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만남
그렇게 세 명의 엘프를 이끌고 꿀을 보관해둔 창고에 도착한 칼스는 남아있는 꿀단지의 양을 체크한 후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사용할 만큼의 양을 뺀 나머지 꿀단지를 밖으로 빼기 시작했다. 그렇게 꺼낸 꿀단지가 총 20여 개에 달했는데 이 엄청난 양에 릴리나마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게 다 꿀이에요?"
"타렌님! 제가 확인해 봤는데 다 깨끗한 최상품의 꿀이에요. 이거면 약을 만드는데 충분할 거예요."
"그래? 그거 정말 다행이로군! 그나저나 이 정도로 많은 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답례로 줄 금액이 턱없이 모자랄 거 같은데 어쩌지?"
"괜찮아요. 릴리나에게도 미리 말하긴 했는데, 여태 이 마을이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엘프분들의 덕이 컸으니 이번에 그 신세를 갚은 거라고 치면 돼요. 그냥 가져가세요. 근데 단지가 많아서 세 분이서 다 들고 갈수 있을지 모르겠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마을에 있는 마법 배낭을 챙겨왔거든."
칼스의 걱정 어린 말에 레일라라는 엘프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의 입구를 펼치더니 쌓여있던 꿀단지를 조심스럽게 들어 배낭으로 밀어 넣었고, 신기하게도 단지 하나가 겨우 들어갈 듯 말 듯 해 보였던 배낭 안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와! 대단하네요!"
"마법 배낭은 처음 보나 보네. 하긴 인간들의 마법 실력이 늘긴 했지만 아직 이런 곳까지 마법 물품이 풀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칼스가 마법 배낭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이 세 사람이 순식간에 꿀단지를 배낭 안으로 넣었고, 그 무게는 완전히 경감되지 않는지 배낭을 멘 타렌의 발이 바닥으로 움푹 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게는 그대로인가 봐요?"
"약간 줄기는 하는데 큰 차이는 없어. 그냥 부피를 줄여주는데 의미를 두는 거지."
"하긴.. 부피만 줄어도 수레 같은데 실을 수 있는 양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테니까요."
"후후. 생각보다 이런 배낭의 값은 비싸다는 게 문제란다. 그나저나 여신님의 가호를 받은 아이라니... 좀 더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오늘은 바빠서 안되겠네. 나는 아르케 여신을 따르는 종인 레일라라고 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엘기간테에 놀러와 너라면 모두가 환영할 테니까."
레일라는 자신의 소속을 밝히더니 엘프들의 도시이자 여왕이 머무르고 있다는 엘기간테로 놀러 오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릴리나는 그저 한번 얼굴을 봤을 뿐인 자신의 요청에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많은 꿀을 내준 칼스에게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칼스. 갑작스럽게 방문한데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는 부탁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칼스는 그냥 준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으니 꼭 장로님께 이야기해서 값을 치르도록 할게요."
"어어. 진짜 안 줘도 되는데... 그냥 나중에 제가 이곳에 꿀을 파는 상점 하나를 만들 건데 자주 와서 꿀을 사주시고, 혹시나 제게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팔아주시면 돼요. 저는 그럼 엘프분들도 믿고 사는 꿀이라고 광고를 할 수 있거든요."
"으하하하! 우리 엘프들을 홍보 소재로 사용하겠다라. 당찬 아이로군. 좋아좋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장다름에서 사용할 꿀을 살 때는 꼭 네 상점을 이용하라고 단장께 건의를 올리도록 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칼스라고 했나? 우리가 한시가 바쁜 상황이라 급하게 돌아가야 하는 점 양해해다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세 엘프는 갑작스레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마을을 빠져나가 숲속으로 들어갔고, 그런 엘프들의 움직임을 본 칼스는 왜 그들이 숲의 종족이라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뭐 타잔도 아니고, 유인원도 아닌데 저렇게 나무를 자유자재로 타고 다닌다고? 근데 생각해 보니 엘프들은 활을 잘 쏜다던데 셋 모두 활을 메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네. 나중에 보면 물어봐야겠다."
