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21/65)



〈 21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이제는 완연한 봄 내음이 마을을 감싸고,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가 되었다.

칼스의 상점 건물도 완성이 되었는데 이는 마을에서 하릴없이 겨울을 나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건물을 짓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도 넉넉한 품삯이 주어졌기에 오히려 예년에는 겨우내 먹을 걱정을 하던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자. 네가 말한 내용을 최대한 지켜보려고 노력했으니 만족스러울 거다."
"공사 기간이 짧다 보니 걱정이었는데. 잭슨 아저씨 정말 고생하셨어요."
"나야 사람들을 부리는  주된 일이어서 그다지 힘든 건 없었지. 그나저나 이만한 건물을 짓는데 그 많은 돈을 쓰다니 괜찮은 거냐?"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 마을 사람들한테 돌아간 돈인데요. 그걸로 다들 겨울에 모자람 없이 지낼 수 있었다면 충분해요."
"하하하. 거참... 어린 녀석이 사람의 마음을 주물럭주물럭 해대는구먼.  아들 녀석이 손녀 하나만 낳았어도 네 녀석 코를 꿰어 가는 거였는데 말이야."
"헤헤!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건물이나  보자구요."

칼스는 올해 12살에 접어들면서 점점 덩치가 불어나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자신의 키를 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벌써 키가 160cm는 넘어가는듯했다. 김현석으로 살면서 단 2센티 차이로 180의 벽을 못 넘었던 것이 한으로 맺혔던 그였기에 적어도 그 이상으로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점점 더 자라나는 칼스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는데, 작년부터 적극적인 외부 활동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서인지 이제는 부모들이 아닌 혼기가 찬 여자아이들의 눈매까지도 제법 매섭게 느껴지기까지 한 칼스였다.


"먼저 이쪽은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할  있는 공간이다. 보다시피 마을 중앙 쪽으로 트여있어서 외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두었다. 이 뒤쪽은 창고인데 네가 부탁한 대로 땅을 파서 지하에 공간을 마련했지."
"오. 감사해요. 아무래도 지하가 선선해서 여러모로 창고로 쓰기에 좋거든요."
"대신 쥐새끼들이 드나들기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걸 명심하렴."
"뭐 당장 그곳에 곡식 같은  쌓아둘 일은 없어서 괜찮을 거예요. 정 안되겠다 싶으면 고양이라도 몇 마리 기르죠 뭐."
"그리고 이쪽으로 해서 올라가면 네가 지낼 수 있는 개인 공간으로 이어진다. 뭐 한센씨나 안나가 아직 어린 너를 독립시킬지는 의문이다만 어쨌든 가게를 관리할 사람들이 머물 방까지 따로 마련해두었다."

 외에도 특히나 칼스가 신경 썼던 화장실까지도 꼼꼼하게 확인을 하고 나서야 잭슨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그간 여러 사람들의 요구에도 넘겨주지 않았던 벌꿀주  병을 선물해 주었다. 이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잭슨을 배웅해  칼스는 자신의  건물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나 참... 삼십 넘어 그렇게 개고생해가면서도 이루지 못했던 건물주의 꿈을 여기서 이 어린 나이에 이루는구만. 비록 임대료 수입은 없지만 그래도 월세 없는 삶이 어디냐.'


건물 입구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있자 어느새 연락을 받고 왔는지 잭과 제니가 달려와 앞으로 그들이 자주 드나들게 될 건물을 구경하기 바빴고, 칼스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임시로 사용 중이던 창고에서 여러 비품과 꿀들을 꺼내어 지하 창고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마를르성에서 사람들이 올 거라는 이야기가 에올론마을에 전해졌다. 이미 겨울에 첫 꿀을 수확할 시점을 계산하여 넉넉하게 거래일을 잡아두었는데, 약속된 날짜보다 이른 시점에 온다는 말에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칼스였다.

