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상단의 창설과 뜻밖의 방문자
제이콥의 이야기를 들은 칼스는 우려했던 것 한 가지가 덜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말했다.
"휴~ 사실은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더 열심히 상단을 키워나가야겠다는 욕구가 샘솟는데요? 나중에 허니상단이 루엠상단보다 더 커져도 너무 미워하면 안 돼요."
"하하하. 그래 일을 시작할 땐 항상 큰 목표를 지녀야 하는 법이지. 그나저나 네가 만든다는 그 상단은 역시 꿀을 주력상품으로 내걸겠지?"
"아무래도 당장은 꿀이 주 판매품이 되겠죠. 로열젤리는 남작님이 보내주신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할 때 함부로 밖에 내돌릴 물품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거기에 어제 선보인 비누 같은 물건도 함께 팔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비누라... 어제 보여준 그 작은 덩어리 세 개에 은화 1개의 값을 매길 거라고?"
"원료인 동물 기름을 얻으려면 가축을 잡아야 하니 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거든요. 거기에 또 향을 입히기 위해 들어가는 향료의 값도 만만치 않고요. 향을 조금 포기하면 생산가격이 좀 내려가긴 할 텐데 차라리 그럴 바에 좀 더 고급스러운 향을 추가해서 돈 많은 사람들한테 비싸게 파는 게 낫겠더라구요."
제이콥은 칼스의 말에 아직 제대로 된 사업을 시작도 안한 소년이 이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부유층을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칼스가 말한 대로 값싼 물건을 만들어 하위계층에 아무리 많이 팔아봐야 큰돈을 만질 수가 없었다. 이 시대의 부의 거의 대부분은 극소수의 귀족 및 상인 계층에게 몰려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품위를 빛내줄 물건들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금화를 쾌척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내가 그 부분에 대한 조언을 해주려 했는데 딱히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네가 만든 그 비누라는 것은 그 생산량이나 단가를 생각해 봤을 때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하기 힘든 물건이다. 그렇다면 아예 고급화를 시켜서 귀족들에게 판매하는 게 정답이지."
"그래서 이번에 만든 비누들을 영주님이랑 마를르영지내의 귀족분들에게 나눠주려고요. 일단 써봐야 이게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만약 좋다고 입소문이 퍼지면 그 후에 값을 적당히 매겨 판매를 시작해도 될 거 같거든요."
"그 비누라는 상품들을 공짜로 뿌리겠다고? 그 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아직 제대로 된 판로조차 없는 상황에서 값이 만만치 않은 비누를 무료로 나눠주겠다는 칼스의 말에 제이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채 물었다.
"네. 그래서 이번에 루엠상단에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이번에 가져갈 비누는 아니고, 다음번에 좀 더 개량된 물품이 나오면 다른 영지에 상행을 갈 일이 있을 때 가져가 주셨으면 해요."
"거기서도 귀족들에게 선물로 주려는 거냐? 그런데 아쉽게도 상행을 갈 때 나나 단장님이 직접 간다 한들 높은 직위에 있는 이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어서 네가 원하는 효과는 얻기 힘들 텐데."
"그렇다면 그곳에서 주로 귀족들을 상대하는 이들에게 나눠주세요. 예를 들면 고급창관에서 일하는 작부들 같은 사람들에게요."
"허~! 어린 녀석이 별걸 다 알고 있군. 알겠다 일단 가져가서 상단주님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마."
칼스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자신이 만든 비누를 홍보하고, 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을 때 비싼 값에 판매한다는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원래 한국에서 벌집에서 나오는 프로폴리스라는 성분이 포함된 비누를 판매할 때에도 각종 맘카페나 블로그 등에 샘플 상품을 선물로 보내고, 그들의 리뷰를 통해 판매량을 늘렸던 방식을 이 시대에 맞게 개량해 사용한 것이다.
다만 칼스가 지금 만들어둔 비누의 경우 아직까지 그렇게 큰 홍보효과를 이끌어낼 만큼 뛰어나지 못하다 느꼈기에 색과 향을 좀 더 고급스럽게 개량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 다음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에는 칼스가 직접 만든 물품이 아닌 에올론 마을에서 나온 각종 물품들에 대한 거래를 허니 상단을 통해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제이콥은 어차피 이곳 마을까지 오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게 차라리 이득이라는 생각에 긍정적으로 검토해본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 마을의 물품을 판매하려면 네가 만든 상단에서 물건을 가지고 성까지 오가야 할 텐데. 그럴 인력은 준비되어 있는 거냐?"
