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16/65)



〈 16화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

보두앵 마를르 남작과의 만남을 끝으로 칼스가 이곳 마를르성에서 치러야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 됐었을 테지만. 남작과의 만남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자금이 들어왔고, 이것을 그냥 품고만 있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이 돈으로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칼스였다.

'어차피 에올론 마을은 경제 공동체에 가까워서 이런 돈을 가지고 있어봐야 쓸 곳도 없는  현실이야.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펑펑 쓰기엔 아까운 돈인데...'


은화만 하더라도 에올론 마을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는 고액 화폐에 해당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물품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마을이었고, 마을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물품은 촌장인 한센이 루엠상단을 통해 구매하여 마을 사람에게 분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 간의 거래라고 해 봐야 촌장인 한센과 함께 일하며 얻는 동전들을 모아놨다가 마을에 있는 주점 주인에게 술을 사서 마신다거나 외지 상인이 방문했을 때 필요한 물품을 거래하는 게 경제활동의 전부였다.

이에 반해 금화는 현재 왕국에서 쓰이는 화폐 중에서도 가치가 큰 것으로. 일반적으로 갓 기사 책봉을 받은 기사가 1년에 봉급으로 받는 금액이 금화  닢 정도였다. 그리고 마를르 내성은 무리더라도 외성에 있는 작은 건물 하나를 구입할 때 드는 금액이 금화 1개 안팎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내성을 빠져나와 마을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착했고, 칼스는 그곳까지 자신을 데려다준 마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니? 영주님과 이야기는 잘 나눴고?"
"네. 생각보다 더 괜찮은 분인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영지의 주인이다 보니 좀 더 권위적일 거 같았는데 그렇진 않던데요."


한센은 칼스가 출발한 이후 계속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일어나 물었다.

"다행히 우리 영주님이나 이곳의 다른 귀족분들은 다들 성격이 좋으신 편이지. 그럼 너도 무사히 도착한 걸 확인했으니 마을에 돌아갈  챙겨갈 물품을 사러 시장에 방문해야겠구나."
"저도 같이 따라가도 돼요?
"피곤하지는 않고?"
"걸어서 다녀온 것도 아니고 마차를 타고 오갔는데요 뭐. 마침 저도 시장에서 뭘 파는지 보고 살게 있으면 사려고요."

한센은 방금 막 밖에서 돌아온 아들이 따라나선다는 말에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별다른 치친 기색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칼스는 한센과 함께 수많은 가게가 늘어서 있는 시장 거리에 도착했다.


"자자! 여기 어제 막 도착한 치즈입니다!"
"라힘스 백작령에서 가져온 밀이 있습니다! 올해도 남부의 밀은 최고의 품질이니 보고 가세요!"

시장에는 칼스 일행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 방문한 이들로 인해 북적대고 있었고, 상인들은 그런 외지인에게 하나의 물품이라도 더 팔기 위해 소리를 쳐 호객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한센은 마을에 가져가야 할 물품을 대량으로 매입해야 했기 때문에 시장에서도 가장 큰 건물인 루엠 상단으로 들어갔다.


루엠 상단에 들어선  한센은 가장 급한 곡물부터 매입해야 한다며 곡물을 담당하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칼스는 상단 내에 진열된 여러 물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 접근하더니 반가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오! 이게 누군가 했더니! 칼스 아니야!"
"하하하. 안녕하세요 제이콥님 오랜만에 봬요."
"칼스 너도 잘 지냈느냐? 어제 영주성에 갔다가 깜짝 놀랐지 뭐냐. 세상에 꿀을 그렇게나 많이 가져오다니. 여신님의 은총이 대단하긴 한가 봐."
"제가 그때 수확량은 더 늘어날 거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나저나 죄송해요 세금으로 내고 영주님께 선물을 드리느라 정작 여기에 팔 물량은 가져오질 못했네요."
"하하하! 어차피 영주성에서 나온 물품은  여기서 거래가 이뤄진단다. 상단주님 말에 따르면 꿀값을 어느 정도 지불했다고 하던데?"
"네. 그래서 뭔가 살게 있을까 싶어서 아빠를 쫓아서 와본 거예요."
"그래?  필요한 게 있니? 어차피 지금은 한가하니 직접 안내해 주마."


제이콥은 칼스에게 제법 살갑게 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상단 내에서 칼스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린 것이 바로 그였고, 그런 칼스가 자신의 상단이 속해있는 가문에 대단한 이득을 안겨주어 그의 주가도 덩달아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음. 일단 필요한 게 저번에 구입했던 반합통이랑. 꿀을 담아둘 단지들이 필요할  같네요."
"하긴 그 정도 양을 담으려면 꿀단지도 보통 많이 필요한 게 아니겠네."
"네. 사실 마을 내에 있는 단지란 단지는 제가 다 끌어다 쓰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넉넉하게 주문할 테니 싸게 해주세요."
"우리가 직접 만드는 건 아니지만 내 최대한 힘을 써주마. 그리고 또 다른 건?"

일단 당장 양봉을 하는데 필요한 물품들 위주로 주문을 한 칼스였고, 더 필요한 물건이 없냐는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직까지도 별 진척이 없는 비누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혹시 몸을 씻을때 때를 잘 벗겨내는 물건이 있나요?"
"음... 글쎄? 네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귀족들이 쓰는 향유를 말하는  아닐 거고."
"향유까지는 아니고, 비누라는 건데요."

칼스는 제이콥에게 비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하!  기름덩이를 말하는 거구나! 근데 그건 목욕할 때는 못쓸 텐데? 내가 알기로 빨래나 기름때 묻은 그릇을 닦아낼 때 쓴다고 들었다. 기름으로 기름을 닦는다는  신기하긴 한데 냄새가 독해서 몸에 쓴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
"음... 역시. 그럼 향료는 있나요?"
"향료야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지. 다만 이것들은 가격이 좀 나가는데 괜찮겠느냐?"
"네. 일단 보고 결정할게요."

