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칼스일행과 비슷한 이유로 마를르성에 방문한 외부인이 많았는지 내성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긴 줄이 형성되어있었다.
그 긴줄의 맨 뒤편에 선 칼스는 늦은 밤에 도착하느라 제대로 보지못했던 외성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릴리나가 마를르성의 규모가 남작가의 중심지치고는 작다고해서 작은 성에 사람들이 모여사는것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 지역의 중심도시라는건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사람도 많이 살고있는 모양이네. 근데 저기 보이는 사람들의 행색을 보니 그다지 형편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칼스가 대로변에 늘어선 건물들 사이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있자, 한센이 아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확인하고는 혀를차며 말했다.
"쯧... 저녀석들은 마를르성에서 배급해주는 식량을 받아먹으며 놀고먹는 비렁뱅이들이다. 대부분은 주변마을에서 아무런 대책도없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제대로된 일조차 하지못하게된 놈들이지."
"음. 그래도 조금만 잘 가르치면 여러모로 쓸만하지 않을까요? 우리마을만 하더라도 항상 일손이 부족한데."
"아무리 일손이 부족해도 저런녀석들을 마을에 들일수는 없다. 저들중에는 다른 마을에서 죄를 짓고 도망치거나 쫒겨난이도 있을것이고, 결정적으로 이곳에도 일할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은데 저러고 있다는건 천성이 게으르다고 봐야겠지. 봐라 저기 상인들 밑에서 짐을 나르는 어린아이들을. 네 또래밖에 안되어보이는 애들도 저렇게 땀흘려 벌어먹으려 애쓰는데 사지멀쩡한 놈들이 저러고있으니..."
한센은 자기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어른들에 지시에따라 바삐 짐을 들어 나르는 모습과 건물과 건물사이의 그늘속에 너저분하게 드러누워있는 거지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남작님은 저런사람들을 그냥 방치해두는거예요? 아빠 말대로라면 이 도시에 그다지 도움이 될거같지도 않은데."
"아까 말했듯이 다 쫒아내더라도 금새 다시 저런식으로 생겨나니 반쯤 포기를한것이지. 게다가 가끔 급하게 많은 인력이 필요한경우에는 먹고 재워주는것을 조건으로 강제동원하여 일을 시키기도 하니 저렇게 방치해두는거다. 대신 저런놈들이 범죄를 저지르게되면 그 형벌은 일반사람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부여된단다."
한센은 아들에게 도시 빈민들에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칼스는 어느곳이든 사람이 모여살기 시작하면 이런식의 양극화가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씁슬한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점점 줄이 줄어들어 내성입구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칼스는 난생 처음으로 기사로 보이는 이를 볼수있었다.
그는 몸의 대부분을 가리는 형태의 갑옷을 입고있었는데 철판으로 만들어져있음에도 각 관절부위는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허리춤에 1미터가량 되어보이는 칼을 차고있는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칼스 일행을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세금을 바치러온 모양이군. 어느마을에서 온 일행인가?"
"에올론 마을에서 온 촌장 한센이라고 합니다."
"에올론? 함께온 인원과 가지고온 물품의 리스트는 작성해왔겠지?"
"네 물론입니다."
한센은 품속에 잘 갈무리해두었던 양피지를 꺼내 기사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그것을 펼쳐보더니 한센의 옆에 공손한 자세로 서있는 칼스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콥이 말한 꼬마가 바로 이녀석인가 보군."
"제이콥님을 아십니까?"
"아아. 알다마다. 나는 마를르 남작님의 검중 하나인 윈슈텔 루엠이다. 루엠 상단의 주인이 바로 내 삼촌되시는분이지. 그나저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칼스라고 합니다."
"그래. 몇달전에 네덕분에 맛있는 꿀을 맛볼수 있었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많은 꿀을 가지고온듯 하구나. 어린나이에 여신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니 장하다. 앞으로도 마를르를 위해 힘써다오."
"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기사님."
윈슈텔 루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기사는 뒤에 밀려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깨닫고는 한센에게 작은 목패를 건네며 이야기했다.