칼스는 이제 거의 텅텅 비어버린 창고의 내부를 정리하고, 얼마 전 다시 만들어본 비누들의 상태를 체크해보았다. 비싼 향료를 넣어 만들어서인지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향을 내는 비누들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문제는 그 비누의 성능을 테스트해보려 해도 바깥이 추워 물이 얼어버리는 바람에 빨래터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안나와 에일린에게 주고 사용케 했더니 나름 평이 괜찮은 것이 봄에 루엠상단이 도착했을 즈음엔 팔릴만한 비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나저나 마법 배낭이 굉장히 좋아 보이던데. 그런 건 가격이 얼마쯤 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루엠상단에서도 마법 물품은 판매하지 않고 있었는데, 따로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네."
* * *
지구에서 가장 큰 수목으로 꼽히는 그레이트 세쿼이아 나무의 키가 최대 200미터 정도라고 할 때. 그에 비견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는 나무가 아르덴 대삼림 중심부에 존재했다.
솔라 제국의 참상을 피해 이 숲으로 들어오게 된 엘프들은 이를 어머니의 나무라 부르며 신성시 여겼다. 자연스럽게 그 나무 옆에 엘프들의 여왕이 머무는 거처가 마련되었고, 차후에 [엘기간테]라는 이름의 엘프들의 도시로 발전되었다.
그런 엘기간테 외곽의 치료소에는 평소에는 거의 없던 부상자들이 밀려들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심한 화상을 입은 엘프와 드라이어드 등 인근 숲속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이었다.
"아아악! 살려줘!"
"으으... 여신이시여! 제발 제 아이만큼은..."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숲 전역에서 약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견뎌요!"
"여신의 자애가 이곳에 현현하시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그들을 돌보는 가족들의 절규, 그리고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이미 바닥이 난 신성력을 쥐어짜가며 회복 주문을 외우는 광경을 바라보는 한 엘프가 있었다.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이! 그간 숲에 불이 난 적이 제법 있었다지만 이렇게 큰 참변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여왕님! 큰일입니다. 약을 만들 꿀이 다 떨어져간다고 합니다."
"주변의 픽시들에게 부탁을 다시 한번 해봤나요?"
"네. 하지만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내어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어준 양만 해도 제법 무리를 한 모양인지라."
"으음. 그러고 보니 엘그랑가든의 장로가 인간에게서 꿀을 구해보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안 그래도 타렌을 그쪽 마을로 보낸 참입니다. 그 인간이 아르케 여신님과 연이 닿아있다고 하여 레일라까지 함께 보냈습니다. 거리상으로 라면 오늘이나 내일쯤엔 돌아올 거라 생각됩니다."
"제발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하곤 다시금 여러 종족들이 바삐 드나드는 장면을 바라보는 이는 요정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일족의 대표자인 여왕 아옐루나였다. 그녀는 어머니 나무의 가지와 잎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것인지 이미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살아있는 것처럼 푸르른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에 발생했던 화재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아르덴 대삼림의 숲은 몇 년에 한 번씩 크고 작은 불이 일어나곤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일어난 실화 인적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발생하는 사고였다.
특히 어머니의 나무 주변엔 자연의 기운이 충만했고, 이에 여러 종류의 정령들이 이끌려오곤 했는데 그중에 불과 관련된 속성을 지닌 정령들이 나타나면 화재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엘프들은 각각의 마을에서 일부 인원을 차출해 숲속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번 화재는 불행하게도 불과 바람의 속성을 모두 품은 정령으로 인해 급속도로 번져갔다.
초기 진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숲을 지키려는 엘프들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어머니 나무가 있는 엘기간테 주변까지는 번지지 않았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엘프들과 이종족들이 불속에 갇혀 죽거나 심한 화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 타타타탁!