"아직은 없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필요한 사람들을 구해볼 생각이에요."
"흠... 이런 시골마을로 올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을 구할 때 나를 찾아오면 쓸만한 이들을 소개해 주마."
"그럼 감사하죠."
"그리고 아까 아침에 이 마을 말고도 다른 곳에 벌통을 설치하고 관리할 인원을 파견할 수 있다고 했지?"
"그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녜요. 당장에 저도 그렇고 아침에 본 두 사람도 완전히 이 일에 적응한 게 아니니까요. 적어도 몇 년은 지나야 자신 있게 다른 지역에 사람을 보낼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실 여왕벌을 몇 마리 더 키워내서 다른 지역에 자리 잡게 만드는 정도야 지금도 가능한 칼스였으나. 당장에 허니 상단에서 판매할 물품이 꿀인 만큼 허니상단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독점적 지위를 누리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차후에 마를르성에 들러 정식으로 상단 등록을 하면 공식 계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한참 동안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선 칼스를 맞이한 것은 엘레노아였는데, 딱히 이 마을에서 할 일이 없어 지루해하던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콥! 칼스와 할 이야기는 다 끝난 거지?"
"네. 이제 내일 돌아갈 준비만 마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 얘 좀 데려갈게."
어리둥절해하며 엘레노아에게 끌려 나온 칼스가 도착한 곳은 바로 작년에 그가 사들인 말들이 머물고 있는 마구간이었다.
그녀는 에올론 마을 안을 돌아다니다가 제법 튼실한 말들이 묶여있는 이곳을 발견했고, 그곳을 관리하고 있던 마을 사람에게 이 말의 주인이 칼스라는 사실까지 들은 참이었다.
"여기 있는 이 말들 네가 사 온 거라면서? 말을 타는 법은 알고 있어?"
"음. 빠르게 달리는 건 아직 힘들고 가볍게 마을 주위를 도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잘 됐다. 그럼 나랑 바람이나 좀 쐬러 나갔다 올래?"
"엘레노아랑 둘이서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이 근방에는 아르덴 대삼림의 영향으로 괴물 녀석들도 없다시피 하다던데? 그래서 너희 마을도 그렇고 이 주변 마을에서 마음껏 가축들을 밖에 풀어 기를 수 있게 된 거 아냐."
"그렇긴 하죠."
"자자. 그럼 어서 타자고."
엘레노아는 약간 망설이는 칼스를 말위에 태우곤, 그녀 역시 능숙한 솜씨로 말위에 올랐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몰아서 마을 입구로 나갔고, 곧 에올론 마을 앞 언덕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평소 마을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풀을 뜯으러 나오는 초지였기에 주변 시야가 탁 트여있었고, 그 위에서는 에올론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말 작은 마을이네. 너는 마를르성에 와본 적이 있댔지? 사실 마를르성도 왕도 리온이나 주변의 큰 도시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도시야."
"엘레노아는 왕도 리온에 가본 적이 있나 봐요?"
"어머니의 본가가 아직 리온에 있거든. 가끔 어머니를 따라 그곳에 가면 늘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야. 여러 가지로 신기한 것들이 많거든. 저녁에도 길을 밝혀주는 마법 등이라던가, 한여름에도 얼음을 만들어내는 장치라든지 이런 것들 말야."
"마법으로 만든 물품인가 보네요."
아직까지 제대로 된 마법사조차 본 적이 없는 칼스였기에 엘레노아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반응을 의식한 듯 자신이 본 여러 가지 마법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버지께서도 어떻게든 마법사들을 성내에 들이고 싶어 하는데. 그들은 워낙 까탈스러워서 이런 낙후된 곳에는 잘 찾아오지 않거든. 그나마 엘프인 텔드라스님이 고향에서 가까운 영지라는 사실 하나로 함께해 주시곤 있지만. 엘프들은 마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걸 꺼려 하거든."
"그렇군요. 하긴 저도 엘프들을 몇 번 봤는데. 마법을 사용하는 건 못 본 거 같네요. 리온이라... 언젠가 방문하게 될 날이 있겠죠. 그땐 적어도 이 마을은 지금보다는 더 발전한 모습이 되어있을 거예요."