"세금을 납부하는 장소는 알고있겠지? 그곳에 가면 영주님을 언제 뵐수있을지 알려줄거다. 내성에서 괜히 소란을 피우다가 쫒겨나지 않도록 주의해라. 특히 각 구역을 지키고있는 병사들이 가지말라고 하는곳에는 발을 들이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내성안으로 들어설수 있었는데, 확실히 내성은 외부와는 달리 모든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특히 내성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옷차림은 밖에서 본 이들의 옷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는데, 일단 색상이 화사했고 옷감역시 일반적인 양모로 만든 거친옷이 아닌 하늘하늘한 면직물이나 드물게는 비단과 비슷한 원단으로 만든옷도 보이곤 했다.
건물들 역시 크고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했는데, 딱 봐도 큰 길가에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존재했고, 저 멀리 안쪽에는 웅장하면서도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해 만든 남작가의 본성이 있었다.
"와! 밖에서는 성벽때문에 몰랐는데 정말 멋져요. 저기는 어떤 신을 모시는 신전인가요?"
"저곳은 전쟁의 신이자 투쟁의신 투르를 모시는 신전이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신전이 바로 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아르케여신님을 모시는곳이지. 신전들은 조금 있다 방문하기로하고 일단 관청부터 들리도록 하자."
그렇게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칼스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내성에서도 중앙부에 위치하고있는 관청건물로 향하는 한센이었다.
관청건물앞은 이미 주변마을에서 가져온 각종 물건들이 담긴 수레로 북새통을 이루고있었는데, 관청안으로는 함부로 들어갈수 없었는지 입구를 지키고있는 병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는 다시 적당히 주변에 자리하고있다가 병사들이 호명하면 안에들어가서 본격적인 절차를 밟는듯 했다.
한센은 적당한 위치에 칼스와 마을사람들을 대기시킨후 입구의 병사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는듯 하더니 잠시후에 다시 되돌아왔다.
"흠. 아침일찍 서두른다고 했는데 벌써 3개마을이 먼저 접수를 한 모양이다. 조금 기다려야 할것같아."
"원래 이렇게 한번에 여러 마을에서 몰려오나봐요?"
"보통은 그렇게되지. 영주님이 정해준 시일안에 납부를 하러 와야하는데. 어지간한 마을들은 괜히 늦장부리다가 눈총을 받느니 최대한 일찍 처리를 하려고 하거든. 물론 어느정도 규모가 큰 마을같은경우에는 납품해야할 물품의 수와 양도 많아서 따로 날을 빼 지정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구나."
"그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마을과 비슷한 규모의 마을에 살고있다는거네요?"
"그런셈이지."
그러면서 한센은 칼스에게 마를르 남작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를르 성이 처음 지어질때부터 존재하던 마을들의 이름과 그 마을의 주인들이 어떤 지위를 갖게되었는지부터 시작해 마를르 남작가의 주요 가신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원래 이정도의 설명까지는 필요하지 않았으나 칼스는 마를르남작을 직접 대면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당히 알고있으면 큰 실수를 하지 않을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에올론! 에올론 마을의 촌장은 지금 안으로 들어오시오! 아참! 칼스라는 아이도 함께 데려오라고 하니 함께 오시오!"
"예에! 알겠습니다! 칼스 너도 들었지? 안에 들어가면 예의바르게 행동해야한다. 그리고 자네들은 혹시나 우리 마을의 짐을 건들려는 자가 있으면 제지시키도록 하게. 특히 칼스가 가져온 물품은 더욱더 신경써야 한다는거 알지?"
"네. 촌장님 걱정마세요."
칼스는 아버지 한센의 뒤를따라 관청으로 향했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둘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더니 건물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관청건물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일반적인 영지민이나 주변 마을에서 들어오는 이들은 1층에서 용무를 보았고, 2층은 다른 영지에서 온 손님이나 부유층 상인 혹은 귀족들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마지막으로 최상층은 마를르 남작가의 가신단이 회의를 하거나 영주가 가끔 관청에나와 업무를 볼때 사용하는 집무실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미 수차례 이곳을 방문했던 한센은 헤메지 않고 세금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찾아들어갔다.
"잠깐. 당신들이 에올론 마을에서 온 이들인가? 맞다면 내 뒤를 따라오도록."
