은 꿀단지의 수는 15개를 채우고도 약간 남는수준이었다.
하지만 마을과 집에서 사용할만큼의 양을 남겨둬야 했고, 또한 처음부터 너무 많은양을 선보였다가는 마을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기에 판매량을 조절한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의 생각과는달리 이쪽세계의 기준에서는 많은양이었고, 제이콥 부상단주의 머릿속은 여러 계산으로 복잡해져가고 있었다.
'이 꼬마의 말이 전부 사실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르케여신님께서 알려준 지식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게다가 저 엘프도 딱히 저들의 말을 거짓으로 여기는거 같지 않으니...'
제이콥은 일단 이 작은마을에 나타난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기로 결론지었다. 어차피 이런 깡촌마을에 다른 상단이 방문할일도 없을테니 저 아이가 만들어낸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욕심같아서는 이런 작은 마을에 쳐박아두기보다 마를르 성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봐야겠군. 녀석이 장남이 아닌이상 언젠가 마을을 나서게 될테니.'
"좋다. 그럼 그 꿀을 모두 사들이도록 하마. 문제는 가격인데. 음... 꿀단지 하나에 은화 한개를 쳐주마."
"은화 한개면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는건가요?"
"보통 이 단지의 두배정도 되는 크기의 벌집을 은화 한개정도로 사들인다. 물론 그 안에서 나오는 꿀의양이 이만큼 많지는 않겠지만 밀랍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 그 값을 따로 매기면 큰 차이는 없을테지. 은화 한개면 마를르 성에사는 일반적인 가족이 열흘정도 배불리 먹을수 있는 돈이라고 보면된다."
칼스는 에올론마을에 살면서 은화라는것을 본적이 없었기에 그에게 물었고, 제이콥의 답변을 통해 어느정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동전 1개가 1000원 이라고 한다면. 10만원정도를 쳐준다는거네. 물론 지구와 이곳의 경제규모가 다르니 그 가치는 더 클테고. 확실히 꿀이 이곳에서 비싼 물품이긴 한 모양이야.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이정도면 충분히 우리쪽 입장을 생각해준거 같은데.'
한센은 제이콥이 은화 1개의 값을 제시한 그순간부터 아들인 칼스에게 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제스쳐를 보이고 있었기에 제이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그가 생각하는것보다 은화 1개의 가치는 훨씬 더 높았는데, 애초에 제이콥이 든 예시는 마를르 성내에서 살고있는 가족들을 기준으로 잡은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부왕국에서 은화 1개면 지구의 원화가치로 따지면 최소 20~30만원 정도는 되는 고액권에 해당했고, 거기에 칼스 입장에서는 다른 거래처를 뚫을 방법이 없으니 주는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제가 이 꿀을 다 들고있어봐야 딱히 쓸데도 없을텐데요. 값을 잘 쳐주시는거 같아 감사드릴뿐입니다."
"내가 봤을때 이 거래는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가격을 잘 쳐주는거다. 그러니 여신님이 가르쳐주신 그 지식을 잘 활용해 더 많은 꿀을 만들어 내거라."
그렇게 말한 제이콥은 단지안에 들어있는 꿀을 살펴보더니 칼스에게 물었다.
"근데... 꿀 말고 벌집에서 밀랍은 얻지 못하는거냐?"
"아뇨. 밀랍도 따로 준비해놨지요. 근데 꿀만큼 많지는 않아요. 보시다시피 벌집을 통째로 뜯어내는것이 아니라서요."
"그건 좀 아쉬운일이군. 일단 가져와보거라 그것도 적당한 값을 쳐줄테니."
칼스는 마을에서 사용할분량과 나중에 마를르 성에 들러 신전에 헌납할 분량을 뺀 나머지 밀랍까지 제이콥에게 판매하여 추가적으로 은화 한개를 더 얻게되었다.
첫 거래에서 총 8개의 은화를 얻게된 칼스는 그중 5개를 아버지 한센에게 마을 공금으로 사용하라고 넘겨주었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기기로 했다.
그렇게 제이콥이 칼스에게서 구매한 꿀과 밀랍을 가지고 마차로 향한 사이 칼스는 릴리나에게 조금 작은 꿀단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엘프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예요. 아시다시피 제가 이 꿀을 얻은건 다 여신님 덕분인데 마침 아르케 여신님을 모시는 엘프님이 이시기에 마을에 들린것도 그분의 뜻이 아닐까 싶어서요."
"그래도 이 귀한 꿀을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갈수는 없어요. 방에 돌아가면 값을 지불하도록 할게요."
칼스는 릴리나가 약간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값을 치룬다는 이야기를하자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기에, 손사래를 치며 그녀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는건 어떠신가요. 듣기로 엘프님은 요 몇년간 여러 영지를 돌아다니셨다던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보다시피 이곳에는 바깥 소식을 접할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요."
"음. 제가 칼스에게 해줄만한 이야기는 단편적인 소식들 뿐인데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그정도 조건이라면 받아들이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칼스."
칼스는 매번 이렇게 상인이나 외부인이 마을에 들르면 집안의 각종 요깃거리를 들고 찾아가 세상돌아가는 소식을 묻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마를르성 주변만 돌아다녔던 인부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학관계와 같은 중요한 정보를 알리 없었기에 별 쓸모없는 신변잡기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종족인 엘프가 등장했고, 그녀가 요 몇년간 동부왕국의 여러 영지를 돌아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주변 정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여겼던 것이다.
"낮에는 벌도 돌봐야하고, 해야할 일들이 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녁 식사 후에 방으로 찾아가도 괜찮을까요?"
"좋아요. 그럼 그때 제가 보고 들은것들을 알려줄게요."
"감사드려요 엘프님."
"릴리나."
"네?"
"내 이름은 릴리나예요.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줘요."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칼스에게 밝히곤 그가 건네준 꿀단지를 가지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릴리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칼스는 조금전 제이콥이 향한 방향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