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한편 그 시각 칼스는 한참 채밀 작업을 하던 중에 아버지인 한센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센이 칼스를 급히 부른 이유는 마을 아낙들의 입에서도 언급됐던 것처럼 마을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키우던 초지 인근에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꽃밭들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그 정도로 많아졌다고요?"
"그래. 처음에는 그냥 잡초인 줄 알고 적당히 자라다 말겠지 했는데, 지금은 아르덴 삼림 방면으로는 거의 꽃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더구나. 마을 사람들은 그게 벌을 많이 키우라고 아르케 여신님께서 힘을 쓰신 걸지도 모른다며 아예 그쪽으로는 가축들을 보내지도 않는 모양이야."
칼스는 아버지 한센의 말에 정말 아르케 여신이 힘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에올론 마을에서 키우는 벌의 개체 수는 이곳 기준으로는 대단히 많은 양으로 보일지 몰라도. 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일반적인 양봉장의 규모보다도 작았기 때문이다.
"그... 그래요? 흠. 한번 시간 내서 눈으로 직접 봐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요새 생각했던 것보다 꿀이 훨씬 많이 나와서 그 문제를 좀 해결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못썼거든요."
"뭐 꿀이 안 나와서 문제가 아니라 많이 나온다니 다행이구나."
이 정도의 벌이 생겼다고 주변에 확연한 식생의 변화가 보인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요 근래 마을 아낙들의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갑작스럽게 늘어난 채밀량으로 인해 벌집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이에 빠르게 그 벌집을 비워내야 하는데 세 사람의 일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 참. 마를르 성에 갈 때 사람을 얼마나 데려갈 생각이냐? 아무래도 이제 마을에서도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지원해 줄 수는 없겠다만."
"원래대로라면 저를 포함해서 열 명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요 근래 갑자기 꿀이 많이 나오다 보니 계산을 다시 해봐야 할 거 같아요. 뭐 안되겠다 싶으면 꿀 일부는 마을에 나눠주고 술을 담그거나 해서 처리해야죠. 그리고 이번에 마를르 성에 가면 제가 부릴 사람들을 좀 뽑아올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음... 괜히 뒤가 구린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닐지 걱정되는구나."
"그 부분은 제이콥씨가 도움을 준댔으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사람 속은 누구라도 알지 못하니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한센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함께 마를르성에가서 칼스가 사람을 뽑는 과정을 돕고 싶었으나, 그는 칼스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에올론 마을의 촌장이었다.
차라리 케인이 좀 더 장성해서 일을 완전히 맡길 수 있었으면 모를까, 이제 막 촌장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 큰아들에게 마을 일을 떠맡기는 것도 문제가 되었기에 그저 제이콥이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를 바랄 뿐인 그였다.
칼스는 한센과의 대화를 마치고, 일단 한참 꿀을 채밀 중인 양봉장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꿀이 가득 찬 벌집판을 나르는 잭과 제니의 모습이 보였고, 양봉장 한편 구석에서는 그런 벌집판을 받아서 안에 들어있는 꿀을 뽑아내는 작업에 여념이 없는 마을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그녀들은 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벌들에게 몇 번씩 쏘였는지 몸 이곳저곳에 부은 자국이 선명해 보였다.
"죄송해요 아주머니들. 저 때문에 괜한 고생이 많으시네요."
"에이~ 뭘. 오늘 일한 거 두둑하게 쳐준다고 했잖아."
"이 정도는 양 치러 나갔을 때 풀벌레한테 물리는 거랑 비슷해."
"그래도 너무 죄송스러워서... 오늘 보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넉넉하게 쳐서 드릴 테니까. 그리고 가실 때 꿀도 좀 나눠드릴게요. 생각보다 엄청 많이 나와서 오히려 처리가 곤란한 상황이 될 거 같네요."
"아. 맞아! 이거 슬슬 꿀을 담을 단지가 떨어져가는데 어쩔까?"
"음... 일단 지금 나와있는 것까지만 채워주세요. 남은 건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거 같으니."
작년에 나름 넉넉하게 사두었던 꿀단지들이 거의 모두 가득 차있었고, 이제 겨우 몇 개만이 남아있었는데 그마저도 계속해서 떨어지는 꿀의 양을 봤을 때 금방 다 차버릴듯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칼스는 일단 잭과 제니를 불러들였고,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말해주듯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헥헥!! 칼스 불렀어?"
"응. 지금 어느 정도까지 뺀 거야?"
"후으음~ 벌통 스무 개 중에 열다섯 개? 열여섯 개 정도 뺀 거 같은데."
"지금 꿀을 담을 단지가 떨어져가니까 남은 건 그냥 놔두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해서."
"휴우! 그래주면야 고맙지. 근데 원래 이렇게 꿀이 많이 나오는 거야?"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나와서 나도 좀 당황스럽네. 일단은 비운 벌통 안에는 새 벌집판을 좀 넣어주고, 아직 못 비운 통들은 벌통 위에 큰 돌멩이 같은 걸 얹어서 표시 좀 해줘."
"알겠어. 근데 아무래도 이런 식의 일이 계속된다면 사람을 좀 더 늘려야 할 거 같아. 나는 그럭저럭 버티겠는데 제니는 아까 휘청휘청하더라고."
"안 그래도 마을 아이들 중에 관심을 보이는 애들을 좀 더 받아서 가르칠까 생각 중이야. 제니 같은 경우엔 본격적으로 상단이 운영되면 그쪽 업무에 집중해야 할 수 있으니까."
제니는 잭의 말대로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쪼그려 앉은 채 칼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나름 어렸을 때부터 여러 일을 도와가며 체력을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오빠인 잭이 중간중간 그녀에게 휴식을 줬기 때문이었고, 잭은 아침부터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거의 쉬는 시간 없이 벌통을 오가야 했다.
