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갑작스럽게 찾아온 엘프들에게 대부분의 꿀을 제공해버린 칼스는 마를르성에서 사 온 향료들을 활용해 비누를 개량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의 상태를 중간중간 확인했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진척되어가는 것이 봄이 오기 전에는 건물이 다 완성될 것이라고 목수인 잭슨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외에도 형 케인과 함께 마을의 여러 노후된 시설들을 점검해나갔는데, 케인이 평소 눈여겨 봐두었으나 남는 여윳돈이 없어 고치지 못했던 부분들을 칼스의 도움을 받아 처리해서 에올론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가 이끌어갈 마을의 미래를 밝게 점치고 있었다.
그렇게 큰 사건 없이 겨울이 지나갔고 어느새 푸릇푸릇 한 새순이 돋아나는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자박 자박
- 부우우웅!
"앗! 벌이다! 칼스! 얘들이 드디어 겨울잠에서 깬 모양이야."
"다행이네. 첫 겨울이라 어찌 될지 몰랐는데 이 녀석들 생각보다 잘 견뎌줬어."
"후후후. 마침 창고에 꿀도 다 떨어져가는데 다행이다!"
칼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힘찬 날갯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벌들을 지켜보다가 이제는 정말 가족같이 가까워진 두 남매를 보며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본격적으로 꽃이 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니 너무 기대하지 마. 그리고 제니랑 잭 둘 다 좋은 시절 다 갔다고 생각하라고, 올해는 좀 더 확실하게 가르쳐줄 테니 말야."
"걱정 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글은 못 배웠지만. 일을 배우는 건 다르니까!"
"오빠가 제일 걱정이거든? 작년처럼 덤벙대서 일이나 만들지 마!"
작년 봄에는 처음으로 벌통을 만들어서 들여놓다 보니 그 규모를 늘리는 것에 막연한 불안함이 있었다. 그러나 한 해 동안 채밀되는 꿀의 양을 보았을 때 작년보다 더 많은 벌통을 들여놔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보였고, 그가 생각해놓은 숫자만큼 벌통을 늘리려면 올해 두 사람이 제 역할을 해줘야 했다.
"자 그럼. 올해 첫 내검을 시작해보자고!"
그렇게 세 사람은 지난겨울 동안 열어보지 못했던 벌통을 하나하나 열어 점검하기 시작했고, 몇몇 벌통은 그 규모가 많이 줄기는 했으나 다행히 모든 벌통의 여왕벌이 무사히 겨울을 버텨냈음을 확인해 기분 좋은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 *
하얗게 온 세상을 뒤덮었던 눈들이 채 다 녹아내리기도 전에 에올론 마을 인근에는 봄꽃들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양봉을 할 때는 봄철에도 꽃샘추위 때문에 벌들이 외부 활동을 하는 것을 힘들어했는데 동부 왕국의 경우엔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극심한 일교차가 발생하는 봄 날씨는 없는 듯 보였다.
"칼스! 여기 덮어뒀던 가죽들은 언제 걷어낼까?"
"음... 아직 오전에는 온도가 꽤 내려가는 거 같으니까 좀 더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도 어김없이 잭과 제니를 이끌고 벌통의 상태를 점검하는 칼스였고, 이런 그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벌들은 큰 문제 없이 활동을 개시했다. 여기저기에 피어난 봄꽃의 냄새를 어찌 맡았는지 일벌들은 연신 꿀을 머금고 벌통에 드나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부우우웅
"흐으음..."
"왜? 뭐가 잘못됐어?"
"아니. 혹시나 벌집안에 다른 벌레들이 들어가지는 않았나 확인해보고 있었어."
"아하. 하긴 벌집은 따듯하게 관리해왔으니 벌레들이 좋아할 환경이긴 하지. 게다가 달콤한 꿀까지 들어있으니."
"그러니까 개미 같은 녀석들이 혹시나 들어가는지 잘 감시해야 해. 벌통을 내려놓을 땐 꼭 맨바닥이 아닌 깔개 위에 올려놓도록 하고."
"어휴... 그 소리는 작년부터 몇 번을 듣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제법 내검하는 모양새가 잡힌 두 남매였으나 칼스의 눈에는 영 미덥잖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개미가 아닌 진드기와 나방의 애벌레였다.
'그 녀석들이 한번 생기기 시작하면 벌통 한두 개 작살나는 건 금방이니까... 그런데 이쪽 세상에는 진드기가 없나 보네. 적어도 한두 마리는 보일법한데 말이야.'
지구에서 벌을 키울 때 자신을 항상 애먹였던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내검을 마친 칼스는 모든 벌통이 보이는 장소에서 두 남매와 꿀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올해부터는 루엠상단이랑 정기적으로 거래를 한다는 거지? 그럼 혹시 그때 나랑 제니가 마를르성에 다녀와봐도 될까?"
"마를르성에?"
"응.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거든 갈 여유도 없었고."
"흠... 일단 그때 가봐야 알 거 같은데. 가격 같은 것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얼마나 자주 왕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렇게 잠시 잡담을 나누던 칼스는 문득 저 앞에 보이는 건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것은 바로 루엠상단과의 정기적인 거래를 하기 위해 작년 늦가을부터 짓기 시작한 상점 건물이었는데 이제는 거의 완성이 되었는지 한참 지붕을 올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스. 건물이 다 지어져 가는 것 같은데 가게 이름은 생각해놨어?"
"아니? 그냥 마을 이름을 붙이면 되지 않을까? <에올론>이렇게 말이야."
"에올론이라... 뭔가 마을에서 공동 운영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칼스 네 이름으로 해서 만드는 게 어때? <칼스> 이렇게."
