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마를르 성에서 돌아온 후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칼스는 마를르에서 들여온 각종 자재와 도구를 사용해 양봉장 인근 공터에 건물을 세울 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그전부터 미리 봐두었던 부지에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한 것인데 마침 인근에서 농작물을 키우던 마을 사람들의 일손이 많이 비는 시기여서 금세 사람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물 올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걱정 붙들어매고 벌이나 돌보라니까?"
"하하하. 알았어요. 그래도 첫삽 뜨는 건 보고 가려고 한 거죠."
"에잉. 주인 될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긴장돼서 일도 잘 못 혀. 어차피 뜨내기도 아니고 다 이 동네 사람인데 장난질을 칠까. 게다가 듣기로 이번에 마을 여인네들한테 좋은 일도 했담서.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안사람한테 신신당부 듣고왔으니께 언능가."
이번에 칼스가 마를르성에서 사 온 마을 사람들의 생필품 중에는 여자들에게 꼭 필요한 위생용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구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는 언감생심이었고, 이곳에서는 가장 깨끗한 순면직물을 여러 겹으로 하여 흡수성을 높인 후 마치 기저귀처럼 착용하는 형태의 위생용품이 존재했다.
물론 이것들 역시 부유층을 겨냥한 상품이었기에 가격이 제법 나갔었는데, 처음에는 이제 곧 생리를 시작할 에일린을 위해 선물할까 하다가 마을 여성들 대부분이 이런 물품을 쓰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대량으로 구입하여 어머니 안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어머니가 어린 녀석이 대체 이런 건 어찌 알았냐면서도 기뻐하던걸 생각해 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 그나저나 내가 사 온 거라는 게 벌써 다 알려진 모양이네.'
아무래도 마을의 꼬마 아이인 칼스가 직접 전달하기엔 부담스러운 물품이다 보니 안나에게 부탁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물품의 가격대가 워낙 높다 보니 다들 누가 사 온 건지 이미 다 알게 된 모양새였다.
"아 참! 벌통은 아직 더 필요 없는 거니?"
"네. 내년 봄까지는 벌을 더 늘릴 시기가 아니라서요. 얘들도 겨울을 나야 하는데 입이 많아지면 그만큼 겨울나기가 힘들잖아요. 그럼 이쪽 일은 잘 좀 부탁드릴게요!"
칼스는 대략적인 건물의 조감도와 어설프게나마 그려낸 설계도를 마을 목수인 잭슨에게 주고는 겨울날 준비를 하고 있는 벌집을 살피기 위해 양봉장으로 돌아왔다.
그가 주로 벌을 키웠던 강원도 지역과 달리 이곳 에올론마을을 비롯한 동부지역의 겨울은 추운 날씨라고 해봐야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문 따듯한 날씨였다. 거기에 사계절 동안 딱히 건조하거나 비가 많이 오는 기간이 없는 일정한 강수량을 보였기에 여러모로 벌을 치기에는 훨씬 더 좋은 환경임은 분명했다.
"온도가 조금만 더 높았으면 겨울에도 꿀을 딸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겨울에도 피는 꽃이 제법 있는데, 벌들은 왜 그때는 활동을 안 하는 거지?"
"벌은 추위에 약하거든. 지금만 봐도 바깥에서 활동하는 녀석들의 숫자가 훨씬 줄었지? 이런 식으로 점점줄다가 어느 순간에 얘들도 곰처럼 겨울잠에 빠져들 거야."
"음... 그럼 그동안은 우리도 할 일이 없겠네."
"눈이 오거나 하면 주변에 눈 정도만 치워주면 될걸."
한국에서 양봉을 할 때도 겨울철에는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었기에 그 짬을 이용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던 칼스였다.
"곤란한데... 겨울에 할 일을 찾아봐야 하나?"
"왜? 둘 다 쉬면 되지."