'아직 꿀을 수확하기에는 이른 시점인데 무슨 일로 사람을 보낸 거지? 내가 준 물건에서 뭐 문제라도 발생한 건가? 아니지 만약 그런 일이었다면 사람이 아니라 병사를 보냈을 텐데? 궁금해죽겠네. 일단 그래도 허니 상점에 찾아오는 첫 손님인데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지. 겨울에 개량해둔 비누나 한번 선보여봐야겠다.'

일단 최소한의 성의를 보일 만큼의 꿀을 준비해둔 칼스는 겨울 동안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비누  개를 선별하여 가게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에올론마을에서 겨울 동안 만들어둔 치즈와 육포들도 일부 가져다 두니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상점이 탄생했다.

"으아~ 고생들 했어. 이제 마를르성에서 사람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겠다. 그때까지는 그냥 벌통만 잘 확인하면 돼."

그렇게 칼스가 급히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치고 난 며칠  에올론마을에 루엠상단의 부상단주인 제이콥을 포함한 일행이 도착했다.

그러나 작년 여름에 도착했던 루엠상단의 행렬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는데, 보통은 선두에 제이콥이 탄 수레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를르가문의 문장기를 비스듬하게 걸고 있는 커다란 마차가 상인들을 이끌며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센을 비롯한 에올론 마을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귀족의 방문에 놀라워할  칼스는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부 왕국 귀족의 풍습에 관한 책에서 본대로라면 마차에 문장기를 곧게 치켜세우는 경우 가문의 가주나 후계자가 안에 탑승했을 경우고, 비스듬하게 세웠다는 건 그 가문의 일원이 타고 있다는 건데... 근데 마를르가의 귀족이 여기는 왜 온 거지?'

* * *


엘레노아 마를르는 작년 겨울에 아버지인 보두앵 마를르남작으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네? 저보고 지금 시골마을에서 자란 꼬맹이랑 만나보라구요?"
"네가 머리에 쓸데없는 자존심만 가득 찬 귀족가 자제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 물론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결혼하겠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얼굴도 한번 못 본 데다 저보다 나이도 어리다면서요?"
"왜 내가 소개해 줄 그 아이가 아무나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어지간한 귀족가의 어린애송이들보다 훨씬 잘생겼더구나. 나이에 비해 체격도 다부진 것이 어디 약골일 거 같지도 않고, 거기에 그냥 시골마을 애송이가 아니라 아르케 여신님으로부터 성흔을 받기까지 한 녀석이다."

비록 자신이 첫째 부인의 자식이 아니었고, 이미 정실부인으로부터 태어난 오라버니와 언니들이 존재하기에 작위 계승과도 거리가 멀다고는 해도 나름 마를르가문의 일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던 엘레노아였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인 캐롤린은 왕도 리온에서 대대로 기사 작위를 계승 받아온 가문의 여식으로 그녀 역시 기사로 서임을 받아 현재 마를르남작의 첫째부인이자 렌시아 백작가의 여식이었던 마가렛 렌시아의 호위를 담당했었다.

그러다가 마가렛이 보두앵 마를르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녀와 함께 캐롤린도 마를르남작령으로 넘어오게 됐고, 그 후에 남작의 눈에 든 캐롤린이 마를르남작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출중한 실력을 가진 기사여서인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엘레노아역시 어려서부터 검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고, 만약 남자로 태어났다면 마를르남작가를 다시 한번 유명한 기사 가문으로 우뚝 세웠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셋째 부인의 딸이었던 데다 어머니인 캐롤린은 그녀가 괜히 재능을 뽐내다가 다른 이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는 것이 걱정되어 본격적인 기사의 길을 걷지 못하게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엇나가기 시작해서 이제는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취급받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르케 여신님이 다른 신들에 비해 자주 은혜를 베풀기는 했으나 성흔까지 내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만큼 여신께서도 눈여겨본 인재라는 거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이 아비가  말을 들어주었으니 이번에는 너도 내 말을 듣고 한번 만나보기라도 해라."

