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재무관 크리스티안 루엠과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집무실 밖으로 나온 칼스와 한센은 마을에서 가져온 물품을 병사들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한참 물건들을 창고로 옮기고 있을때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병사 한명이 다가와 칼스에게 은화가 가득담긴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오호. 여유분으로 가져온 꿀에대한 대금인가? 얼마나 들어있어?"
"어디보자... 마을에서 판매했을때보다 좀더 쳐준거같은데요? 자 여기 이건 여기까지 같이오신 분들 오늘하루 맘껏 먹고 쉴수있게 나눠주세요."
"캬!! 촌장님! 이거 막내아드님덕분에 저희가 호강을 다 하게생겼습니다."
"칼스. 나중에 마을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해!"
칼스는 그 중 일부를 나누어 이곳까지 따라온 마을 사람들이 좀더 즐거운 하루를 보낼수있게끔 했고, 이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칼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세금으로 내야할 물품을 모두 창고에 넣은 한센과 마을사람들은 외성에 있는 숙소로 복귀했는데, 칼스는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있었기에 평소 마을에서 친하게 지냈던 콥스와 함께 내성안에 남게되었다.
"칼스. 여기 이 수레는 왜 병사들이 안가져간거야??"
"그건 세금으로 내려고 챙겨온게 아니라서 그래. 이건 신전에 봉헌할거거든."
"아하! 그럼 아르케 여신님의 신전으로 가면 되나?"
"거기는 마지막에 들를거야. 일단 다른신전부터 들리도록 하자."
"알았어. 나는 그냥 네가 가자는대로 수레나 끌고다니면 되는거니까."
콥스는 이미 이전에도 몇차례 마를르성에 온적이 있었는지 내성안에 있는 신전들의 위치를 어느정도 기억하고있었다.
칼스는 여러 신전중에서도 상인과 번영을 관장하는 신인 골란과 생명과 자애를 관장하는 여신 리페의 신전에 들러 챙겨온 밀랍과 꿀을 봉헌하고 간단한 기도를 올렸다.
두 신전 모두 칼스가 가져온 밀랍에 매우 기뻐하면서 축복을 내려주었는데, 그과정에서 칼스는 신성력의 발현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수있었다.
'와! 저게 신성력이라는거군. 돈을 관장하는 신의 신성력이라는게 여러모로 대단하다 느껴지긴 하지만 상인들이야 말로 원래 미신을 잘믿기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확실히 생명과 자애를 품은 여신님의 신성력이 좀더 포근한 느낌이네. 축복을 내려준 사제의 말대로라면 올한해 잔병치레는 걱정안해도 된다니 지구에서 이런 힘이 있었으면 떼돈을 벌었을텐데. 뭐 앞으로 꾸준히 밀랍을 봉헌하는대신 적어도 1년에 한차례정도는 사제를 파견해 마을사람들을 살펴준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목표했던 성과는 달성한 셈이네.'
어찌보면 불경하다 느낄수도 있는 생각을 하며 자신이 여러모로 이용해[?]먹은 숲과 꽃의 여신인 아르케의 신전앞에 다다른 칼스였다.
콥슨역시 칼스가 아르케여신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흥미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여기는 여러모로 네게 중요한곳이 되겠네. 나도 오늘부터 아르케 여신님에게 매일 기도를 드려볼까? 혹시알아? 나도 좋은 지혜를 얻을수 있을지 말야."
"에이. 형은 아르케여신님보다 저기 투르님의 신전에 가서 빌어야지. 그분한테 세례를 받으면 일당백의 전사가 된다고 하잖아."
"야. 거기는 이미 사람으로 넘쳐 흐른다고, 아까 봤지? 입구에 줄서있는거. 그나저나 여기는 한산하네."
이제는 제법 가벼워진 짐수레를 끌고 아르케 신전에 도착한 두사람은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전에 들렸던 골란과 리페의 신전의경우 신전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갔던것을 생각해볼때 아르케 여신의경우 마를르성내에서 그다지 영향력이 있지는 않은듯 했다.
숲과 꽃의 여신이라는 이명답게 신전 곳곳에 아기자기한 화단이 조성되어있었고, 여신을 따르는 신도로 보이는 여인들이 꽃과 나무에 물을 주며 간간히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수있었다.
"싱그러운 숲의 기운이 함께하기를. 이곳은 아르케 여신님을 모시는 신전이란다. 무슨일로 여기까지 찾아온거니?"
아르케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 하이디아는 신전을 찾아온 어린아이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두사람이 신전 입구로 다가올때부터 살펴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짐수레를 끌고오는 청년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온거라 생각했다.
평소에도 마를르영지내의 작은 마을에서사는 주민들중에 숲에서 일을하는 이들이 간간히 수확물 중 일부를 가져오곤 했기에 이 두 아이도 그럴거라 생각한것이다.
"아. 저희 마을에 아르케 여신님을 믿는 분들이 많아서 적게나마 공물을 드리려고 찾았습니다."
"그러니? 아주 귀한 손님이구나. 나는 이곳의 외부인 접객을 담당하고있는 하이디아라고 한단다. 그래 무엇을 여신님께 바치려고 왔지?"
"제가 직접 수확한 밀랍과 꿀을 여신님께 바치려고 해요."
"정말이냐? 어찌 그 귀한것을... 어디한번 보자꾸나."
그녀는 버섯이나 각종 약초들이 들어있을것이라 생각했던 짐수레에 잘 굳혀진 밀랍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랄수밖에없었다.
게다가 꿀 역시 제법 커다란 단지로 다섯통이나 들어있었기에 문득 얼마전 영주성에서 들려왔던 한가지 소식을 떠올린 그녀는 황급히 칼스에게 물었다.
