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멀리서 다가오는 칼스 일행을 발견했는지 마을 목책 앞에 여러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아버지! 고생하셨습니다."
"케인. 마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네. 겨우 3일밖에 안 지났는걸요. 이제는 저도 이 정도쯤은 거뜬하다구요."
"녀석 허세는."
케인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린 한센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고, 마를르성에서 가져온 각종 물품들을 마을 창고에 넣는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마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칼스가 구입한 세 마리의 말이었는데, 마을 꼬마 아이들은 가끔 루엠상단이 올 때나 볼 수 있었던 커다란 말이 마을에 들어오자 호기심이 동했는지 임시 마구간 주변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스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잭과 제니를 찾아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제니 뭐 큰 문제 같은 건 없었지?"
"응. 멍청이 오빠가 연기를 덜 피우고 벌집에 다가갔다가 몇 방 쏘인 거 외에는 큰일 없이 지나갔지."
"야!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이렇게 창피를 줘야 꼼꼼하게 할 거 아냐! 으이구."
"형. 꿀벌한테 한두 방 쏘이는 거야 큰일이 아니긴 한데. 자칫 잘못했다가 자극받은 벌들이 한 번에 달려들면 죽을 수도 있어."
"미안. 네가 내검시간은 최대한 짧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급하게 하다 보니 그랬어."
"괜히 그것 때문에 급하게 하면 다른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조급하게 하지 말라고."
사실 칼스 역시 이곳에서 양봉을 시작한 지는 1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두 남매와 비교해봐야 고작 몇 달의 차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부분에서 태클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고, 오히려 여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곧바로 그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칼스의 모습에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여기 이거는 두 사람한테 주는 선물이야. 이건 일할 때 겉에 입을 옷이고, 이건 평상시에 입을 옷들. 특히 제니 누나는 매번 마을 사람들에게 얻어온 옷을 고쳐 입곤 했잖아."
에올론 마을이 공동체적 삶을 중시한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나이에 사고로 부모를 잃은 잭과 제니는 그날부터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거들어주고 먹을 것을 얻으며, 약간의 품이라도 팔아야 입을 옷이 생겼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상황이 나빠지면 가장 먼저 내몰리는 것은 바로 두 남매였고, 그러다가 안나의 눈에 띄어 가까스로 한센의 집 한편에 조그마한 방을 얻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 제니! 잭! 너희는 오늘부터 칼스 녀석의 일을 돕도록 해라.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다 말해두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한센의 집에서 마을의 여러 일을 도우며 지내던 두 사람에게 어느 날 한센으로부터 아직은 어린아이인 칼스를 도와 일을 하라는 지시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놀이 상대가 되어주라는 말인 줄 알았으나 양봉일을 배우면서 단순히 어린아이의 놀이 상대를 하라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루엠상단의 방문 이후 칼스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에 또다시 좋은 일자리를 빼앗기고 예전의 품팔이를 하는 삶으로 돌아가지는 않을지 전전 긍긍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칼스는 그런 두 사람의 걱정과는 다르게 오히려 둘을 믿고 더더욱 열심히 일을 가르쳐주었고, 며칠이나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서도 그가 애지중지 키우는 벌들보다 두 사람의 안위를 먼저 물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까지 사들고 와준 것이었다.
"고맙다 칼스. 내가 못나서 동생에게 해주지 못한 걸 네가 다 해주네."
"에이 뭘. 이제 두 사람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안 챙겨주면 누가 챙겨주겠어?"
"가족... 가족이구나."
잭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여동생을 가족과 같다고 말하는 칼스의 말에 왠지 모를 뭉글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흑! 고마워! 고마워. 칼스."
"엑? 제니 누나 왜 울어? 그거 얼마 안 하는 거야 너무 그렇게 감동할 것 까지는..."
- 와락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제니의 모습에 당황해하던 칼스는 이내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름 마을에서 덩치가 큰 편에 속한다고 하는 칼스였으나 11살에 불과한 아이였기에 제니가 그를 품에 끌어안아버리니 풍만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혀 입을 열수 없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던 그는 얼굴 주변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느낌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지 깨달았고, 급히 뒤로 몸을 빼려다 자신의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작은 흐느낌과 물기에 잠시금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 제니가 상당히 마음이 넓은 여자였구나. 옷이 펑퍼짐해서 몰랐네. 내가 좀 더 키가 컸으면 멋진 모습을 연출했을 텐데 이놈의 몸뚱이는 대체 언제쯤 다 자라려나. 일단 기분이 좋기는 한데 옷에서 쑥 냄새가 진동을 해서 숨쉬기가 힘들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슬슬 떨어져도 되려나?'
처음에는 그 뭉근한 느낌을 만끽하던 그였으나, 그녀가 입고 있던 옷에서 풍겨저나오는 진한 쑥 냄새에 슬슬 곤욕스러워질 때쯤 제니가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으흑! 흑... 미안.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나 봐... 아무튼 고마워. 잘 입을게 그리고 열심히 배워서 네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야."
"자리를 잠시 비켜줄 걸 그랬나? 농담이야 농담! 제니 그 손 내려놓으라고. 아무튼 나도 이제는 정말로 열심히 배울 테니 잘 가르쳐주길 바래. 가족이라... 네게 우리는 그냥 인부가 아닌 가족과 같은 거였구나. 그랬어..."
"하하! 그럼 해가 지기 전에 잠깐 벌이나 확인해봐야겠네!"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밀려온 칼스는 여운에 젖어있는 남매를 뒤로하고 벌집이 놓인 양봉장으로 들어가 며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벌들은 떠날 때 모습과 크게 달라진 바 없어 보였고, 벌통 주변의 물도 깨끗해 보이는 것이 두 남매가 맡은 바 일을 충실히 다 해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그였다.
