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22/65)



〈 22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엘레노아의 복잡한 머릿속을 알 리가 없는 칼스는 그녀가 잠시 자기만의 생각에 잠긴 듯하자 시선을 제이콥에게로 돌려 이번 방문의 목적을 물어보았다.

"제이콥님도 오랜만에 뵈어요. 사실 조금은 더 시간이 지나야 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뭔가 일정이 바뀐 모양이죠?"
"하하. 어째 볼 때마다 훌쩍훌쩍 자라는 것이 조금만 지나면 밖에서 내가 올려다봐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아차! 왜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방문한 거냐고 물었지? 영주님께서 로열젤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서신을 네게 건네주라고 하시더구나."
"영주님이 제게 서신을요?"

제이콥은 품속에서 잘 봉인된 편지를 꺼내 칼스에게 건넸다. 칼스는 그런 서신의 겉면을 유심히 살피다가 제이콥을 향해 질문했다.

"여기서 당장 읽어야 하는 내용은 아니겠죠?"
"그걸 나라고  수 있겠느냐. 아마 엘레노아 아가씨라면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다만."
"그렇습니까?"


그때까지 머릿속에서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자라난 칼스가 자신과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검술을 겨루는 상상을 하던 엘레노아는 제 이름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스의 모습이 비쳤고, 그런 그와 망상 속의 남자가 겹쳐지는듯한 착각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다.

'미쳤어! 내가 어찌 저런 출신도 모르는 애를 두고 그런 생각을! 이게 다 쓸데없는 일을 벌인 아버지 탓이야!'


그때 마침 안쪽에 들어갔던 에밀이 다과 준비가 다 되었는지 작은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들과 꿀에 절여진 과일과 쿠키를 담아가지고 나왔다.

- 달그락

"죄송합니다. 조금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네요. 음?"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있는 모습에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져 다른 사람의 행색을 쭉 살펴보았다.

칼스는 아까부터 혼자서 표정이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엘레노아의 모습을 보며 아리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제이콥은 어느 정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보였으나 상인이라는 이들이 늘 그러하듯 자신의 내심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일단은 가장 편한 엘레노아에게 슬쩍 질문을 하기로 한 에밀이었다.

"아가씨 얼굴이 많이 달아올라 있습니다. 아직은 바깥이  쌀쌀하게 느껴지셨나 보네요. 여기에 소문대로 질 좋은 꿀이 많아서 제법 괜찮은 꿀차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작년에  과일을 잘 씻어서 꿀에 절여 둔 것이라 하더군요. 안에서 맛보았는데  맛이 달콤하니 아가씨의 입맛에도 꽤 잘 들어맞을듯합니다."
"그.. 그래? 고마워 잘 마실게."
"자. 제이콥씨도 한잔 받으시고, 칼스라고 했지? 네가 다 준비한 것인데 마치 내가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끓여낸 차이니만큼 맛있게 즐겨줬으면 좋겠구나."
"오~ 성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에밀씨가 타준 다과를 즐기게 될 줄이야.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에밀의 등장으로 잠시 어색해질뻔했던 내부의 분위기가 훈훈하게 바뀌었고,  틈에 칼스는 엘레노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레노아 아가씨. 혹시 이 서신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곳에서 바로 읽고 답해야 할 내용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내용이라... 으음. 뭐 별 내용 없을 거야. 나중에 우리가 돌아가면 그때 읽어봐도 돼. 혹시 글을 못 읽는 건 아니겠지?"
"아뇨 잘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쓰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됩니다."
"그래? 제법인걸? 이런 시골마을에서 글을 배우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촌장이다 보니  덕을 많이 봤을 뿐입니다."

엘레노아는 분명 그 서신에 자신을 칼스와 맺어주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있을 거라는 생각에 적어도 자신이 있는 동안에 칼스가  내용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옆에 조용히 서있던 에밀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가씨.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가씨와 제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조용히 해 에밀. 어차피 다 지나가면 없는 일이 될게 분명하니까."
"에휴. 아쉽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네요. 안 그래도 출발 전에 남작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사항이라서요. 남작님께서는 칼스와 엘레노아 아가씨의 혼담을 고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직접 자신의 부군이 되실 수도 있는 당신을 만나러 이곳까지 오게  겁니다."
"에밀!!"
"쿨럭.  커헉."

담담한 에밀의 말에 엘레노아는 화가 난 건지 난처해진 것인지 모를듯한 목소리로 소리쳤고, 이에 반해 칼스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막 한 모금 마시려던 꿀차에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반면 제이콥은 내심 이런 모습이 연출될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 마치 한편의 희극이라도 감상하듯 느긋하게 다과를 즐기며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기대까지 하는 눈초리였다.


"호... 혼담이라뇨? 제가 어찌 귀족가의 아가씨와 맺어질 수 있겠습니까."
"마. 맞아! 내가 왜 이런 시골의 그것도 나보다 어린애랑 결혼을 약속해야 하는데?"
"그래요? 그럼 남작님께 저번에 저번에 반려했던 텔로이먼 가문의 도련님과의 혼담을 추진해도 괜찮을 거라고 전해드릴까요?"
"그... 그건 좀. 그때 에밀 너도 봤잖아? 그 녀석의 음흉한 표정을. 그런 녀석이랑 맺어지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격정에 차올라 에밀에게 항의하던 엘레노아는 몇 달 전 마를르성에 찾아와 음흉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귀족가의 청년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쳐댔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아가씨께서는 언제까지 응석받이로 살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안에서 차를 준비하며 제니라는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바. 여기 이 칼스라는 아이는 비록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여신님으로부터 배운 지식을 허투루 쓰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영지 발전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 제가 그정도로 대단한일을 한건 아닌데요."