"혹시 네가 아르케 여신님으로부터 꿀벌을 기르는법을 배웠다던 그 소년이더냐?"
"네. 에올론 마을에 살고있는 칼스라고 해요."
"세상에!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여신이시여..."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푸근한 인상의 여사제의 질문에 순간 당황한 칼스였으나.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볼때 이곳까지 소문이 난것같아 또다시 거짓으로 답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칼스를 앞에두고 환희에찬 표정을 지으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 왠지 자신이 몹쓸짓을 저지른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 그였다.
'윽! 나이도 제법 있으신분이 이렇게 기뻐하는걸 보니 거짓말이란게 들통나면 정말 큰일나겠는데... 그래도 다른 신전들에 봉헌한것보다 훨씬 더 많은양을 가져왔으니 여신님께서도 정상참작정도는 해주시겠지.'
"칼스라고 했지? 고맙구나. 네가 가져온 밀랍과 꿀은 여신님께 드릴 기도제를 올릴때 사용하도록 하마. 이쪽으로 들어오거라 여기까지 왔는데 여신님께 기도는 올려야 하지 않겠니."
"아 저는 일행이..."
"칼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천천히 다녀와."
그렇게 말한 그녀는 칼스를 데리고 신전안으로 향하려 했고, 칼스는 일행인 콥스를 핑계삼아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가 한발앞서 그런 의도를 무산시켜버렸다.
결국 신전안으로 들어선 칼스는 하이디아의 손에 이끌려 외부인에게 공개된 영역을 넘어 아르케 여신의 사제들이 기도를 올리는 기도실까지 들어가게 됐다.
"와아... 정말 멋지네요."
"후후. 여신님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소이니만큼 이 신전내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쓴 장소란다. 자 이쪽에 자리잡고 여신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꾸나."
사제들을 위한 기도실은 중앙천장이 없어 햇빛이 그대로 안을 비춰주었고, 건물 안쪽임에도 여신의 가호덕인지 많은 꽃과 나무들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듯 보이는 아름다운 석상이 존재했는데, 그 앞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를 단정히 한데묶어 늘어트린채 기도문을 읊고있던 그녀는 칼스와 하이디아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도를 마무리하고 일어났다.
"하이디아님 그 소년은 누구인가요?"
"휠리나. 이 아이가 바로 여신님의 은총을 받았다던 그 소문의 그 아이라네."
"아! 몇달전에 영주성에서 퍼지기 시작한 그 소문요? 안그래도 올해가 가기전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칼스. 이쪽은 현재 마를르의 신전을 담당하고있는 주교 휠리나라고 한단다."
"안녕하세요."
칼스는 점점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긴장하며 휠리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해하는 작은 소년이 몹시 긴장했다고 여겼기에 정신을 맑게해주는 축복을 걸어주었다.
-파아앗!
"후후. 너무 긴장하고 있는것 같구나. 이곳은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란다."
휠리나가 그에게 손을 뻗자 환한 빛이 뿜어져나왔고, 그순간 온갖 상념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칼스였다.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휠리나를 바라보는 칼스를 하이디아가 신상앞의 단상으로 이끌며 말했다.
"자 그럼 이쪽에 자리잡고 기도를 올려보자."
칼스는 다행히 그녀들 역시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채지는 못한것 같다는 생각에 안심하며 경건한 자세로 아르케 여신의 신상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신님. 만약 여신님이 정말 실존하고 계신거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지식을 활용하기위해서는 어쩔수없었어요. 대신에 앞으로도 여신님을 모시는 신전에 많은 도움을 드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그렇게 눈을감고 기도를 드리던 중 칼스는 자신의 양옆에서 함께 기도를 드리던 하이디아와 휠리나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걸 알게됐다.
뭔가 알수없는 두려움에 눈을 뜨기를 주저하던 찰나 누군가 그의 이마를 톡 하고 건드렸고, 잔뜩긴장하고 있던 그는 화들짝 놀라 몸을일으키려다 자세가 흐트러지는 바람에 볼성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 데구르르
- 콰당!
"으아아악!"
"아하하핫. 뭘 그리 잔뜩 겁을 먹고있는거니?"
칼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바닥에 널부러진채 눈을 뜨자 분명 방금전까지 자신이 기도를 올리던 신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꽃밭 한가운데에 파묻혀있다는걸 알아챌수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살피니 자신의 앞에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에메랄드를 잘게부수어 흩뿌려둔듯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길게 자라있었고, 작은 새와 나비들이 마치 그녀를 호위라도 하듯 주변을 멤돌고있었다. 또한 몸에선 기도를 올리던 휠리나 주교와 비슷한 광채가 은은하게 퍼져나오고 있어 더더욱 신비감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에엥? 누... 누구세요? 여기는 또 어디죠?"
"정말 몰라서 묻는건 아니겠지? 방금 네가 누구에게 기도를 올렸는지 생각해보렴."
"설마... 아르케?"
다시한번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니 방금전 기도를 올리던 장소에 세워져있던 신상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는것을 알수있었다.
"얘좀보게? 이제 막 반말까지 던지네?"
"아르케 여신님?"
"그래. 내가 바로 아르케다. 네녀석이 맘대로 이름을 팔고다녔던 보잘것 없는 여신이지."
그렇게 말하며 가늘고 흰 손을 뻗어 가볍게 휘젓자 그녀의 뒤켠에 나무로 된 의자가 솟아났는데, 놀랍게도 나무를 깍아서 만든것이 아닌 나무가 의자의 형태를 유지한채 자라나있는 모양새였다.
그제서야 칼스는 정말로 자신이 숲과 꽃의 여신인 아르케와 대면하고 있다는걸 깨닫고 잽싸게 바닥에 이마를 쳐박으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