사실 그녀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흥미를 갖게 됐던 검술을 계속 연마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다른 귀족가의 부인으로 들어갈 경우 검을 손에서 놓아야 했기에 최대한 남자들과의 만남을 피해왔는데 결국 아버지인 보두앵의 지시에 의해 이전까지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영지의 끝자락에 위치한 에올론마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칼스인지 카를인지 맘에 안 들기만 해봐.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 말이야.'


마차에서 내린 엘레노아를 본 칼스는 말괄량이 여자아이가 잔뜩 얼굴에 힘을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귀족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는지 무표정을 고수하려 했는데. 애초에 그녀의 나이가 이제 겨우 15세에 불과해 오히려 귀여워 보이는 표정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분은 마를르남작님의 따님이시다.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 해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에올론마을의 촌장 자리를 맡고 있는 한센이라고 합니다."
"안녕? 엘레노아 마를르라고 해.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되어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곤란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런 작은 마을에는 아가씨를 모실만한 곳이 없어 불편을 겪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부분은 나와 함께 온 일행들이 알아서  것이니 그들의 요청에 잘 따라주길 바랄게. 그나저나  옆의 소년은 누구지?"
"이 아이는 제 막내아들인 칼스라고 합니다."
"그으래~? 이 아이가 칼스란 말이지. 내가 들었던 나이에 비해 덩치가  거 같은데..."

칼스는 아버지한센과 함께 루엠상단의 일행을 맞이하러 나왔는데. 막상 상단의 책임자로 왔던 제이콥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고,  여자아이 하나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자신을 품평이라도 하듯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칼스라고 합니다. 저에 대하여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궁금한 점? 궁금한 점이야 많지만 이렇게 밖에 계속 세워 둘 셈이야?"
"아!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지은 건물을 선보이려 했는데 그쪽으로 가시죠."

처음에는 제법 무표정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하던 엘레노아였으나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그 나이 또래 특유의 발랄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과는 별개로 한센은 잔뜩 긴장을 한 모습이었는데, 오히려 칼스는 아직 소녀의 순수함이 남아있는 엘레노아의 행동에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센은 다른 병사들과 상인들이 머물게 될 장소를 안내하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녀를 수행할 시녀인 에밀과 제이콥만이 칼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원래 칼스가 계획했던대로라면 자신과 제이콥이 건물로 들어서면 제니가 꿀차를 끓여서 가져다주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등장으로 인해 제니가 막 끓여서 들고 들어오던 차는 에밀의 선에서 저지되었고, 그녀는 미리 준비한 간식들과 꿀차의 상태를 살피더니 뭔가 마음에  드는지 자신이 직접 준비하겠다며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덕에 내부에는 제이콥과 엘레노아 그리고 칼스 셋만이 남게 되었다.

"저... 그럼 차가 준비될 때까지 잠시 이야기를 마저 나누도록 하죠."
"이야기? 아! 궁금한 게 있냐고 물었지?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한데 먼저 너 정말 올해 열두  맞아? 덩치로만 보면 두어 살은 더 된 거 같아 보이는데."
"제 나이는 올해 열두 살이 맞습니다. 요 몇 년 사이 훌쩍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이 마을에 해마다 들러와서  녀석이 자라는 모습을 봐왔습니다. 확실히 또래보다는 크지만 나이를 속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만 봐도 작년 겨울에 봤을 때보다 손가락 한두 마디는 더 자란 거 같군요."
'으음... 그럼 아직 한참 더 자랄 수 있다고 치면 체구만큼은 여느 기사들 사이에 둬도 모자라지 않겠는걸?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리자 엘레노아.'

엘레노아는 자신의 연인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라는 사실에 칼스를 좀  세밀하게 관찰했고, 일단 외견적인 부분에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그를 인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놀라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녀는 칼스가 그저 시골의 평범한 어린아이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 새벽마다 운동을 하며 가꿔온 그의 날렵하면서도 튼실해 보이는 체구가 제법 멋들어진 남자의 향기를 뿜어내자 호기심이 일게 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