"그보다는 여기서 파는 상품을 나타내는 명칭이 더 좋을 거 같은데. <벌꿀>상점이라든지 <꿀단지>상점같이."
"음... 아! 이걸로 하면 되겠다. <허니>."
"허니?"
"허니가 뭐야? 발음은 이쁘긴 한데."
"꿀의 다른 명칭이래. 아르케님이 말씀해 주셨어."
사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사용하던 단어였으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아르케 여신의 핑계를 대며 둘러대는 칼스였다. 그렇게 곧 완성될 상점의 이름은 <허니(Honey)>로 결정되었고 내친김에 간판까지 미리 주문하기로 했다.
* * *
칼스가 봄을 맞이해 상점의 이름을 정하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 무렵 동부 왕국의 정세는 복잡한 형국으로 얽혀가고 있었다.
솔라 제국과의 대결을 위해 결집되었던 왕국의 권력이 솔라 제국의 몰락 이후에는 점차 각 지역의 영주에게 흘러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왕가인 리온 가문에 필적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겉으로는 여전히 리온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매년 일정량의 세금을 바치곤 있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힘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동부 왕국의 수도인 리온을 기준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베르뉠후작령의 중심도시 베른의 성안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한 명이 바로 현 베르뉠가의 주인인 쎄흐 베르뉠 후작이었다.
"그래. 리온에서도 슬슬 눈치를 챘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아무래도 작년에 철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꼬리가 밟힌 것 같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바렌튼녀석이 채갈 위험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나. 어차피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결국 알려질 사실이었어."
바렌튼백작은 베르뉠후작령과 인접해있는 바렌튼백작령을 다스리는 가문으로 두 집안은 솔라 제국이 왕성하게 세를 불려나가기 이전부터 앙숙관계에 있었다. 두 영지 사이를 흐르는 레미에스강 인근에는 농작물이 잘 자라는 비옥한 토지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인근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두 가문은 그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워왔고, 솔라 제국이 전 대륙을 집어삼키려 할 때도 서로 같이 힘을 합치기보다는 무언의 불가침조약을 맺고 리온 왕가에 협력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왕가는 예전의 리온이 아니니 말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실상 그들을 지탱해 주던 주요 가신들마저 다들 제 갈 길을 떠난 상황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너무 얕봐서는 안됩니다. 왕도를 떠났다고는 하나 리온 왕가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떤 태도로 돌변할지 모르니까요."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리온이 아닌 바렌튼이니말일세."
그렇게 베르뉠후작과 잠시간 바렌튼백작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리온의 번견들에대한 말이 나와서 생각났는데. 지난겨울 마를르남작가에서 귀한 약재를 수도에 판매했다 하더군요."
"크흐흐. 솔라의 광신도들을 때려잡던 기사 가문이 보잘것없는 동부 구석지에 처박히더니 엘프들 몰래 귀한 약초라도 훔쳐낸 모양이군."
"노화 방지와 미용에 특효가 있다는 말에 왕도에서 매우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합니다. 엘프들의 기적의 묘약이라고 불리는 엘릭서를 만들 때 들어가는 핵심 재료라고 하니 후작님 말대로 그들에게서 훔쳐낸 걸 수도 있겠군요."
"노화 방지와 미용에 좋다고? 그 정도면 왕도에 사는 귀족가 여인들이 모두 애간장을 태웠겠구먼. 흐음... 나중에 혹시 또 그런 물건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내게 알려주게. 우리 귀여운 세르피나에게 주면 좋아하겠지."
베르뉠후작은 느지막이 들인 애첩의 교태 넘치는 몸매를 떠올리곤, 그녀에게 선물로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 * *
칼스가 마를르남작에게 선물했던 로열젤리로 인해 극동의 보잘것없는 작은 영지에 불과했던 마를르남작령이 동부 왕국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나라의 부유층 여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마를르남작은 사실 칼스가 자신에게 선물한 로열젤리가 이 정도의 관심을 받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는 벌의 수명을 늘려주는 효능을 지녔다고 하여 실제로 사람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알아봤으나 사람에게는 그 정도로 눈에 보이는 효능은 없다는 말에 실망하여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중 일부를 왕도 리온에 보내 판매했는데 그곳에 살던 엘프가 여성의 미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지나가듯 이야기했고, 엘프들의 미모를 부러워했던 여인들이 그 말을 듣고 로열젤리를 찾기 시작하자 그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마를르남작은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득이 생겨 기뻐했으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더더욱 숨기기 힘들어진 칼스라는 아이에 대한 처우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영지에 돈이 될만한 재원이 생긴 건 좋은데 그 열기가 과해.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 크리스티안."
"어차피 그와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는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 난리 통에도 이곳 마를르성까지 직접 찾아오는 이가 드물다는 것을 보면 딱히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곳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야생의 영역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크리스티안의 말대로 수도에서 각종 서신 등을 통해 로열젤리에 대한 문의를 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는 극히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은 리온성을 비롯해 왕국 주요 도시와 비교했을 때 마를르성의 편의시설이 형편없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도 가끔씩 불편함을 느끼곤 하는데 말 다 했지. 그럼 거래 부분은 그렇게 하되 로열젤리라는 것은 특별히 관리해야겠어. 아무리 그 녀석이 여신에게 성흔까지 받았다 해도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은 일을 저지를 테니 말이야."
"그에 대해선 제이콥에게 잘 전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눈이 녹으면 곧바로 에올론마을에 찾아갈 생각인 듯 보였으니까요. 근데... 정말 엘레노아를 같이 보내실 겁니까?"
"그래.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넌지시 그 아이의 이야기를 흘렸더니 직접 만나보고 싶다더군."
남작의 말에 영문도 모른 채 시달리게 될 칼스에게 무언의 사죄를 건네는 재무관 크리스티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