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24/65)



〈 24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엘레노아와의 만남이었으나 대화가 끝나갈 무렵엔 나름 대화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칼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품에 넣어둔 마를르남작의 서신을 확인해보기로 한 그는 어두워진 방에 촛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잘 봉인된 서신을 풀어 읽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내 딸아이의 방문에 놀랐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냥 장난삼아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님을 알아두도록 해라.

네가 지난가을에 내게 선물해 주었던 로열젤리라는 물건이 왕도에서 생각보다 더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본인 또한 이 정도로 큰 소란이 일어날 줄은 몰랐으나 이렇게 된 마당에 너를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분명 욕심에 눈이 먼 놈들의 표적이 될 터. 아르케 여신님의 안목을 믿고 내 딸을 기꺼이 네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욕심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너를 통해 우리 영지를 살찌울 자금을 확보할 것이고, 너는 나를 배경 삼아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면 되는 것이지.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녀석이 내 딸을 거부하고 나의 호의를 걷어찬다면 그때는 나도 지금과 같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 것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하거라. ]

전체적으로 칼스를 대우해 주는 문체로 쓰여있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서신을 모두 읽은 칼스는 애초에 이번 약혼 건이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성격의 제안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있었고, 내심 엘레노아가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아이임에 안도하며 자리에 누웠다.

* * *

다음날 새벽이 밝아올 무렵 에밀은 늘 그래왔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밤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적당한 온기가 남아있는 벽난로의 불씨를 점검한 그녀는 슬슬 엘레노아를 깨울 시간이 됐기에 그녀가 잠들어있는 방의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으응... 알았어."
"저는 내려가서 아가씨께서 수련할만한 장소가 있는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고마워 에밀."

큰 문제가 없는 한 이른 아침에 검술 수련을 빼먹지 않는 엘레노아였기에 에밀 역시 그런 그녀의 생활패턴에 맞추어 움직였고, 오늘은 평소와 달리 영주성내의 연무장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마을 내에서 다른 이의 시선을 받지 않으면서 충분한 공간이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허니의 건물 밖으로 나온 그녀는 아르덴 대삼림과 가까이 있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좀 더 청량함이 느껴지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라? 저 아이는 칼스 아닌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뭘 하는 거지?"


에밀은 어제 미리 점찍어두었던 상점 앞 공터에서 하얀 입김을 연신 내뿜으며 처음 보는 체조를 선보이고 있는 칼스를 발견하고는 놀라워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엘레노아도 주변 사람들에게서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칼스는 그런 그녀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소처럼 체조를 하며 몸을 풀던 칼스는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밀씨도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시나보네. 하긴 저래 봬도 귀족가 영애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사람이니까 부지런한 건 당연하겠지.'


칼스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계속해서 체조를 이어나갔고, 에밀 역시 그런 그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엘레노아에게 향했다.


"어때? 밖에 적당한 장소는 찾아봤어 에밀?"
"네. 장소는 확인했는데..."
"했는데?"
"칼스가 이미 그 자리를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에엥?  시간에? 혹시 어제 내가 이동하느라 피곤한 거 같아서 늦게 깨운 건 아니지?"
"이제 막 해가 뜨고 있는 시간이니 평소랑 크게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아가씨."
"신기하네. 보통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한참 잠에 빠져있을 시간이 아닌가?"

에밀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런 생활을 해온 엘레노아가 하는 말에 '그건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되물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엘레노아는 칼스가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와 뭔가를 하고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재빨리 옷을 차려입기 시작했는데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끈으로 묶어 정리한 후 늘 몸에서 떼지 않는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 건물을 나섰다.

칼스는 이제 막 체조를 마무리하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마을 안을 한 바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칼스! 새벽부터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어? 엘레노아 아가씨. 이 시간엔 웬일이세요?"
"엘레노아라고 부르라 했지?"
"아. 엘레노아. 음. 매일 아침마다 체조를 하고 마을 한 바퀴를 뛰는 게 습관이라서요. 그나저나 엘레노아도 엄청 부지런하네요 아까 에밀씨도 보이는  같았는데."
"정말? 나도 매일 동이 틀 무렵에 검술 수련을 하고 있거든. 어머니께서 자신이 항상 그렇게 해왔다고 말씀하셔서 말이야. 흐음... 그랬구나! 그래서 몸에 군살이 별로 없는 거였어.  제법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엘레노아는  오랫동안 이어진 체조로 인해 흘러나온 땀과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칼스를 훑어보며 꽤나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몸  풀고 싶은데 이곳을 좀 사용해도 될까? 아무래도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보니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말이야. 게다가 여기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이고."
"아. 네. 저는 이제 마을을 한 바퀴 뛰고 올 거라 마음껏 사용하셔도 돼요."
"오~! 뜀걸음까지 하는 거야? 대단하네.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좋아하시겠어."
"하하하."
"그럼 어서 다녀와. 아직 추운 날씨인데 땀이 식으면 위험하잖아?"
"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온몸에 배어 나온 땀들이 식으면서 슬슬 한기를 느끼려 하던 차였기에 칼스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는 늘 해왔던 코스를 따라 뛰어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엘레노아는 안면에 미소를  채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흐응...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걸? 아버지 알고서 저를 이곳에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녀석이라면 함께 지내는 게 심심하지는 않을 거 같네요."