제이콥은 칼스의 답을 듣고는 상단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일반 손님들이 구매하기 힘든 값비싼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내부를 둘러보는 손님들도 방금 전 한센과 들어갔던 장소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바깥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우리 상단의 대부분의 매출은 이쪽에서 올리고 있지. 사실 밖에서 파는 물품은 들이는 품에 비해 이득이 많이 나질 않아."
"아! 저기 꿀도 있네요? 혹시 어제 가져온 꿀인 건가요?"
"바로 맞췄구나. 저기서 판매되는 게 네가 가져온 꿀이란다. 다른 곳에서 떠온 꿀들은 뭔가 텁텁한 맛이 있는 반면 네가 떠온 꿀은 깔끔해서 높은 가격에 판매를 해도 잘 팔려나가고 있지."

보통 꿀에서 텁텁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꿀을 뜨는 과정에서 벌집안에 함께 들어있는 꽃가루가 섞여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칼스는 그런 지식을 딱히 알려줄 필요는 없다 느꼈기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어있는 꿀 진열대를 지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향료를 보관하는 창고쯤으로 보였는데, 잘 밀봉한다고 했으나 은은히 배어 나오는 향을 전부 차단할 수는 없었는지 마치 백화점 1층의 화장품 코너를 연상케하는 진한 향이 느껴졌다.

"이곳이 바로 향료를 보관하는 곳이지."
"잠시 살펴봐도 되죠?"
"그러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아니겠느냐. 대신 여기 있는 것은 대부분이 비싼 상품들이니 조심히 다뤄야 한다."

제이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스는 작은 병에 담겨있는 향료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향료 병 앞에는 가격과 주 재료가 적혀있었는데, 값이 비싼 것들은 하나같이 처음 듣는 생물에서 채취했다고 적혀져 있었다.

"설원 큰 부리의 향낭? 이블 페어리의 날개 가루? 이게 뭐지."
"음? 아하. 그것들은 다 괴수들에게서 나오는 부산품으로부터 얻는 향료다. 얻기가 힘든 만큼 가격이 제법 비싼 편이지."
"괴수요?"

괴수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칼스였고, 제이콥은 평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이던 그가 여느 어린아이들처럼 반응하자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하! 넌 에올론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니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곳은 원체 엘프들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곳이라 괴수들이 활개치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냥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짐승보다 훨씬 더 포악한 녀석들이라고 보면 될 거다. 그중에서는 나름 지성을 갖추고 무리생활을 하는 녀석들도 있지."
"아하 그렇군요."
"우리 영지를 비롯해 동부지역은 안전한 편이지만. 왕국 중서부 방면으로 만 나가도 징글징글하게 달려드는 귀찮은 녀석들이 많아. 그래서 그쪽으로 상행을 나갈 때는 호위를 든든하게 붙이고 가야 해서 지출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대신에 녀석들에게선 여러모로 값나가는 것들을 얻을  있어서 그것만 노리고 다니는 용병들도 존재하지."


그러면서 몇몇 괴수들의 이름과 특징들을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해 주는 제이콥이었고, 칼스는 어른들로부터 괴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다양한 괴수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전 어른들이 괴수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겁을 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보니까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같아 보이던데. 여러 가지 지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데는 책만큼 좋은  없지. 돌아가는 길에 몇 권 사들고 가는 걸 추천하마."

칼스는 그날 루엠상단에서 비누 향에 적합해 보이는 향료 몇 가지를 구매했고, 여러 기초지식을 담고 있는 서적까지 구입했다. 거기에 제이콥에게 따로 부탁하여 마을에서 사용할 여러 물품을 대량으로 주문했는데, 그것까지 다 포함해도 금화 1닢이면 충분한 값을 치를  있었다.

* * *

마를르성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칼스는 자신이 구입한 물품을 총 2개의 수레에 채웠고, 그 수레를 끌어줄 말도 세필이나 구매했다.

수말 하나에 암말 둘이었는데 이는 마을에 소나 양 같은 가축들은 많아도 말은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들여서 키워보기로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체격이 있고 품종이 증명된 말은 가격이 비싼 데다 특히 종마로서 활용이 가능한 수말의 경우 한 마리의 값이 금화 1개에 달했다. 하지만 이번에 큰돈을 얻게 된 칼스가 앞으로 상행에 있어 필요성이 있고, 또한 마을의 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 한센에게 건의해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돌아가면 마구간부터 재정비를 해야겠구나. 칼스 네 덕에 우리 마을에도 다시 말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어."
"정말 비싸게 주고 구입한 거니까 잘 돌봐야 해요. 이번에야 영주님이 주신 돈이 있어 구입이 가능했지만 앞으로 그런 큰돈이 들어올 일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까요."
"걱정 마라. 마을 사람들 중에 몇 명은 말을 전담해 관리시키면 되니까."


한센은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닌지 수레를 끌고 있는 말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칼스는 너무 생각 없이 말을 구입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이는 소와 양 같은 가축에 비해 말은 관리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녀석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기 때문이었다.


"말은 다른 가축들보다 많이 예민하다던데. 마을에 말을 키워본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있고말고! 네가 태어나기 몇 해전까지는 우리 마을에도 말이 있었단다. 다만 그때 몇 년간 흉년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을에 식량이 바닥나 그것을 사기 위해 말들을 모두 팔아야 했지.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끔찍한 시절이었어. 밀을 지금의 열 배 값을 줘도 구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시에 마을에서 굶어죽은 이들을 보며 슬퍼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렇게 한센은 칼스에게 마을에 있었던 옛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 이야기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익숙한 초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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