"허억! 허억! 도... 도착했다!"
"하악! 하악 하악!"
그렇게 가만히 구호소 앞에 서있던 아옐루나의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와 함께 있던 장로들이 고개를 돌리자 땀을 비 오듯 쏟아내는 세 엘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방금 전 약을 만들 꿀이 다 떨어졌다고 여왕에게 알렸던 장로가 반색하며 다가가 타렌을 부축하며 물었다.
"타렌! 레일라! 무사히 다녀왔군! 고생했다. 고생했어! 인간들이 순순히 꿀을 내어주던가?"
"허억... 허억! 장로님... 다행히 꿀은 구해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양은 얼마나 되지? 혹시나 그들이 우리의 사정을 이용해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던가?"
"아뇨. 여신께서 가르침을 내린 아이라더니 고맙게도 이쪽 사정을 듣고는 가지고 있는 꿀 대부분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내어주었습니다. 그간 자신의 마을에 큰 위협이 닥치지 않은 게 우리 덕이라면서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오오 세상에 여신이시여! 어서 꺼내보게! 지금 마침 꿀이 다 떨어져서 곤란했던 참이야."
장로의 말에 타렌이 등에 메고 있던 마법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자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그 소리에 놀라며 배낭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고, 꿀이 가득 찬 단지들이 10개를 넘어가자 여왕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스무 개에 달하는 꿀단지들이 구호소 앞을 가득 채웠고, 장로는 놀라움과 궁금증을 뒤로 미뤄두고 재빨리 그 꿀을 분배해 약을 만드는 곳과 구호소 내부로 보내기 시작했다. 여러 엘프들이 꿀단지를 들고 정해진 위치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옐루나는 타렌에게 물었다.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고 이 많은 꿀을 그냥 내어주었단 말인가요?"
"네. 여왕님. 여기 함께 온 엘그랑가든의 릴리나가 그 소년과 안면이 있어 그에게 사정을 알렸더니 그냥 가져가라며 꺼내주었습니다."
"여신님의 성흔이 남아있는 아이였어요. 역시 여신님께서 가르침을 준 인간답게 마음씨도 착하더라고요."
"여신이시여. 그나저나 이런 선물을 받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일단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 인간에게 답례를 해야겠어요. 릴리나라고 했죠?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릴리나는 엉겁결에 타렌에 이끌려 마을이 아닌 엘기간테까지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여왕을 대면하게 되자 긴장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까지 더듬어가며 말했다.
"그. 그게 저도 마을로 돌아가던 도중 단 하루를 묵으며 알게 된 칼스인지라 정확히 그가 무엇을 원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 마을에 머물던 날 그는 꿀을 선물로 주며 그 대가로 동부 왕국의 여러 정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르덴 대삼림과 인접한 작은 마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네.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촌장의 아들이어서 그런지 총기가 넘치는 데다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아르케 여신님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가 주변 정세에 대해 궁금해한다라.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아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하.. 하지만 아직 어린 그가 이곳까지 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짧은 수명을 살지만 그만큼 금방 자라나지요. 아직 어린아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기회는 많을 겁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그 아이 덕분에 여러 생명이 목숨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겠군요."
아옐루나는 아까보다는 많이 밝아진 목소리로 말하며 활기를 띠기 시작한 구호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막 가져온 꿀을 화상을 입은 부위에 바르는 이들의 모습과 오랜 기간 치료를 이어가느라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던 사제들이 꿀을 조금씩 덜어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 저녁 충분히 공급된 꿀로 인해 치료제를 풍족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엘프들은 빠르게 치료를 마무리 지었고, 며칠이 지나자 엘기간테에 설치되었던 임시 구호소는 그 흔적만 남겨두게 되었다. 그 후로 엘기간테에 머물고 있던 엘프들과 여러 이종족 사이에 아르덴 대삼림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갔고, 칼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