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흐음... 들었던 대로 아직은 어린아이로군. 반갑다 내가 이 땅의 주인인 마를르다."
보두앵은 몇 달 전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가신이자 영지의 재무를 총괄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루엠으로부터 특이한 보고를 받았다.
그것은 영지 외곽에 위치한 마을에서 여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소년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는데, 그 가르침이라는 것도 별다른 게 아닌 벌을 길러 꿀을 얻어내는 것이라 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는 차라리 전쟁의 신이나 마법의 신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영입했을 것이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었다.
'그래도 우리 영지 내에서 신의 영향을 받은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불러보라고 하긴 했었는데. 크리스 녀석의 말대로라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꼬맹이라고?'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오늘에 이르러 소문만 무성했던 그 소년이 자신의 앞에 당도했다.
어제 크리스티안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쓸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관심 어린 눈으로 소년을 살피는 그였다.
"네가 아르케 여신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아 벌통을 만들고 꿀을 채취할 수 있게 됐다고 들었다. 거기에 재무관이 책정한 양보다도 더 많은 꿀과 밀랍을 가져왔다더구나."
"저는 그저 여신님께 배운 재주로 얻은 것의 일부를 마땅히 내야 할 세금으로 가져왔을 뿐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얻은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믿으며 감추기 급급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게다. 매번 빠져나가기만 하는 재정 탓에 얼굴 펼 일이 별로 없던 재무관이 그렇게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오랜만이었어."
"크흠. 영주님 그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어디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나 크리스."
낙후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영지를 소유한 귀족답게 화려한 복식을 한 보두앵은 가신단과 그렇게 벽을 세우고 지내지는 않았는지 제법 가벼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핀 칼스는 그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귀족은 아닐 거란 생각에 안도하였다.
"저 아이가 영주님을 위해 따로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크리스티안은 계속해서 자신을 놀려대려 하는 보두앵의 언행을 끊기 위해 칼스가 준비해온 선물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네 영주님. 제가 키운 벌에게 얻은 꿀 중에 가장 깨끗하고 진한 꿀과, 그 꿀을 이용해 담은 벌꿀주. 그리고 벌 중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여왕벌만이 먹는 로열젤리라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벌꿀로 담은 술이라. 듣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군! 그런데 로열젤리라니 그건 뭐지? 아무튼 좋아 일단 가져와 보도록."
보두앵의 말에 입구에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신호를 준 크리스티안이었고, 이에 밖에서 칼스가 가져온 진상품들을 들고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영주와 가신단의 앞에 가져온 물품들을 쌓아두었다.
꿀은 그 양이 제법 많았기에 바닥에 조심스럽게 놓아둔 반면, 벌꿀주는 그새 집사 보렐손이 술병에 옮겨 담았는지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잘 밀봉되어 테이블 위에 잔과 함께 세팅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열젤리가 담긴 작은 종지는 보렐손이 직접 영주에게 가져다주었다.
"흐음... 치즈랑 비슷해 보이는데. 윽! 냄새는 좀 역하군."
"이건! 생명의 꿀이군요?"
"음? 텔드라스님은 이것이 뭔지 알고 계시는가 보군요."
"아. 이건 숲속에 사는 이웃들 사이에서 '생명의 꿀'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꿀을 나누어주는 페어리들이 말하길 그들도 벌집 하나에서 아주 적은 양밖에 얻을 수 없어 매우 귀한 것이라 하더군요.."
영주가 로열젤리를 손으로 찍어 그 빛깔과 향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을 본 텔드라스라는 엘프가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칼스라고 했지?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 여신님으로부터 뭔가 들은 모양이로구나. 우리 엘프들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데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그는 보두앵의 아버지가 영주였던 시절부터 마를르남작령의 발전을 위해 일해준 엘프였기에 현 영주인 보두앵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평소 묵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하던 그마저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물품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칼스의 설명을 기다렸다.
"여신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본적으로 벌은 태어나서 수십일 정도를 살면 그 수명을 다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왕벌은 일반적인 벌과 다르게 길게는 3년 이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알을 낳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여왕벌이나 일반적인 벌이나 같은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흠. 같은 알에서 태어나는데 그 수명이 다르다고?"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이세계에서도 좀 더 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는 대단한 것이었고, 그랬기에 불과 수십일밖에 살지 못하는 벌을 수년간 살게 만들어 준다는 로열젤리의 효능은 마를르 남작과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들고 계신 로열젤리입니다. 알에서 태어난 애벌레가 일반적인 꿀을 먹고 자라면 일벌이 되지만. 로열젤리만을 먹고 자라면 여왕벌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로열젤리는 막대한 생명력을 품은 대자연의 명약이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흔히들 엘릭서라 부르는 일족의 묘약에도 꼭 필요한 재료가 바로 생명의 꿀이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군."
"이것을 사람이 먹게 되면 잔병치레를 덜게 되고 노화를 방지해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대단한 효과를 가진만큼 얻어지는 양이 매우 적은 편이지요. 지금 들고 계신 것이 제가 관리하는 벌통 10개에서 뽑아낸 전부입니다."