그가 마을 건물들 사이를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자 검을 뽑아든 엘레노아는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검술 수련을 시작했고, 이제 막 떠오른 햇빛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만족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칼스는 평소와 같은 코스를 밟으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았고, 이내 다시금 출발했던 공터에 다다를 때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에 천천히 속도를 줄여 그 안을 들여다보니 엘레노아가 검술 수련에 한창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격하게 움직였는지 그녀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녀 역시 칼스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의 존재를 확인했기에 마지막으로 힘차게 검을 한번 휘두르곤 허리춤의 검집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공터 한편에서 대기하던 에밀이 그녀에게 땀을 닦을 수건을 건네줬고, 그녀는 이마에 난 땀방울을 닦아내며 칼스에게 다가갔다.


"후후. 너도 제법 땀을 흘린 모양이네. 아침에 흘리는 땀방울이야말로 하루를 상쾌하게 만드는  같아. 안 그래?"


칼스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소녀의 풋풋한 땀내 섞인 체취에 살짝 얼굴이 상기되는듯한 느낌을 받았고, 엘레노아 역시 아직은 어린아이일 뿐이라 여겼던 칼스에게서 묘한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어... 음! 그렇죠! 역시 운동은 이 시간에 해야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하루 일과도 훨씬  편해지니까요."
"그치? 아쉽네... 조금만 더 덩치가 컸으면... 아! 아냐 이건 그냥 해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출출한데 아침식사나 하러 가볼까?"


잠시였지만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한 둘은 약간은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오직 에밀만이 그런 풋풋한  사람을 보며 미소 지었다.


* *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아침식사를 마친 칼스는 여느 때처럼 벌통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런 그의 곁에는 엘레노아와 에밀, 그리고 제이콥이 함께하고 있었다.


- 부우우우우웅!!


"오! 확실히 작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벌통의 수가 늘어났군."
"세상에...  새카맣게 날아다니는 게  벌이라구? 저... 저기! 저 사람들 위험한  아니야? 벌들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잖아."
"아가씨! 조심하세요. 위험합니다."


엘레노아는 칼스가 벌을 쳐서 꿀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가끔 꽃밭을 거닐  한두 마리씩 나타나는 벌들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양봉이 이루어지는 곳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수 없이 많은 벌들이 벌통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런 벌떼들 사이엔 뭔가 연기를 내뿜은 물건을 들고 다니는 제니와 잭이 있었다.


"벌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먼저 공격적으로 달려들지 않아요. 그래도 일단 처음이니 가까이 오지는 말고 이쯤에서 구경하세요."
"설마 칼스 너도  안에 들어가는 거야?"
"당연하죠. 벌을 키우는 사람이 벌에게 가까이 안 가면 그게 무슨 농담 같지도 않은 말이에요."


새벽녘부터 당차게 칼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던 엘레노아의 모습은 정말 든든해 보이기까지 했었는데, 벌들 앞에서 여느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에 왠지 모를 미소를 지은 칼스는 성큼성큼 잭과 제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칼스! 혹시 저분이 예의 그 영애님이셔?"
"응. 마를르남작님의 딸이야. 엘레노아라고 해."
"세상에! 설마 그럼 아침에 마을에 돌던 소문이 사실인 거야?"
"무슨 소문?"

어제 엘레노아가 루엠상단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사실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추측해보기 시작했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엘레노아와 칼스의 약혼설이었다.


"영주님이 네 재능을 높이사서 자기 딸과 너를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어... 음. 아직 확정된  아니야. 자! 일하자 일! 아직은 기온이 낮으니까 벌통을 너무 오래 열어두면 안된다는 거 잊지 말고!"


뭔가 확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리려 하는 칼스의 반응에 두 남매는 이 소문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저 멀리서 인상을 쓰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아를 의식하게 됐고,  결과 평소보다  빠릿빠릿한 몸놀림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