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23/65)



〈 23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제이콥씨. 제가 잠시 확인해봐도 될까요?"
"에밀씨가 살펴보시는 게 좀 더 확실할 거 같군요. 저야 이런 용품과는 거리가 있는 장사치라서요."
"그럼 잠시만 실례하죠."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에밀이 제이콥으로부터 레벤틸향 비누를 건네받았고, 그녀는 냄새를 맡아보고, 물에 젖어 미끈함이 느껴지는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놓았다.


"이건 삭힌 오줌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군요."
"사.. 삭힌 오줌이라구?!"
"아가씨는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보통 큰 이불이나 천에 묻은 때를 벗겨낼 때 삭힌 오줌을 사용하면 훨씬 잘 빨아진답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냄새도 거의 안 나고요."
"윽! 그럼  이불도 그걸로 빨았던 거야? 세상에!"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을 현실을 알게 된 엘레노아가 충격에 빠져있을 때. 칼스는 에밀에게 비누의 원료가 삭힌 오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 비누를 만들 때 쓴 재료에 오줌은 안 들어갔어요. 가축에게서 얻은 기름과 물에 잘 개어낸 잿물을 사용해서 만들었죠."
"아하. 그렇군. 게다가 향료를 사용해 이런 향기까지 내다니. 이 물건에서만 나는  아니라 씻고 난 후에 손에서도 약간의 레벤틸 향이 나는 것이 모양만 좀 더 다듬으면 제법 괜찮은 상품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제이콥에게 비누를 귀족들의 식사 전후에 손을 씻어내는 물과 함께 내놓으면 호평을 얻을 거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칼스는 위생적인 부분까지 짚어줄까 하다가 아직 이 세계에선 세균과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로열젤리에 이어 이런 신기한 물건까지 만들어내다니. 영주님께서 괜히 아가씨와 혼인으로 엮으려 하는 게 아니군그래. 비누라고 했지? 이 물건의 가격은 얼마 정도인가."
"지금 들고 있는 것 세개에 은화 1닢은 받아야 해요. 원료가 동물의 기름인데다 향료까지 들어가서 비싸졌거든요."
"세개에 은화 1개라... 제법 비싸긴 해도 귀족가에 소문만 잘 난다면 그  배의 가격에도 팔리겠지. 일단 이 부분은 크리스티안님께 직접 이야기해보마."

예전 같았으면 그냥  자리에서 가격을 정해 매입했겠으나. 만약 칼스가 정말로 엘레노아와 맺어지기라도 한다면 단순한 거래처 이상의 존재가 될  있으므로 상단주이자 영지 재무관인 크리스티안 루엠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그런 그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칼스는 자신이 준비한 카드  하나인 비누가 꽤 괜찮은 평가를 받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다 마무리되어갈 때쯤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며 한센이 그들 모두를 집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한센을 비롯한 칼스의 가족들은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네? 우리 칼스를 영주님의 따님과 약혼시키겠다고요?"
"지금 이곳에 와계시는 엘레노아 마를르아가씨가  당사자이네. 사실 칼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가씨께서도 직접 만나보시더니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야."
"멋대로 착각하지 마 제이콥. 나는 그저  녀석과 결혼을 약속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방해받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응하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어디까지나 약혼이지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제이콥의 말에 칼스의 가족들이 자기도 모르게 엘레노아를 빤히 바라봤고, 그런 그들의 시선에 살포시 이마를 찌푸린 그녀가 툴툴거리면서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칼스와의 혼약에 대한 거부감은 내비치지 않자 한센은 다시 한번 제이콥에게 물어보았다.

"제이콥 님. 하지만 저희 집안은 비록 촌장 집을 맡고 있기는 하나 영주님의 사위로 들어갈 만큼 뼈대 있는 집안은 아닙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하네. 어차피 칼스는 아르케 여신님께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분에게서 성흔까지 받은 이상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몰지각한 이들은 없을 것이네. 게다가 가족이라면 이 아이가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을 더더욱  알지 않을까 싶네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야  손을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겠죠. 다만 아직 칼스의 나이도 어린 데다 형인 케인이 올해 결혼을 하니만큼 그 시일을 좀 여유 있게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나와 아가씨가 돌아가서 남작님께 잘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단 칼스와 엘레노아의 약혼 일자는 차후에 마를르남작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명확히 하기로 했다. 준비된 식사를 마친  에밀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갖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신은 허니의 별실에 엘레노아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자 그럼 저는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앞으로 약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귀족가의 여식을 외간 남자와 단둘이 머물게 할 수는 없었기에 별실에는 에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꼬맹이 하나를 내가 못 당해낼까 봐 같이 있겠다는 거야?"
"꼭 남자가 여자를 해코지하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괜히 아가씨께서 앞으로 자신의 말을  들으면 어찌어찌해버린다며 협박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런 방법이 있어... 아니! 그런 짓 할 생각 없었대도? 어휴 말을 말지."

잠시 에밀과 티격태격하던 엘레노아는 아까부터 자꾸만 한숨을 내쉬는 칼스를 향해 물었다.

"칼스라고 했지? 아까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던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데? 막말로  같은 애가 나정도 신붓감을 얻으면 입이 귀에 걸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왜 한숨이 나오는 걸까요."
"자. 너도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알겠지만. 너나 나나  약혼에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이거든? 그러니 앞으로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자기소개나 좀 해보자. 최소한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알아야 할 거 아냐."