과한 평가에 슬쩍 그 사실을 부인해보려한 칼스였으나 에밀은 그런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뒤로 미룰  없는 시점에 다다랐어요. 아마 이번에 이것마저 엎어버리신다면 남작님께선 강제로라도 다른 귀족가의 자제와 결혼을 추진하실 겁니다."
"으... 이것도 결국 강제적인 거나 다름없잖아!"
"늘 아가씨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남편과 사는 게 싫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했을 때 그 어떤 귀족가의 자제보다도 칼스와 맺어지는 게 아가씨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 그런가? 확실히... 괜히 집안의 눈치를 봐야 하는 머저리들보다 얘가  편하긴 할  같은데."

엘레노아는 10년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온 에밀의 진심 어린 말에 다시 한번 칼스와의 혼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당혹스러운 것은 칼스였는데 이제  가게를 차려 뭔가 해보려는 차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에게 코를 꿰일 상황이  것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았을 때야 자신이 엘레노아보다 3살이나 어리다지만 지구에서의 삶을 살았던 그에게 엘레노아는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여고생뻘이 아니던가.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 선택권은 없는 건가요?"
"지금 설마 우리 아가씨와 혼담이 오고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혹시 이미 다른 혼처라도 정해져있다거나 한건 아니겠지? 분명 작년 겨울까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뭐야!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대체 얼마나 잘난 몸이기에 나를 거절하려 해?"
"아하하... 설마요. 영광일 뿐입니다."

잠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부남이 되는 것을 막아보려던 칼스는  여인의 표독스러운 눈빛 세례를 받고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생각하며 백기를 들어버렸다.

마지막 희망은 자신의 아버지인 한센이 이 혼담을 거절하는 것이겠지만, 요 근래 자신의 혼처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그의 행적을 보아 할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에밀은 에올론 마을에 도착하여 칼스와 만나게  그 순간부터 오랜 기간 자신이 모셔온 엘레노아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었다. 그녀는 이미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마를르남작으로부터 엘레노아가 칼스를 보고 큰 거부감을 느끼는  같아 보이면 혼담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하되, 만약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면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일단 내가 봤을  크게 문제가 될 거 같지는 않은걸? 게다가 상상했던 것보다 생긴 것도 잘난 편이고 체격도 상당한 것이 완전히 다 자라면 제법 인기를 끌겠는데.'


그녀의 생각대로 엘레노아역시 그의 외형적 부분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고, 시골마을 촌장의 아들이라는 출신 배경을 가진 것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그러나 차와 간식을 준비하며 그의 일을 돕고 있다는 제니라는 여자애에게 들은 정보들을 취합해 볼 때. 칼스라는 아이는 여건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위로 치고 나갈 수 있을 인물이라 생각됐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칼스와 혼약을 했을  엘레노아가 얻게  이점에 대해 어필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의도대로 엘레노아는 이제 진지하게 눈앞의 어린 남자를 자신의 남편감으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당장 이 자리에서 결혼 날짜까지 잡힐  같았기에 일단 이 부분은 아버지인 한센과 이야기를 해보겠다 말하며 한숨을 돌린 칼스였다.  후에야 겨울 동안 준비했던 물건들을 제이콥에게 선보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감도는 비누를 보여줬을 때는 엘레노아와 에밀역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흐음... 이 향은 레벤틸꽃의 향이네."
"작년에 시골마을에서  향료들을 잔뜩 사가  궁금했는데 이걸 만들려고 한 거군. 냄새는 아주 좋은데 품에 넣고 다니는 향낭 같은 건가?"
"이건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비누예요."
"향유 같은 거라고? 물에 그렇게  풀릴 거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엘레노아는 들고 있던 비누에서 나는 향기를 맡아보다가, 그것이 귀족들이 목욕을 할 때 물에 풀어쓰는 향유와 비슷한 것이란 칼스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통째로 물에 풀어서 쓰는  아니고요. 잠시만요 시범을 보여드릴게요."


칼스는 미리 준비해둔 물이 담긴 쟁반에 손을 적신 후 적당한 비누거품을 내어 손을 씻어내는 시범을 보였다. 그러자 상인으로서의 호기심이 작동했는지 제이콥이 다가와 직접 손을 씻어보았다.

마침 그는 마를르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사이 손이 제법 지저분해져있었는데 비누를 사용하자 평소 같았으면  번을 힘주어 문질러내야 닦이던 땟자국들이 쉽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이건 훌륭하군. 이것도 여신님께서 알려주신 지혜인가?"
"아뇨. 이건 제가 생각해낸 상품이에요. 제이콥 씨도 알다시피 원래는 이게 냄새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 빨래할 때나 사용하던 건데. 만들 때 최대한 냄새를 덜나게 하고 향료를 썼더니 제법 그럴싸한 물건이 나와서 판매해볼까 해서요."

칼스는 괜히 또다시 여신의 이름을 팔았다가 세간에 아르케 여신의 대리인 같은 모습으로 낙인찍힐까 봐 비누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라 소개했다. 이미 이곳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물건들이 이미 존재했고, 이것은 그저 그런 것들을  단계 더 발전시킨 형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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