그렇게 양봉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이미 먼저 들어와 있었던 가족들이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요새 벌을 돌보느라 집안일을 못하는 제니를 대신해 안나를 도와 요리를 하던 에일린은 뒤늦게 들어온 칼스를 보더니 입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어쭈. 이 누나는 저녁 준비하느라 바쁜데 집에는 안 들어오고 어딜 돌아다니다 이제 온 거야?"
"읔! 오늘 저녁 누나가 한 거야? 먹을 때 조심해야겠네."
"이게!!"
"어어? 그걸로 치면 선물로 사 온 옷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으... 으음. 마음씨 넓은 누나가 봐주도록 하지. 빨랑 씻고 밥 먹을 준비해!"
칼스가 후다닥 집 한편에 놓인 물동이로 달려가 먼지를 씻어내고 돌아오자 상이 다 차려졌는지 다들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어. 먼저 드셔도 됐는데 기다려준 거예요?"
"며칠 만에 한 가족이 다 모여서 밥 먹는 거니 다 같이 모였을 때 식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네 엄마가 그러더구나."
"야! 배고프니까 빨리 앉아. 니가 벌통 관리한다고 도망간 사이 형은 밀포대를 몇 개나 날랐는지 알아?"
"하하하. 칼스 녀석도 마냥 놀러 간 건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말거라. 너는 네일을 한 거고 칼스는 자신의 일을 챙기러 간 거니까 말이야. 게다가 칼스 덕분에 마을에서 다시 말을 사육할 수 있게 됐으니 차기 촌장인 너에게는 큰 선물 아니냐."
"헉! 그 말들을 칼스가 산 거예요?"
안 그래도 오늘 마를르성에서 사 온 물품들을 창고로 나르면서 이번에 새로 마구간에 들어선 말들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던 케인이었다.
"그래. 막말로 우리 마을에 무슨 여윳돈이 있어서 암말도 아닌 종마로 쓸 수 있는 수말까지 샀겠냐. 이번에 영주님이 칼스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사례금을 줬다더구나. 그걸로 말도 사고 너희들 준다고 옷들도 잔뜩 사 온 거 같던데 너무 타박하다가는 그 옷들이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맞이할지도 모르지."
"칼스 내가 평소에도 너한테 잘해주는 거 알지?"
"자. 내가 오늘 열심히 만든 감자 스튜니까 맛있게 먹어야 해?"
"하하하... 이러면 더 부담스러운데. 아무튼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 맞는 저녁식사를 한 칼스의 집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칼스는 가족들을 위해 사 온 선물을 하나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먼저 집안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안나와 가장 선물을 기대하고 있던 누이 에일린을 위한 옷이 담긴 보따리를 꺼냈다.
"와... 와아! 정말 이걸 다 사 온거야?"
"어머! 이 색감 좀 봐. 확실히 도시에서 파는 염료는 남다른가 보네 곱기도 하지."
"엄마옷은 최대한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걸로 샀고, 누나 건 나름 내가 골라봤어. 맘에 안 들면 직접 가서 바꿔보던가."
"흐.. 흥!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네 정성을 봐서 참아줄게."
에일린은 1년에 한두 번 아빠를 따라 마를르성에 들를 때면 눈으로 구경만 했던 옷이 자신의 손에 들렸다는 것에 기뻐하다가 칼스의 말을 듣고서는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흘겼다. 안나또한 마을에서는 쉽게 구하지 못하는 화려한 염료로 물들여진 옷들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소녀처럼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이거. 가장이 되어서 가족 하나 못 챙긴 거 같아 마음이 영 좋지 못하네."
"아빠. 저는 어떻구요. 동생이란 놈이 저렇게 나오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 형이랑 아빠 것도 사 왔으니까 한번 봐봐."
그사이 다른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 칼스였고, 그 안에는 남성용 옷이 들어차있었다. 그중에서도 따로 고급스럽게 싸여있던 옷을 형인 케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꺼내봐 봐."
"헉! 이거 설마."
"형 내년에 결혼한다면서. 그때 입으라고 사 온 거라 지금 입기에는 약간 치수가 클 수 있어. 뭐 지금 당장 도 못 입을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고맙다. 나도 꼭 멋진 촌장이 돼서 네가 결혼할 때 좋은 선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흐흐. 괜찮아 이번에 영주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루엠상단에 꿀과 밀랍을 납품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았으니 우린 더 부자가 될 테니까."
그 말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가족들을 위해 마를르남작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칼스였다. 이미 돌아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들은 한센만이 편안한 자세로 아들이 사준 옷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머지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 지방의 영주와 만난 칼스의 경험담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 상으로 금화와 함께 공식적으로 꿀을 팔 수 있게 됐어요."
"와... 그럼 앞으로 더 자주 루엠상단의 상인들이 들리는 거야?"
"정확한 건 일정 조율을 해봐야겠지만 이전보다는 좀 더 자주 왕래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곳에 제 이름을 건 상단을 만들고, 루엠상단뿐만 아니라 왕국 전역의 상인들에게 상품을 팔아 돈을 버는 게 목표예요."
"흐응! 그럼 난 너한테 돈을 받아서 마을을 키워나가면 되겠구나! 이거 완전 대박 아니냐?"
"인석아. 그렇게 좋아할 거 없어! 앞으로 네가 골치 썩을 일만 늘어날 거다. 지금이야 가축 몇 마리 키우는 마을이라 권력자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은 거지. 칼스 저 녀석 말대로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면 이래저래 외부에서 들어오는 압력에 시달릴 거다."
"헉!"
칼스의 말에 좋아하던 케인은 이어지는 한센의 말에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잠을 자야 할 시간이 되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