로열젤리가 엘프들이 만드는 기적의 묘약 [엘릭서]의 재료 중 하나라는 사실이 텔드라스의 입에서 나오자 손가락에 묻어난 로열젤리가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질까 급히 입에 넣고 쪽쪽 빨아먹는 보두앵이었다.
"우물우물... 시큼털털 하긴 한데 끝에는 꿀과 비슷한 단맛이 나는구나. 그나저나 이런 귀한 물건을 가져왔으니 나로서도 네게 이에 합당한 값을 내어주어야 면이 설 텐데. 뭔가 내게 원하는 것은 없느냐? 내 너무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주마."
"아니 영주님!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겨우 소주잔 한 잔 분량 정도 되는 로열젤리를 조심스럽게 집사인 보렐손에게 건네준 보두앵이 칼스에게 물었고, 이 부분은 크리스티안과 미리 이야기가 되어있지 않았는지 깜짝 놀라 제지하려 했다.
"크리스티안. 솔직히 나는 아르케 여신님으로부터 벌치는 법을 배운 소년이 나타났다는 말에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이걸 봐라 네 골치를 잔뜩 썩이던 재정 문제에 도움을 주다 못해 로열젤리? 솔직히 나는 이 물건의 효능이 알려지면 얼마의 가치를 갖게 될지 상상도 못하겠다. 리온 성에 사는 그 노괴물들이 단 하루를 더 살게 해준다고 하면 얼마를 낼 거 같냐."
"얼마를 내긴요. 군사를 보내겠죠."
"크하하! 그렇기도 하군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아무튼 아 꼬맹이가 가져온 것들이 보통의 것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나로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 면이 산다는 말이다. 자 다시 한번 묻겠다 나 보두앵 마를르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무조건 이루어주겠다는 답은 해줄 수 없지만 내 최선을 다한다는 약속은 하마."
칼스는 보두앵 마를르의 말에 잠시 접견실 내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재무관 크리스티안 루엠은 혹여나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지 매우 엄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요정 텔드라스는 이런 인간들 사이의 이권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이는 보두앵 마를르의 행동에 감명받았는지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는 에올론 마을에서 벌을 키우고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영주님께서 직접 공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거기서 만들어낸 상품들을 마를르 영지뿐 아니라 왕국 전역에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물론 그 부분에서 발생하는 이득의 일부는 루엠상단을 통해 영주님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에올론 마을에서 네가 만들어 판매하는 물건들에 대한 권리는 내가 보증해 주마. 또한 왕국에 네가 판매할 상품을 알리는 부분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거면 되겠느냐."
"네."
"허참. 나름 큰마음을 먹고 제안을 했거늘 겨우 이 정도 부탁이라니."
보두앵은 점점 더 눈앞에 있는 작은 시골 소년이 탐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운 좋게 여신의 눈에 띈 아이라고 생각했으나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자 영지 내에서도 궁벽한 시골마을에서 교육받은 소년치고 그 사고 수준이 대단히 뛰어나다 여겼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 정도 재능을 뽐냈는데 제대로 뒷배경이 만들어지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게 될지 궁금해진 그였다.
"네가 말한 것을 들어주도록 하마. 단 영지 내에서 물건을 판매할 때는 루엠상단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오늘 내게 가져온 물건들에 대한 값으로 금화 세 개를 내어주도록 하겠다. 이거면 네가 마을에서 뭔가를 할 때 충분한 밑자금이 될 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칼스는 보두앵 마를르와의 접견을 끝마쳤고, 숙소로 되돌아가는 마차에 탑승하고 있는 그의 품속에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금화 세 닢이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물론 그 금화를 내어주던 크리스티안 루엠의 한숨소리가 귓가에 아른아른하게 남은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 * *
칼스가 떠나간 후 보두앵의 집무실에는 크리스티안 루엠만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주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지요? 내 딸을 그 시골 녀석에게 시집보내라고요?"
"왜. 아까 텔드라스님의 말을 못 들었어? 녀석의 몸에서 아르케 여신님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셨잖나. 그럼 어설프게 사기를 치는 시골 꼬맹이는 아닐 테고, 게다가 네 부하의 말에 따르면 저 녀석이 본격적으로 벌을 기르기 시작한 게 1년도 안됐다면서?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큰 이득을 우리에게 쥐여줄지 모른다는 건데 그 정도면 충분히 이쪽 사람으로 끌어들여볼 만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 귀여운 로제를..."
크리스티안은 이제 막 12살이 된 막내딸을 칼스와 짝지어주려고 하는 보두앵의 말에 격한 반대를 표했다. 그 역시 칼스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보물과 같은 막내딸과 이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라! 네 녀석이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내 사위로 들이는 수밖에."
"사위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대체 누구의 짝으로 지어준단 말이십니까. 설마?"
"누구겠어? 애비 말은 들은 척도 않는 엘레노아 그 녀석이지."
요 근래 자신의 골치를 썩히고 있는 딸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보두앵이었고, 그런 영주의 모습에 한동안 마를르 성이 시끌시끌해지겠다며 걱정하는 크리스티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