"쉰 다라. 여태 살면서 쉰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어서 그런지 쉰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
올겨울 동안은 새로 짓기 시작한 건물의 공사를 지켜보며, 마를르성에서 사 온 책이나 읽을까 했던 칼스였는데 잭과 제니는 겨우내 쉰다는 것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는지 자꾸만 뭔가 할 일을 찾으려 했다.
"으음... 그럼 이번 겨울에 두 사람은 나한테 글 쓰고 읽는 거나 좀 배울래? 앞으로 상단을 만들어서 거래를 하다 보면 분명 쓰일 곳이 생길 텐데."
"으엑! 야 나는 안 할래. 차라리 몸쓰는 일을 하지. 겨울 땔감을 구하는 집이 많을 테니 적당히 나무나 하러 다녀야겠어."
"그래도 배워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텐데."
"아냐. 제니한테나 알려줘."
문득 책을 떠올리다 보니 두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면 여러모로 편하겠다 생각이 들어 제안을 했으나. 선천적으로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 잭은 몸서리를 치며 거부 의사를 밝혔고, 제니는 제법 흥미가 도는 모양새였다.
"누나는 괜찮겠어?"
"음... 뭐 겨울에는 다른 집 품팔이할 일도 거의 없으니까 나야 좋은데."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그 외에도 칼스는 자신이 사 온 말이 살게 될 마구간이 새로 지어지는 것도 살피고, 틈틈이 마을 사람들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을 불러다가 승마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완연한 겨울이 되어버렸다.
이 시대의 겨울은 잔혹한 계절이었다. 특히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다가왔는데 다행스럽게도 에올론 마을은 그런 위험에 처한 가구는 없는듯했고, 오히려 겨울이 오기 전에 이래저래 돈을 펑펑 쓴 칼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인 겨울을 맞은 그들이었다.
칼스는 바깥을 하얗게 덧칠해나가는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자신이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보고 있던 책은 인간과 교류 중인 여러 이 종족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와는 달리 내용면에서 매우 단편적인 소개만 되어있어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엘프는 동부 아르덴 대삼림에 터를 잡고 살고 있으며, 그 외모가 아름답고 수명 또한 길다는 내용을 대체 몇 페이지에 걸쳐 늘여 써둔 거야? 이거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인데..."
그나마 각 종족별로 유명한 이들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기에 그런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책장을 넘겨가던 그때 바깥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스! 잠깐만 내려와봐라."
"네 아빠!"
요 근래 제니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일과가 없던 그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향했다. 1층 거실로 내려오자 그곳에는 막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겉옷 위에 쌓여있는 눈을 털어내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몇 달 전 루엠상단의 일행을 따라 마을에 들렀던 엘프 릴리나였다.
"생각보다 일찍 다시 만나게 됐네요 칼스."
"앗! 릴리나! 이 겨울에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조금 실례될 수도 있는 말인데... 혹시 꿀 좀 더 구할 수 있을까요 칼스? 물론 공짜로 얻어 가려는 건 아녜요."
"꿀이요? 남아있는 게 있기는 한데.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저번에 줬던 것보다 많은 양이 필요하긴 한데."
"음... 급한 일인가 봐요?"
"그게..."
릴리나는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한 미지의 땅인 아르덴 대삼림의 넓이는 굉장히 넓다고 알려져 있다. 추측하기로 거의 동부 왕국 면적의 절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 안에는 엘프들이 세운 왕국을 비롯해 여러 이 종족들이 각자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첫눈이 내리기 며칠 전에 숲의 동쪽 지역에 큰불이 났어요. 그 때문에 몇 개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는데 다친 이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몇몇 장로님들을 비롯해 치유술을 펼칠 수 있는 이들이 파견되긴 했는데 문제는 약이에요. 겨울 동안 사용하려고 비축했던 것들이 대부분 불타버렸다고 하더군요."
"으음... 그렇군요. 불이 그렇게 크게 났었다니 전혀 몰랐어요. 근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꿀로는 그렇게 많은 분들이 사용할 수 없을 텐데요."
