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14/65)



〈 14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칼스는 내성안의 상점에서 내일 마를르 남작을 만나러   입을 옷부터 한 벌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름 에올론마을 사람들 중에선 깔끔하게 입고 다닌다고 했으나 결국 값싼 재질로 만들어진 작업복에 가까웠기에  지역의 영주를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도시에서 옷 한 벌을 새로 맞추기로 한 것이다.


'하. 아무리 그래도 옷 한 벌에 은화 5개라니. 이거 한 벌이면 마을 사람이  달은 먹을 곡식을 살수 있겠네. 게다가 이거 이곳에서 파는  중에서 그나마 싼 걸로 고른 건데 이 정도니 귀족들의 씀씀이는 대충 어떨지 짐작이 가는군.'


두 사람이 처음 귀족들이 입을만한 옷을 파는 상점에 들어섰을 때 상인은 그들이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찾아온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칼스가 자신의 치수에 맞는 옷을 사고 싶다고 말하자 그 상인은 옷들의 가격을 짚어주며 지불 능력이 있는지를 물었고, 칼스는 그중에서 그나마 가격이 싸면서도 마음에 드는 색상의 옷을 고른 게 지금 구입한 옷이었다.


그래도 비싼 값을 받는 만큼 눈대중으로 치수를 재는 것이 아닌 줄자를 이용해 정확한 길이를 측정해갔고, 다음날 오전에 묵고 있는 숙소로 수선을 마친 옷을 보내준다고 했다.


"내일 영주님을 만나러 가는 자리라면서? 그럼 그 정도는 입어줘야지. 괜히 지저분하게 입고 갔다가 밉보일라."
"하아. 생각보다 옷이 너무 비싸서 문제지 뭐."
"하긴. 은화 5개라니. 내가 마을 외곽경비일을 도와주면서 받는 게 동전 50개인데. 10달간 한 푼도  쓰고 모아야 살  있는 옷이라는 거 아냐?"


콥스는 칼스가 옷 값으로 낸 은화들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잠시 생겨났던 구매 욕구를 털어내버렸다.


"아. 내성에 온 김에 누나가 부탁했던 옷이나 좀 사야겠다."
"누나? 에일린 옷까지 사게? 이런 곳에서 여자 옷은 가격이 훨씬 더 비쌀 텐데."
"여기서는 못 사지. 아까 오면서 가게 하나를 봐뒀는데 우리 같이 외부 마을에서 온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이더라. 거기로 한번 가보자."
"그런 데가 있었나?"

그렇게 두 번째로 찾아간 가게는 칼스가 이야기했던 대로 귀족이나 도시의 부호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는 곳이 아닌 듯 질기고 튼튼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시에서 유행하는 여러 가지 디자인을 흉내 내어 만들었기에 제법 맵시 있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서인지 딱 봐도 외부 마을에서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흐음. 누나가 나보다 몸집이 작은 편이니  정도면 되려나? 흠... 이건 좀 커보이긴한데... 뭐  건 내년에라도 입을 수 있을 테니 이것도 하나 사야지."


칼스는 그곳에서 에일린에게 사줄 옷을 두벌 골랐는데, 지금 당장 입으면 딱 맞을만한 것과 그보다 조금 치수가  것으로 한 벌을 샀다.

"이거 두벌 사려는데 얼마죠?"
"오호~ 여자친구한테 선물할 건가 보지? 어디 보자~ 작은 건 동전 20개면 될 거 같은데. 이쪽 녀석은 안감에 좋은 면직물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가격이  나간단다. 두 개 합쳐서 동전 60개만 내거라."
"오! 생각보다 가격이 싸네. 여기요!"


