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칼스는 새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에올론마을이 어떤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지는 알수없었으나, 적어도 위도상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30~60도 안에 들어갈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바로 4계절이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었는데, 이제 막 봄이지나고 여름에 접어든 지금 정확히 측정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30도정도는 될거같은 같은 더위가 연일 계속되고있었다.
"그나마 한국과 다르게 습도는 높지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아무리 습도가 높지않다고 해도, 더운건 매한가지였기에 혹시나 벌들이 폐사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되어 더욱 자주 들여보게 된 그였다.
엉성하게나마 만들어둔 차양막덕에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벌 역시도 온도에 민감한 곤충들이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벌통을 통째로 버려야할 상황에 처할수도 있는것이다.
"음. 역시 아그네스 꽃의 개화는 완전히 끝난모양이네. 꿀의 색이나 향도 저번과는 다른거같고... 킁킁. 밤꿀이랑 비슷한 향이나는데? 맛도 비슷하고. 잭! 혹시 저 숲속에 밤나무같은게 많이 있어?"
"밤나무? 제법 많은걸로 알고있는데. 보통 가을이되면 한번씩 다같이 숲에들어가 밤을 주워오기도 하니까. 칼스 너는 한번도 안가본거야?"
"응."
"역시. 촌장집 아들은 다른건가? 그래도 밤은 그즈음해서 자주 먹어봤을거아냐."
칼스의 질문에 잭이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고, 그의 말을 들은 칼스는 매년 가을이되면 밤을 이용한 간식들을 먹곤했다는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지금생각해보니 그랬던거같네."
"설마 지금 이 꿀이 밤나무꽃에서 나온 꿀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에이 그건 네가 잘못생각하고있는거야."
너무 당당하게 밤나무 꿀이 아니라 확신하듯 말하는 잭의 말에 칼스는 순간 이세계의 밤나무꽃에서는 꿀이 나오지 않는건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받은 잭은 뭔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작년 이맘때쯤에 케일아저씨를 따라서 숲에들어갔는데. 그때가한참 밤꽃이 피어있는 시기였거든? 근데 그 냄새가 어휴... 뭐라고해야하지. 아직 어린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좋은 냄새는 아니었어. 워낙 특이한 냄새라 확실히 기억하고있거든. 그런 꽃에서 꿀이나온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하다야."
"아. 뭔말인가했더니. 음음.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네."
잭의 말을 들은 칼스는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벌통을 마저 정리하기시작했다.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밤꽃에서 나는 냄새는 여러모로 남자들에게는 익숙한 향이기도했다.
그리고 그런 향을 뿜어내는 꽃에서 나온 꿀이라면 당연히 비슷한 향이 날거라 생각하는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여겨졌다.
'으음... 뭐 괜히 사실을 알려줬다가 충격을 받게하는것보다 모르고 있는게 나을수도.'
그때 여름철 벌에게 줄 물을 뜨러 내려갔던 제니가 돌아왔고, 잭과 칼스는 그녀가 떠온 물을 적당히 작은 나무통에 나누어 담은후 벌통 주위에 배치해 벌들이 충분한 수분섭취를 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꿀은 아직 뜰때가 안된거같으니. 두사람은 좀 쉬다가 해가질때쯤 한번만 더 벌집주위에 물좀 채워줘."
"쪼그만한 녀석들이 제법 물을 많이 먹네."
"얘들도 똑같이 더위를 타는거지."
"알았어. 나랑 오빠가 잘 살필테니까 칼스 너는 들어가 쉬어. 안그래도 며칠전에 안나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셨단말야. 더위속에 너 오래있게 하지 못하게하라고."
"엄마도 참... 알겠어. 대신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려줘야해?"
그렇게 이제 기본적인 벌통관리는 할수있게된 두 남매에게 뒷일을 맞긴 칼스는 송글송글 배어나오는 땀을 닦아내며 집으로 향했다.
얼마 전 몇번의 시행착오끝에 그나마 쓸만하게 만들어진 빨랫비누를 생각하며 그것을 좀더 개량해 판매할만한 상품을 만들어 보려고 골머리를 싸매던 그가 집으로 들어섰더니 한센과 케인 두사람이 기다렸다는듯 그를 불러들였다.
"칼스. 오늘 할일은 다한거냐?"
"네. 아빠랑 형도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오셨나보네요? 요 근래 농작물 관리한다고 늦으시더니."
"해가 뜨거워지니 물관리에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그나저나 잠시 이리와보거라. 네게 보여줘야 할게 있으니 말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의 칼스가 식탁에 앉자 한센이 식탁위에 펼쳐둔 양피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낮에 마를르남작가에서 보내온 거다. 올해 세금을 낼 시기와 그 품목들이 적혀있지."
"벌써 그게 온건가요? 보통 추수가 끝나는 초가을에 가져가지 않아요?"
"그전에 미리 알려주는거지. 혹시나 부족한게 있으면 알아서 채워놓으라는거야. 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여길봐라."
마를르남작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의 중반부에 세금품목들이 쭉 나열되어있었는데, 원래는 없었던 꿀과 밀랍이 새롭게 추가되어있었다. 거기에 추신사항으로 아르케 여신으로부터 양봉지식을 배웠다는 이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루엠상단에서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네가 여신님으로부터 얻은 지식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싶은 모양이야."
"어... 음. 그냥 세금을 내러가는 일행과 함께 마를르성에가서 적당히 인사만 하고 돌아오면 되는거 아닌가요?"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만."