칼스는 릴리나의 말에 그녀가 왜 급히 꿀을 구하러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꿀은 예로부터 천연 항생제로 활용되어왔는데 화상을 입었을 때 그 감염을 막는 데에도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칼스가 현재 가지고 있는 꿀의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를르성에 갔을 때 절반 이상의 꿀을 가지고 갔었고, 그 후로는 겨울을 날 준비를 하기 위해 채밀을 거의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꿀을 그 자체로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엘프들의 비법으로 약을 만들어 쓸 거거든요. 문제는 지금까지 각 마을에 남아있는 꿀들을 모아도 턱없이 모자라다는 거예요. 마침 칼스가 꿀을 가지고 있던 게 생각나서 급히 달려와본거구요. 적은 양이라도 좋으니 나눠줄 수 있나요? 그 값은 충분히 치를 테니까요."
"알겠어요. 그런 상황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야죠. 그리고 엘프분들이 동쪽 숲에 흉악한 녀석들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준 덕분에 이 마을이 안전할 수 있었으니 이번에 드리는 꿀은 그냥 가져가서 쓰도록 하세요."
"정말요? 고마워요!"
릴리나는 칼스가 흔쾌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꿀을 나누어주겠다는 답을 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칼스는 평소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엘프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봄 채밀 전까지 사용할 최소한의 꿀을 제외한 나머지를 릴리나에게 제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저번 마를르성에 다녀오면서 받은 금화 덕분에 당분간 재정적인 문제를 겪을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혼자서 들고 가기에는 좀 많을 거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마을 밖에서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거든요."
"다행이네요 그럼 그 친구분들을 만나러 가죠. 어차피 꿀을 가지러 가려면 나가야 하니까요. 아빠 그럼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이미 마을 입구에서 릴리나가 방문했을 때부터 그녀를 안내해온 한센은 아들이 적극적으로 엘프들의 일을 돕겠다는 말에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집을 나서자 훈훈했던 집안의 온도와는 사뭇 다른 찬 공기가 덮쳐왔고, 하늘에서는 여전히 하얀 눈송이가 퍼붓듯 쏟아지고 있었다.
"으... 악마의 똥 덩어리들. 대체 언제까지 내리는 거지?"
"후후. 악마의 똥 덩어리라니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그래도 이 눈이 겨울에 얼어붙은 계곡을 대신해 마실 물을 제공해 준답니다."
"눈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녜요. 그냥 치워도 치워도 계속 쌓이다 보니... 일단 일행분들부터 모셔오도록 해요."
"그럴까요?"
- 삐이이이이익
칼스의 말에 품 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불어내는 릴리나였고, 잠시 후 저 멀리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두 개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키가 180은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성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릴리나보다도 작은 것이 여성인 듯 보였다.
"릴리나! 이야기는 잘 진행된 건가?"
"어머~! 세상에 여신님의 흔적이 이렇게 진하게 남겨진 인간이라니! 릴리나 네가 말한 게 정말 사실이었나 보네."
"레일라. 여신님의 흔적이라뇨? 칼스에게 성흔이 남아있다는 건가요?"
"네. 그것도 이마에 아주 진하게 남아있어요. 여신님으로부터 보통 사랑받는 아이가 아닌듯하네요."
"둘 모두 잡담은 그만해. 지금 당장에도 죽어가는 동족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둘보다 남자 엘프의 사회적 직급이 더 높았는지 그의 말에 두 여엘프가 입을 다물었고, 그는 릴리나와 함께 서있던 칼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아이야. 나는 우리 엘프들의 자애로운 여왕님을 수호하는 장다름(Gendarme)의 일원인 타렌이라고 한다. 네가 여신님으로부터 벌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고 들었다. 부디 우리 일족에게 꿀을 좀 나누어다오. 나중에 이 신세는 꼭 갚도록 하마."
"네. 대강의 사정은 릴리나씨에게 들었어요. 따라오세요 꿀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갈 테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