그렇게 두벌을 골랐음에도 동전 수십 개면  값을 치를  있었기에 칼스는 이곳에서 다른 가족들의 옷까지 사야겠다 마음먹고 가게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가게에서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여성복을 들고 고민에 빠져있는 콥스를 발견한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콥스형네 어머니는  옷을 입기엔 너무 풍채가 좋으시던데. 누구한테 주려고 그걸 들고 고민하는 거야?"
"아! 음... 멜린한테 선물해 주면 어울릴  같아서. 근데 생각보다 가격이 좀 나가네"
"오~~ 멜린 누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아니.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닌데. 이걸 선물해 주면서 점수를 좀 따면 좋은 사이로 발전할  있지 않을까?"


멜린은 에올론마을에서 나이가 찬 소녀들 중에 제법 인기가 있었는데, 콥스 역시 그런 그녀를 노리는 사람 중 하나인듯했다.


"으헤헤 청춘이네 청춘! 좋아. 오늘 나 때문에 시간도 많이 뺏기고 했을 텐데. 그 옷 살 때 내가 돈 좀 보태줄게.마음 같아서는 내가 다 내주고 싶지만 그러면 형이 선물로 산다는 느낌이 안 날 테니까."
"정말? 고맙다! 내가 잘되면 꼭 보답할게!"


그렇게 가족들의 옷과 콥스의 청춘사업을 도와줄 옷까지 모두 구입한 두 사람은 내성 지역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 * *

다음  아침. 전날 오후에 한센이 미리 말했던 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을 쥐여주며 하루 동안 자유시간을 주어서인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늦잠에 빠져들어있었다. 그런 반면에 한센과 칼스는 오늘 있을 영주와의 접견 준비로 바쁜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칼스! 어제 주문했다는 옷은 언제 도착하는 거냐? 한번 입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오전 내로 온다고 했으니 늦지는 않을 거예요. 뜨내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는 아니었거든요."
"그럼 의상은 됐고, 가져갈 선물은 다 선별해놨니?"
"네. 콥스 형이랑 어제 다 확인해서 넣어놨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준비를 해나가는 사이 주문했던 의상을 들고 어제 보았던 재단사의 제자가 찾아와 세부적인 치수 조정을 마쳤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이제 다 큰 것 같구나. 이 아비를 닮아서 여려 여자 울리겠는걸?"
"아빠는 엄마 하나면 충분하다면서요."
"하하하. 남자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란다."

새로 산 옷까지 갖춰 입자 촌스러웠던 시골마을 소년에서 제법 그럴싸한 도시의 자제로 변모하게  칼스였고, 그런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은 한센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슬슬 네 혼처도 알아보긴 해야겠구나."
"엑! 저 아직 11살밖에 안됐어요!"
"원래 그때쯤부터 물색을 해야 좋은 짝을 얻는 법이야. 마을 내에서  딸들을 너와 짝지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만 어림도 없지."
"윽... 나보다 케인 형부터 결혼시켜야 하는 거 아녜요?"
"아직도 케인이 말해주지 않았느냐? 이미 그 녀석은 결혼하기로 한 아이가 있다. 오는 길에 봤던 보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지. 아마 내년쯤에는 식을 올리지 않을까 싶은데."

케인의 나이가 이제 15세인 걸 감안할  내년이 된다 해도 겨우 16살에 불과했다. 지구에서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인데 결혼을 한다는 말에 새삼 이곳이 자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임을 체감하는 칼스였다.


그렇게 두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던 때에 숙소로  봐도 영주성에서 찾아온듯한 복장의 장년인이 찾아왔다.


"흐음. 자네들이 에올론마을의 한센과 칼스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에올론마을의 촌장 한센이고 이 녀석이 제 아들 칼스이지요. 어느 곳에서 오신 귀인이십니까."
"본인은 마를르남작님을 모시고 있는 집사 보렐손이라고 하네. 재무관이신 크리스티안님에게 듣기로 영주님께 바쳐야 할 물건이 있다고 들었네만."
"아. 집사님이셨군요. 영주님께 진상할 물품들은 아들 녀석이 알고 있습니다. 칼스 가서 물품들을 보여드리거라."