칼스는 내심 올해 마을의 세금을 운반하는 일행에 껴서 마를르성에 다녀올 계획을 짜고있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그럴싸한 비누를 몇개 만들어서 루엠상단에 판매를 위탁해볼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보니 마를르성에 가는것은 둘째치고 그곳의 주인이자 이 마을의 실질적 지배자인 마를르남작이 직접 자신을 보고자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한센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네가 이번 기회를 잘 살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다. 내 조부께서 이곳에 터를닦기 시작하고, 아버지를이어 나의 대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고생을 겪어가며 이 마을을 꾸려낼수있었다. 하지만 결국 왕국의 남작령에 속한 작은 마을일 뿐이야. 지금의 네 눈에 보이는 아비가 마을안에서 제법 대단한 지위를 누리는것 같아보여도 저번에 보았듯 마를르성에서나온 상인들에게 눈치를 보아야하는게 현실이야."
한센은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눈앞의 칼스만했던 시절 모든것이 부족하고 모자랐던 마을의 모습이 생생하게 비쳐지고있었다.
그나마 모두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안정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갖추고있는것보다 모자란것이 많은게 이 에올론마을의 현실이었다.
"뭐...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간의 노력을 깎아내리시는거 아녜요?"
"물론. 나도 이 마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남작님의 눈에 들수 있을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야. 직접적으로는 멀리서나마 몇번 본것 뿐이긴 하지만 사람욕심이 많은양반이라 들었거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휘하상단에서 나온 이야기임에도 너를 직접 보겠다고 부르고있지 않느냐."
칼스는 갑자기 당장 마를르 남작의 밑에 들어가는것이 어떠냐는 식으로 진행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당황함을 감추지못했다.
물론. 칼스는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 마을을 벗어나 큰 도시로 가야한다는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고 여겼고, 실제로 지금 당장 그가 자리를 비울경우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일단. 무슨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올해 당장은 안돼요. 이제 막 벌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제니랑 잭은 물론이고 저도 아직 여신님의 가르침을 다 익히지 못했어요."
"그럼 좀더 안정화가 되면 한번 해보겠다는거냐?"
"그때는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아무튼 지금은 무리예요."
"알겠다. 뭐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남작님이 원하게되면 우리로선 어찌할수 없는상황이 펼쳐지겠지. 아직 제법 시일이 남아있으니 일단 최대한의 준비를 해두거라."
"네."
그렇게 그해 가을 마를르성으로의 방문일정이 잡혀버린 칼스였다. 하지만 아직 출발까지 2개월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그때까지 차분하게 준비하기로 했다.
일정상 며칠간 자리를 비워야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잭과 제니에게 좀더 많은 부분을 가르치기위해 힘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이기위해 벌통하나를 통째로 봉해서 가져가볼까하는 생각도 했으나.
괜히 그랬다가 귀족들이 벌에 쏘이는 불상사가 발생할수 있다고 생각됐기에 질좋은 꿀과 밀랍, 그리고 그동안 소중히 모아온 로열젤리를 챙겨가기로했다.
'로열젤리야말로 벌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지. 과연 이것의 가치를 이세계의 사람들이 알고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구에서는 예로부터 불로장생의 영약에 꼭 그이름이 포함될정도로 유명한 녀석이니 분명 그 값을 할거야.'
똑같은 알에서 태어난 애벌레가 꿀과 꽃가루를 먹고 자라면 고작 2달여를 살아가는 일벌이되고, 로열젤리만을 먹고 자라면 길게는 5년까지 생존하는 여왕벌로 변모하는것이다.
그런만큼 예로부터 귀한 약재로 취급되었고, 현대 과학에서도 아직 그 비밀을 전부 밝혀내지 못한 신비의 물질이 바로 로열젤리였다.
양봉에서의 성과 외에 비누의 개량도 조금씩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얼마전 잿물과 기름의 비율을 어느정도로 맞춰야 적당한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덕에 빨래터 곳곳에는 그가 나눠준 빨랫비누들이 놓여있었고, 아낙들은 예전보다 훨씬 힘을 덜들이고도 빨래를 할수있게되어 칼스에 대한 호감도는 꾸준한 상승곡선을 이루게 됐다.
그렇다고 그가 마을 여자들에게만 인기가 있었냐면 또 그런것만은 아니었는데. 바로 벌꿀로 만들수있는 물품중 하나인 벌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술은 당분이 발효가되는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알코올이 주 원료가되는 음료이다.
그렇기에 당분이 높으면 증류를 하지 않더라도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어낼수있었고, 당도라고하면 꿀이 다른 과일에 비할바가 아님을 감안하면 벌꿀주야말로 재래식 술중에 가장 독한술에 속했다.
술이라고 해봐야 낮은도수의 맥주정도를 접했던 마을남자들은 가끔씩 칼스가 나누어주는 벌꿀주를 마셔보곤 그야말로 환호성을 내뱉으며 그를 칭송하기에 이른것이다.
여담으로 겨우 20도도 안되는 술에 떡이된 마을남자들이 다음날 제대로 일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벌꿀주는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한 풀지 않는것으로 잠정결론내려졌다.
어쨌든간에 마을내의 칼스에대한 평판은 나날이 높아져만갔고, 이런 배경속에서 그는 자신이 하고싶은 일들을 편한 마음으로 진행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칼스가 마를르성으로 향해야할때가 다가왔고, 그는 여태껏 준비했던 물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
"칼스! 이거는 이쪽에 놓아두면 돼?"
"응. 그건 루엠상단쪽에 판매할거니까 대충 깨지지않게만 모아놔줘. 영주님께 드릴건 내가 따로 다 빼놨으니까."
"알았어."
"부럽다. 영주님의 초대를 받아 간다고했지? 근사한 파티에도 참석할수 있겠네?"
"글쎄. 별로 그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나저나 내가 없는동안 둘이서 벌통들 잘 관리할수있지?"
"맡겨만 두라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두 남매의 모습에 아직 조금은 불안하긴했지만 요 몇달사이 최선을 다해 가르쳐두었기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