"아무튼 오늘은 정말 고생 많았어. 후딱 뒷정리만 좀 하고 점심 식사나 하러 가자. 내가 엄마한테 두 사람 몫까지 부탁해놨으니까 같이 가서 먹으면 돼."
"으... 안나 아주머니께 죄송한데."
"에이. 예전에도 자주 집에서 먹어놓고 무슨 그런 소리를. 오후에는 나오지 말고 푹 쉬어. 안 그러면 몸살이 나서 더 힘들 수도 있어."
"너는 어쩌려고?"
"난 아까 아빠 때문에 좀 쉬었으니까. 뒷정리 작업만 조금 하고 마을 밖에 좀 나가보려고, 마을 초지에 꽃이 엄청나게 많이 피었다는데 그곳 좀 살펴봐야 할 거 같아."
그렇게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곱절은 되는 양의 꿀을 채밀한 그들은 결국 더 이상 꿀을 담아둘 단지가 부족하게 되어 일을 마무리 지었고, 칼스는 일을 도와준 마을 여인들에게 품삯과 더불어 넉넉한 양의 꿀을 담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뒤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칼스는 완전히 퍼져버린 두 남매를 쉬게 한 뒤 마을 밖의 꽃밭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에서 기르는 소와 양에게 먹일 풀을 제공해 주는 초지는 에올론 마을 앞 언덕에서부터 아르덴 대삼림과 맞닿은 곳까지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근 수십 년간 마을 사람들이 나무가 웃자라지 않도록 관리해온 곳이었는데, 칼스는 며칠 전 엘레노아와 함께 언덕 위에 올랐을 때와 비교했을 때 상상도 못할 속도로 넓게 퍼져 나온 레벤틸 꽃밭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괜한 호들갑이 아니라 진짜 갑자기 저렇게 퍼져 나왔다고?"
그는 마을에서 그 꽃밭을 향해 열심히 날아가는 벌들의 궤적을 관찰하다가 아무래도 평범하게 자라난 꽃들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곤 그곳에 가까이 가도 될지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무성한 꽃들 사이에서 커다란 나비 같은 게 팔랑이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리저리 꽃들 사이를 드나들던 그것이 꽃밭에서 쏙 빠져나오더니 칼스가 있는 언덕 쪽으로 날아왔는데 놀랍게도 나비인 줄 알았던 그 존재는 커다란 날개를 단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뭐... 뭐야? 요정인가? 쪼그만 게 귀엽게 생겼는데?"
그녀(?)는 칼스의 주변을 돌며 마치 그를 관찰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다가 그의 시선이 자신을 정확히 보고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아채곤 자그마한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놀라워했다.
[어? 인간! 내가 보이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으음? 지금 네가 말한 거야?"
[맞아. 맞아! 내가 말한 거야! 뭐지? 뭐지? 아하! 어머니의 은혜를 입은 인간이구나!]
뭔가 정신없이 그의 주변을 배회하며 이리저리 살피던 그 존재는 이내 칼스의 이마 부근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관심이 없어졌는지 아무런 말 없이 다시금 꽃밭이 있는 곳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뭐지? 방금 분명 머릿속으로 말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나저나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다니. 흠... 해로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까이 가도 되려나."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칼스가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저 멀리 아르덴 대삼림 방면에서 뭔가가 나타나더니 성큼성큼 꽃밭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다.
처음엔 위험한 짐승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긴장하고 있던 칼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존재가 자신에게도 익숙한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이미 두 차례나 만남을 가졌던 엘프 릴리나였다.
"칼스? 안 그래도 칼스를 만나러 나온 거였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됐네요."
"릴리나! 겨울은 잘 보냈어요? 큰불이 났었다고 했잖아요? 그 후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칼스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요?"
"갑자기 꽃밭이 넓어졌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한번 살펴보러 나온 거예요. 혹시나 제가 기르는 벌들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나 싶어서요."
칼스는 릴리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뒤 그녀가 지나온 꽃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 꽃밭들은 픽시들이 이곳에 자리 잡아서 생겨난걸거예요."
"픽시요?"
"네. 꽃의 정령들이죠. 아주 착하고 귀여운 친구들이랍니다. 낯가림이 심해서 인간들에게는 잘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지만요."
"으음... 저기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애들이 픽시라는 건가요?"
"네. 맞아요. 생각해 보니 칼스는 아르케 여신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었네요. 픽시들 역시 아르케 여신님의 은혜로 모습을 감추는 능력을 가진 것이니 당신의 눈에는 그들이 훤히 보이겠군요."
그제서야 칼스는 왜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꽃밭을 노닐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곁에 날아왔다가 돌아간 픽시가 라고 말했던 것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아르케 여신님의 성흔 덕분에 저들이 제 눈에만 보였던 거군요."
"저 픽시들은 겨울에 있던 화재로 인해 꽃밭이 모두 타버려서 머물 곳을 잃었던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제가 꿀을 가져다주면서 이곳에 벌이 많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꽃을 피우기에 좋다고 생각했는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싶다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칼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마을에서 출발한 거였는데 이미 픽시들이 이렇게 자리를 차지해버렸네요."
"으음.. 저기서 더 퍼져 나오지는 않겠죠? 지금 제가 서있는 언덕 인근은 마을에서 키우는 동물들이 풀을 뜯는 곳이라서요."
"조금 더 넓어지더라도 이 근방을 전부 뒤덮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픽시들은 딱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도 아니라서 큰 문제는 없을 거고요. 저들은 그저 꽃을 가꾸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거든요."
꽃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칼스와 릴리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지, 아까 보았던 픽시보다 좀 더 체격이 커 보이는 픽시 하나가 그들을 향해 폴폴 거리며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