집사 보렐손은 아무래도 영주에게 직접 건네지는 물건이니만큼 미리 그 안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듯 보였다.

칼스는 그와 함께 온 병사들을 이끌고 숙소 한편에 잘 모아둔 것들을 보여주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로열젤리에 대해서는 특히 취급에 주의를 부탁했다.

"이건 정말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니만큼 조심히 다뤄주세요."
"음. 알겠으니 걱정 말거라. 가져가서 혹시나 독성이 있거나 위험하지 않은지 확인해본 후 문제가 없으면 네가 접견실에 갈 때 함께 들여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전 언제까지 관청으로 가면 되나요?"
"관청으로 올 필요는 없고, 오후에 이곳으로 마차를 보낼 테니 그때 바로 영주성으로 오면 된다. 복장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그 부분은 큰 문제 없겠구나."

그렇게 집사는 병사들에게 꿀과 벌꿀주 그리고 로열젤리가 든 단지를 가져가라고 지시했고, 뒤따라온 한센과 칼스에게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버렸다.


그날 점심께가 다 되어서야 하나둘 내려오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마을에 갈 때  가야 할 물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무렵 영주성에서 보낸 마차가 도착했다.


일반적인 짐말이 아닌 덩치부터가 남다른 전마를 둘이나 달고 있는 마차에는 마를르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있어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칼스야 그럼 조심히 다녀오거라. 영주님 앞에서는 특히 예의를 갖추도록 하고."
"걱정 마세요. 제가 어디에서 막 나가는 거 보셨어요? 게다가 영주님도 바쁘실 텐데 오래 볼 거 같지도 않은걸요. 그냥 선물 드리고 오면 되겠죠 뭐."
"그래. 그럼 걱정하지 않고 있으마."

칼스를 태운 마차는 느긋한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내성의 성문을 지나 마를르시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영주성의 앞으로 향했다.


마차에는 집사 보렐손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이동 중 칼스에게 마를르남작의 앞에서 취해야 할 기본적인 예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남작님을 뵈러 들어갈 때는 말씀이 있기 전까지는 그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 안 된다. 살짝 시선을 바닥에 두고 조심히-..."

보렐손의 예절 강의를 들으며 이동하다 보니 금세 영주성 앞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부터는 마차에서 내려 도보로 들어가야 했는데 마를르남작과 칼스가 만나게 될 장소는 그의 집무실이 아닌 제법 넓은 회의실이었다.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있는 남작 외에도 몇몇의 인사가 안에 더 배석해 있었는데, 그중에는 어제 칼스와 만남을 가졌던 재무관 크리스티안 루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  보니까 재무관 반대편에 있는 남자는 기사인거 같고, 엘프도 한  있잖아? 마을에 들렀던 릴리나랑 아는 사이인가? 그 외에 루엠 상단의 제이콥씨도 보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마를르 영지의 중핵이라 보면 되겠군.'

칼스는 곁눈질로 전체적인 내부의 모습을 살핀 후 마차 내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앉아있는 마를르 남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를르령 에올론 마을의 칼스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마를르가는 본래 동부 왕국의 발원지이자 수도인 리온에서 활동하던 기사가문이었다. 그들은 근 백여 년간을 리온 왕가를 위해 충성을 바쳤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가문의 일원이 숱한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해왔었다.

그러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초대 마를르 남작이 되는 뒤에르베 마를르가 그간의 공적을 대가로 당시에는 몇몇 화전민 마을들만이 존재하던 동부의 땅을 달라고 요청했고, 리온 왕가에서도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법 넓지만 딱히 쓸데는 없어 보이는 영지를 하사받아 지금의 모습까지 키워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칼스 앞에 앉아있는 이가 바로 제3대 마를르 남작이자  영주 보두앵 마를르였다.

"흐음... 들었던 대로 아직은 어린아이로군. 반갑구나 내가 이 땅의 주인인 마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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