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칼스는 두 사람이 각기 제 할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벌통 하나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벌집의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흐음 여기는 벌써 꿀이 꽤나 들어찼네. 어디 보자... 이 꿀은 레벤틸 꽃에서 나오는 건가? 향도 꽤 좋은 꽃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꿀도 많이 나오네."
레벤틸꽃은 진달래와 라벤더를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 꽃이었는데.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들 중 하나로 그 향이 좋아 퀴퀴한 냄새를 없애기 위한 천연 방향제로도 쓰였다.
칼스 역시 이러한 레벤틸 꽃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으나 향이 좋다고 하여 꿀을 많이 산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큰 기대를 하진 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채산성이 높은 꽃인 듯 보였다.
"칼스! 괜찮아? 나도 그쪽에 한번 가봐도 돼?"
"아가씨! 제정신이신가요? 저 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시겠다고요? 안됩니다!"
"왜? 저기 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 그건 저들은 벌들이랑 친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한참을 멀리서 구경하던 엘레노아는 칼스를 비롯한 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쪽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용기가 생겼는지 직접 들어와 구경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당연히 그녀의 곁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에밀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제지했는데 엘레노아는 그런 에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음. 이게 완전히 안전하다고 하기 힘든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에이. 검술 수련하다가 다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여차하면 신전에 가서 치유받으면 되니까 걱정 마."
'으음... 그랬다가는 저는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작살이 날 텐데요?... 그나저나 상황을 보니 저 고집을 꺾는 게 쉽진 않을 거 같은데...'
칼스는 그런 그녀가 괜히 벌통들 사이로 들어왔다가 얼굴 같은 곳을 쏘이면 이래저래 시끄러워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비교적 규모가 작은 끄트머리에 있는 벌통으로 다가간 뒤 그 주변에 최대한 연기를 뿜어내어 벌들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엘레노아를 불러들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대신 급하게 오지 말고 천천히 걸어오시고. 바닥에 혹시 벌이 있으면 밟지 않게 조심해요."
그의 말에 한껏 긴장한 표정을 지은 엘레노아가 조심스럽게 벌통으로 다가왔고, 다행히 그렇게 벌들이 흥분하지는 않아 무사히 칼스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잠시만요. 이 연기를 몸에 좀 쐐야 애들이 공격적으로 달려들지 않거든요? 냄새가 독한 편이니까 잠깐 숨 참고 있어요."
"아... 알았어."
그녀는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에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고, 칼스는 그런 그녀의 몸 주변에 훈연기 역할을 하는 반합을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쑥 냄새를 풍겨댔다.
"이제 됐어요. 벌집에 손은 대지 말고 그냥 눈으로만 보세요. 아무래도 직접 만지다 보면 손 같은 곳에는 벌에 쏘이기 마련이니까요."
"응. 콜록! 이거 냄새 엄청 독하구나."
난생처음 맡아보는 말린 쑥을 태운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엘레노아는 곧 자신의 앞에서 칼스가 들어 보인 벌집의 모습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판의 가운데엔 벌들이 양면으로 빼곡하게 붙어있었는데, 그 수가 족히 수천 마리는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벌집인데요. 후우우! 여기 벌들 사이 안쪽에 보면 애벌레를 키우는 방들이 있어요. 요 작은 칸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집과 같은 거죠."
"으윽! 벌집에 벌들이 많다곤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여왕벌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여기에는 없는 거 같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기로 하고."
아무래도 벌들이 드글거리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는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는 엘레노아의 반응을 본 칼스는 들고 있던 벌집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꿀과 꽃가루들이 채워진 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자... 이건 꿀이랑 꽃가루가 들어있는 벌집이에요."
"오. 여기에는 벌이 그렇게 많이 붙어있질 않네? 게다가 그 칸에 반짝이는 물 같은 게 다 꿀이라는 말이지?"
"네. 얘들이 비록 작은 벌레이긴 하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하고 비슷할 정도거든요. 어른 벌들은 애벌레들이 잘 자랄 수 있게 육아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 같이 먹을 식량을 이렇게 한곳에 모아두는 거죠."
"신기하네. 근데 꿀은 보통 이렇게 세워두면 흘러내리지 않아?"
"꿀 자체에 어느 정도 점성이 있어서 이 정도로 흐르지는 않아요. 게다가 이 녀석들이 한 칸에 꿀이 꽉 찼다 싶으면 날갯짓으로 바람을 내서 입구 부분의 꿀을 굳혀버리죠. 그럼 이 아래처럼 밀봉되는 거예요."
"아! 그럼 아래쪽에 저 막힌 방들은 꿀이 가득 차 있는 거네?"
"그런 셈이죠."
엘레노아는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벌집의 형태에 놀라워했다. 칼스는 꺼낸 꿀이 반쯤 담긴 벌집을 다시 집어넣지 않고, 나머지 판들만 정리하여 벌통을 닫은 후 그것을 들고 제이콥과 에밀이 대기 중인 곳으로 빠져나왔다.
에밀은 엘레노아가 겁도 없이 벌집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을 보며, 차마 자신은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내 자신을 향해 두 사람이 되돌아오자 재빨리 엘레노아에게 다가가 혹시나 벌에 쏘인 곳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아가씨! 어디 벌에 쏘이거나 하지는 않으셨나요?"
"응. 생각보다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던데?"