"후후. 기대되네. 나중에 다시 이 마을을 찾았을 때 어떻게 변해있을지가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다시금 기수를 돌려 마을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엘레노아와 제이콥 일행은 에올론 마을에서 가져가야 할 물품들을 챙겨 마를르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엘레노아를 마중 나왔던 칼스는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있다는 말에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는 마차에 올라가 버렸다.
-쪽
"그럼 어린 예비남편이 다시 나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는 볼이 아닌 진짜 진한 입맞춤을 해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어... 어?"
왠지 모르게 흐뭇해하는 표정의 에밀이 엘레노아가 올라탄 마차의 문을 닫으며 칼스를 잠시 흘겨보았고, 그녀를 따라왔던 상인들과 병사들 역시 실실 웃으며 마차를 몰아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후미에 남았던 제이콥은 아직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칼스를 보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거. 나중에 볼 때는 이렇게 편하게 대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먼. 아무튼 네가 말했던 것들은 재무관님과 영주님께 잘 이야기해주도록 하마. 그리고 꿀이 어느 정도 생산되면 바로 마를르성에 찾아오도록 해라."
"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제이콥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행이 마을을 떠나 마를르성으로 향했고, 칼스는 아직도 감촉이 생생한 오른쪽 볼을 매만지다가 짓궂은 표정의 한센과 케인의 놀림을 당하자 재빨리 양봉장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버렸다.
* * *
엘레노아와 제이콥이 돌아간 후 칼스는 본격적으로 허니 상단의 창설 준비에 들어갔다. 일단 작년 겨울에 기본적인 건물들은 올려두었기에 그곳을 사용하면 됐고, 문제는 역시 인력이었다.
아무래도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수가 적은 에올론 마을이다 보니 함부로 일손을 빼올 수는 없었기에 최소한의 인력을 갖춘 후 주변 마을이나 마를르 성에서 추가로 사람을 데려오기로 한 칼스였다.
칼스에 대한 마을에서의 인식 역시 이번 엘레노아의 방문으로 크게 변화되었는데. 이전까지는 촌장 집 아들이 뭔가 특이한 재주를 얻어 적당한 돈을 만졌고, 그 돈으로 건물을 올리고 좀 더 양봉장을 키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칼스가 영주님의 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고, 그와 직접 거래하는 하나의 상단을 만든다는 소식에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어머 어머. 정말 꿀이 많이도 나오네."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초지 주변에 꽃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피었다고 하더라. 꽃이 많아졌으니 자연스럽게 꿀도 더 많이 모이게 되는 거겠지."
"이거 이러다가 미리 준비해둔 단지가 꽉 차서 더 이상 꿀을 못 받을지도 모르겠는데? 칼스에게 말을 해야 하나? 근데 얘는 어디로 간 거야?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올해 첫 수확인 봄꽃 레벤틸에서 나오는 꿀을 채밀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인 칼스였고, 그런 칼스의 양봉장에는 제니와 잭 외에도 꿀을 내릴 줄 아는 아낙들이 나와서 일손을 보태고 있었다.
"아까 촌장이 불러서 잠깐 집에 돌아가는 거 같던데? 그건 그렇고 칼스가 영주님의 딸과 결혼하면 이 마을의 촌장 자리도 칼스가 가져가는 건가?"
"에이~ 그 집은 케인이 맏아들로 있는데? 그럴 거였으면 그 허니인지 혀니인지하는 상점 건물을 짓지도 않았을 거 아냐."
"그렇지?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딸년을 진작 칼스와 짝지어 줬어야 했는데."
"어머~ 꿈도 야무지셔. 어차피 영주님 따님이 아니었어도 힘들었을걸? 차라리 이번에 그 상단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니까 거기에나 들여보내던가."
"그럴까? 집에서 양치는 거 배우는 것보다야 그게 낫겠지?"
아낙들은 잭과 제니가 꿀이 담긴 벌집을 가져다주면 거기서 꿀을 뽑아내어 단지에 옮겨 담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꿀이 나오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몇몇은 자식들을 허니 상단에 들여보내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엉겁결에 허니 상단의 창립멤버가 되어버린 잭과 제니에게 잘 보여야 했고, 아낙들은 둘의 눈에 들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꿀을 뜨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