엘레노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엘레노아 마를르야. 아버지는 너도 잘 알고 있는 보두앵 마를르남작이고 어머니는 캐롤린 마를르지. 아버지의 셋째 부인이셔. 태어난 건 왕국력 893년 9월이고 올해로 열다섯이 됐어. 취미는 검술! 사실 솔직히 말해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지만 내가 너와의 결혼에 반대하지 않는 건 너라면 내가 결혼 후에도 검술을 익혀도 막지 못할  같거든. 이 정도면 대충 됐나? 자 이제 네 차례야."

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하며 말하는 엘레노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칼스예요. 성은 없고 아시다시피 이곳 에올론마을의 촌장인 아버지 한센과 어머니 안나사이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난 해는 왕국력 896년이고 올해 열두 살입니다. 취미는... 딱히 없네요. 아!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취미라면 취미일지도 모르겠어요."
"여신님한테서 벌 키우는 걸 배웠다면서? 그럼 넌 직접 여신님을 만났다는 거잖아? 아르케 여신이면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신인데 정말로 그래?"
"음... 확실히 엄청 아름답긴 했어요."
"부럽다... 나도 투르님께 은혜를 입었으면 검술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칼스는 엘레노아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정말로 검술을 익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애들이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데 그녀는 에올론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차림새였었다.

"엘레노아 아가씨는..."
"엘레노아"
"네?"
"엘레노아라고 불러. 가족들이 나를 편히 부를  쓰는 별칭은 따로 있지만 그러긴 아직 이른  같고. 아가씨 소리를 듣자니 너무 남남 같잖아? 음~ 이거 맛있는데?"


엘레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간식거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엘레노아는 그럼 뭐 때문에 검술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
"아~! 그건. 우리 어머니가 한때 엄청 실력 있는 기사였거든. 사실 어머니는 지금의 큰엄마.  아버지의 첫째 부인인 마가렛 마를르의 호위기사셨어. 큰어머니의 본가가 왕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집안인 렌시아백작가임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지. 그런 가문의 영애를 보호하는 기사로 서임된 거니까."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치~? 어머니는 그 후에도 기사로 활동하시다가 어쩌다 보니 아버지랑 사랑에 빠져서 셋째 부인으로 들어가게  거야. 그리고 나를 낳게 되면서 기사로서의 꿈은 접으시게 된 거지. 그러다가 내가 아직 어렸을 적에 한번 오랜만에 검을 휘두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는데.."
"봤는데?"
"한눈에 반해버렸지 뭐야.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청혼을 했을지도 몰라. 아! 아버지가 그래서 어머니를 꼬셔서 부인으로 삼은 건가? 뭐 그 후로 어머니를 졸라서 기본적인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지. 근데 부모님은 내가 검술을 배우는데 못마땅하신 모양이야. 자꾸만 신부수업을 받으라고 하고, 관심도 없는 무도회에 나가서 남자들이랑 춤추라고 한다니까? 뭐 이제는  핑계 대고 거절하면 되겠지만 말야. 아하하핫!"

자기가 말해놓고도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트리는 엘레노아였고, 칼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여타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를  없단 사실에 완전히 긴장을 풀기로 했다. 사실 알게 모르게 귀족가의 여식을 상대한다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엄마처럼 멋진 여기사가 될 거야. 원래는 그다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꼬셔서 결혼하려 했는데 그건  힘들겠네 이제."


천연덕스럽게 자기는 기사가 된  맘에 드는 남자를 꼬셔 결혼하려 했다 말하는 엘레노아의말에 칼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이런. 죄송하게 됐네요. 저같이 어린 꼬맹이와 결혼을 약속하게 됐으니 말이에요."
"흠... 뭐 아직  자라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완전히 망한 건 아니지 않나 생각 중이야. 적어도 자기  관리도 못하면서 그저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배불뚝이 녀석들보단 백 배 낫지."
"하하하. 앞으로 열심히 몸을 관리해야겠네요."


엘레노아는 자신의 앞에서 표정을 드러내는 칼스의 모습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는 걸 눈치채고 가벼운 어조로 질문했다.

"자. 그럼 우리 어린 예비남편께선 앞으로 자라며 어떻게 살아갈 거라는 구상을 해본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음... 일단  근사한 계획 같은 건 없었어요. 그저 여신님이 제게 주신 기회를 활용해 가족들이 모자람 없는 생활을 하게 하고, 그 후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끔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죠."
"그게 뭐야. 그건 네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게다가 네 형이 차기 촌장이 될 거라면서?"
"뭐 굳이 제가 촌장이 아니라고 못할 일도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저와 가족들이 우선이고  후에 여력이 남는다면 그렇게 한다는 거니까요."
"흐흥... 신기한 아이로구나 넌. 생각하는 게 보통의 아이들과는 좀 다른 거 같아. 그치 에밀?"
"그렇습니다. 마치 오랜 교육을 받은 귀족가의 자제를 대하는 기분입니다."

에밀리아는 칼스의 답에 약간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있는 에밀에게 되물었다. 에밀 역시 태어나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내놓을법한 답변을 하는 칼스에게 호기심 어린 표정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것까지 알아채고 나를 너와 엮으려 하신 건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좋아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녀석은 아니라는 말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결혼하게 되면 너는 네 의지와 상관없이 이 에올론 마을이 아닌 마를르 영지를 위해  재능을 써야 하게 될 거야."
"괜찮아요. 제 생각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그 정도 여유는 될 거 같거든요."
"꼴에 남자라고 폼 잡기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칼스가 말하자. 왠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낀 엘레노아는 애써 그런 감정을 무시한  말을 얼버무렸다. 에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후로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자리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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