"휴...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곳에 직접 들어가는 일은 삼가주세요. 그리고 칼스도 그런 곳에 아가씨를 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 엘레노아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 에밀은 비난의 화살을 칼스에게로 돌렸고, 그는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에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묵묵히 그녀의 잔소리를 감내했다. 그때 그런 그를 구원이라도 해주듯 제이콥이 다가왔다.
"벌써 일이 마무리된 건가? 전보다는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리는군그래."
"아. 요새는 저기 보이는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일을 처리해 줄 수 있게 됐거든요. 며칠 정도는 맡겨놔도 괜찮아요. 저번에 마를르 성에 방문했을 때도 저 두 사람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는걸요."
"호오... 그 말은 이런 벌통을 다른 지역에도 만들고 운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네. 맞아요. 적당한 교육을 받고 주변 환경만 맞춰진다면 벌을 키울 수 있겠죠? 안 그래도 이 벌 키우는 걸 전문으로 하는 상단을 만들어 키워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그게. 저 허니라는 곳인가 보군."
제이콥은 칼스의 말에 마를르성에서도 직접 꿀을 수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칼스가 그것을 자신들의 주력 상품으로 내걸 거라는 말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아는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오직 칼스가 손에 들고 온 꿀이든 벌집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칼스. 이거 꿀을 받아내려고 가져온 거지?"
"네.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보니까 레벤틸 꽃에서 모은 꿀같은데 요리할 때 쓰라고 가져가볼까 해서요."
그렇게 말한 칼스는 공터 한편에 마련된 여러 도구들이 놓여있는 곳으로 다가가 작은 칼을 들고 벌들이 봉해둔 뚜껑 부분을 뜯어냈다. 그러자 안에 고여있던 꿀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칼스는 흘러내리는 꿀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작은 단지를 가져다 두었다.
- 주르르르르륵
"우와아..."
"이 작은 판 하나에서 이만큼의 꿀이 나오는 건가? 저 벌통 하나에 몇 장 정도가 들어있는 거지?"
"지금은 벌집 하나 당 둘에서 셋 정도인데 여름에는 많이 늘어나서 많으면 10장 이상도 들어가게 되죠. 그땐 벌통도 더 늘어날 거예요."
"확실히. 작년에 네가 했던 말대로 그때의 곱절 이상은 나오겠구나. 영주님이 아주 좋아하시겠군. 아! 그 로열젤리라는 것은 어디서 얻는 것이냐?"
"그건 비밀입니다. 나름 얻는 방법이 까다로운 데다 잘못하면 벌집을 통째로 망칠 수 있거든요."
은근슬쩍 로열젤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보려 했던 제이콥이지만 칼스의 칼 같은 답변에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작은 벌집에 모여있던 꿀들이 대부분 흘러나왔고, 칼스는 비어버린 벌집을 한편에 놓아두고는 방금 떠낸 꿀이 담긴 단지를 들고 말했다.
"자. 그럼 이 꿀을 맛보러 돌아가 볼까요?"
"응! 에밀! 점심에는 빵을 좀 구워서 먹어보지 않을래? 저 꿀에 찍어 먹으면 맛있을 거 같아."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엔 빵을 중심으로 한 식사를 마련해보도록 하죠."
그 후 점심 식사때엔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갓 구워낸 빵에 달콤한 꿀을 찍어 먹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루엠상단과 허니상단간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제이콥은 일단 허니상단이 마를르남작령내에 세워진 만큼 그들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허니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품에 대해 세금이 부여될 거다. 영주 님의 생각대로 네가 엘레노아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면 그 세율이 조금 낮아지기는 하겠지."
"뭐. 세금이야 돈을 벌면 내는 거니까요. 그런데 저희 상단이 점점 성장해서 마를르영지가 아닌 다른 영지나 국가에 물건을 판매하게 될 경우엔 어찌되는 거죠? 지금은 루엠 상단에 그 권한이 다 몰려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칼스는 자신이 상단을 만들어 운영하게 될 경우 루엠상단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콥은 그런 칼스의 걱정에 딱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며 답했다.
"그때 가면 다시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아마 내야 할 돈만 잘 낸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대신 최소한의 물량은 우리 루엠상단에 지속적으로 넣어줘야 한다는 조건은 붙겠지. 사실 영주님 입장에서는 루엠상단 외에 다른 상단이 영지 내에서 성장해 외부의 돈을 끌어들여준다면 기뻐하면 했지 반대는 할 이유가 없거든. 현실은 당장 우리 상단에서도 외부에 판매할 물건이 거의 없다는 거지만. 그래서 네가 작년에 꿀과 로열젤리라는 물건을 가져다줬을 때 영주님과 재무관이신 크리스티안님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를 거다."
애초에 루엠상단은 많은 생필품들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마를르영지내에 외부지역의 상단이 들어와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대 마를르남작이 직접 자신의 측근에게 지시해 만든 곳이었다.
실제로 마를르남작령이 처음 정착을 시작한 초기에는 마를르남작가의 사재를 털어 각종 자재와 식량을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고, 이제 겨우 어느 정도 영지가 안정화되어 각종 세금을 통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만약 크리스티안 루엠이나 마를르남작이 축재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이대로 영지 내 상권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뽑아내려 했겠지만. 칼스에겐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이득보다는 영지의 발전에 좀 더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