그리고 그곳의 작은 방문에 노크를 하려던때에 마침 다가온 병사가 한센을 제지하더니 더 안쪽의 커다란 문앞으로 둘을 데려갔다.
병사가 안쪽에 기별을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병사는 두사람을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넓은방에 커다란 책상하나가 놓여있었고, 그 자리에는 외눈안경을 쓴 장년인이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들고 세심하게 그 내용을 살피고 있었다.
"에올론 마을에서 왔다고? 가구수는 32가구라고 적혀있는데 변동사항은 없나?"
"작년에 2개 가구가 더 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독립한 인원들이 있었지요."
"그렇군. 그럼 그 옆에있는 녀석이 예의 그 꼬마일테지."
그는 종이를 책상위에 내려두고 쓰고있던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어 고급스러운 상자안에 넣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에올론 마을의 칼스라고합니다."
"아르케 여신님께서 가르침을 내리셨다고? 음... 딱히 신성력은 느껴지지 않는데. 뭐 좋아 제이콥이 말하길 엘프가 직접 확인한 것이라했으니 큰 문제가 될건 없겠군. 반갑구나 나는 마를르 남작령의 재무관이자 루엠 상단의 상단주인 크리스티안 루엠이다."
칼스는 눈앞의 남자가 방금전 한센이 설명해준 마를르 남작가의 가신중 영지내의 경제정책 전반을 담당하고있는 재무관 크리스티안 루엠이라는 말에 다시한번 놀라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센 역시 직접 그를 만난것은 처음이었는지 안그래도 숙이고있던 고개를 더욱더 깊이 조아렸는데 크리스티안은 그런 두사람의 모습에 흡족해졌는지 미소띈 표정으로 두사람을 자리에 앉게했다.
"그정도면 인사는 충분히 받았으니 자리에 앉도록. 그럼 먼저 세금문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네 재무관님! 일단 저희마을에 할당된 세금은 소 5마리와 양 20마리 그리고 훈제한 고기와 치즈가 있으며 그외에 아르덴 삼림에서 얻은 약초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올해 새로이 추가된 꿀과 밀랍을 가져왔으며 꿀과 밀랍의경우 생산량이 많았기에 적혀있는 양보다 많이 가져왔습니다."
한센은 긴장감이 가득한 어조로 이번에 가져오게된 물품들의 리스트를 이야기했고, 마지막에 꿀에대한 항목에 이르자 크리스티안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호오? 그때 제이콥이 말하길 내년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양을 확보할수 있다기에 그때 가져온 분량보다 조금 더 많은양을 책정해 적어보낸것인데, 그것보다 더 많이 가져왔다고? 얼마나 가져왔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무관님. 일단 꿀은 50단지를 채워서 가지고왔습니다. 밀랍또한 5통정도를 가지고왔는데 밀랍은 각 신전에 봉헌해야할 양을 제외하면 3통정도를 내어드릴수 있을것 같습니다."
칼스의 말에 크리스티안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50단지? 저번에 제이콥이 가져왔던것과 같은 크기의 단지를 말하는거냐?"
"네."
"대단하구나. 내년부터는 꿀에 대한 세금은 20단지정도 가져오는걸로 고정하도록 하지. 올해의 추가분에 대해서는 상단에서 매입하는것으로 치고 그 대금을 내어주마."
"감사합니다. 그외에도 이번에 영주님을 뵙게되면 드리기위해 담궈둔 벌꿀주와 로열젤리를 조금 가져왔습니다."
"벌꿀주는 알겠는데 로열젤리라니 그건 뭐지?"
크리스티안은 생소한이름의 물품에 궁금하다는긋 물었고, 칼스는 이에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로열젤리는 벌중에서도 여왕벌만이 먹는 아주 귀중한 약재입니다."
"음. 안전하지 않은 물품은 영주님께 드릴수 없으니 그건 따로 확인을 해봐야할것 같군. 그리고 영주님을 뵙는것은 내일 오후로 일정을 잡아둘테니 내일 다시 관청을 찾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크리스티안은 이제 나가봐도 좋다며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한센과 칼스는 조용히 그 집무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