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귀여운 소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 픽시는 릴리나와 칼스 중간쯤에 멈춰 서더니 먼저 릴리나를 보며 말했다.
[반가워. 또 만나는구나 릴리나.]
"홀라홀라. 제가 인간들에게 알리기 전에는 꽃밭을 늘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요?"
[어쩔 수 없었어! 사실 그냥 주변을 살피러만 온 건데, 벌들이 꿀을 찾지 못해서 헤매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거든!]
"어휴 정말. 여러분들의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아참 이쪽에 있는 이 아이가 그때 꿀을 보내줬던 칼스예요."
이미 서로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는지 홀라홀라라는 픽시는 릴리나가 내밀어 준 손 위에 가볍게 내려앉으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러다 칼스가 얼마 전 화재 때 꿀을 나눠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듣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인간! 네 덕분에 우리 친구들이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
"저는 그냥 가지고 있던 꿀을 나눠준 것뿐인걸요. 그나저나 꽃이 많아져서 벌들도 좀 더 늘려볼까 하는데 상관없을까요? 여러분들이 키워낸 꽃의 꿀을 다 가져가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요."
[괜찮아. 대신 가끔 마을에 찾아가면 꿀을 조금씩만 나누어주면 돼.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해서 몇몇 친구들이 몰래 찾아갈 거라고 하더라고.]
"에... 꿀단지에 따로 좀 담아서 이 근처에 가져다 줄게요. 몰래 오셔서 가져가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주면 고맙지! 사실 처음엔 벌들이 먹을 꿀까지 다 뺏어 먹는 나쁜 인간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곳을 오가는 벌들이 건강한 걸 보면 욕심을 자제할 줄 아는 것 같아서 안심했어. 역시 어머니께서 좋아할 만한 인간인 거야!]
칼스에 말에 흡족했는지 이리저리 그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빛 가루를 뿜어내는 홀라홀라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꽃의 정령인 픽시들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루는 주변 공기를 상쾌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고, 이 때문에 옛날 솔라 제국이 대륙을 짓밟던 시기엔 제국인들이 픽시들을 가둬두고 살아있는 공기청정기처럼 사용하기도 했었다.
"여왕께서 언제 한번 방문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봐달라고 하더군요. 저번에 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면서 말이에요."
"으음... 지금은 좀 곤란할 거 같아요. 픽시들 덕에 꽃이 엄청 늘어나면서 벌들도 엄청 불어나기 시작했거든요. 벌통을 늘리고 새 여왕벌을 키워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꽃이 늘어나서 문제인 거야? 으음... 조금 줄여야 할까? 벌들이 많다고 다들 신나서 마구 늘려대긴 했지.]
"아녜요. 원인을 몰라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지. 오히려 여러분들이 꽃을 계속 피워주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만큼 꿀도 많이 생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걱정 마! 우리가 머무는 한 꽃은 언제나 활짝 피어날 테니까!]
홀라홀라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굳게 쥔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고, 칼은 속으로 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다시금 꽃밭 한가운데로 날아가 버렸고, 비정상적인 레벤틸 꽃밭의 확장에 대한 원인을 알아낸 칼스는 릴리나와함께 마을로 되돌아왔다.
"허허... 그러니까 갑자기 생겨난 레벤틸 꽃밭이 픽시들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거군요."
"네. 칼스가 키우는 벌들 덕분에 꽃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면서 그곳에 자리 잡고 싶다고 하더군요. 사실 자리를 잡기 전에 알려주려고 서두른 건데 픽시들이 워낙 성미가 급해서요."
"괜찮습니다. 픽시들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일도 없으니 오히려 다행이지요."
칼스는 릴리나와함께 아버지 한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혹여나 좋지 않은 징조가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한센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나는 이런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며 곧바로 되돌아가려 했으나 칼스는 그런 그녀에게 오늘 갓 떠놓은 꿀을 조금 나누어주었다.
"매번 들를 때마다 얻어 가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원래 이런 게 이웃인 거잖아요? 남는 게 있으면 나누는 거죠. 아까 말했듯 픽시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꿀이 나와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가져가시면 돼요."
"이웃이라. 그렇군요. 칼스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거 같네요."
릴리나는 진심으로 칼스라면 늘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인간들과 달리 엘프들을 비롯해 아르덴 대삼림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 종족들과 좋은 이웃으로 남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꿀단지가 들어있는 배낭을 등에 메고 에올론 마을을 빠져나왔다.
* * *
에올론마을과 아르덴 대삼림 사이의 너른 들판에 꽃의 정령인 픽시들이 자리 잡았다는 소식은 금세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낯선 존재들이 마을 옆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들이 단지 꽃을 사랑하고 가꾸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딱히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자 금세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꾸만 어린 인간들이 꽃밭에 들어와서 우리를 찾는다며 소란을 피우는데. 이것 좀 어찌 해결해 주지 않겠어?]
"으음... 어리다 보니 픽시라는 존재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 걸 거예요."
[어리다고? 다들 네 또래 정도는 되어 보이던데.]
"차라리 애들 앞에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호기심을 갖는 것도 잠시고 금방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지도 모르거든요."
[이미 몇몇 픽시들이 그렇게 해봤지만 오히려 더 아이들이 자주 찾아오게 됐으니 이러게 너를 찾아온 거 아니겠어?]
"알았어요. 마을 어른들에게 이야기해서 아이들이 함부로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해볼게요."
[고마워. 사실 우리도 인간 아이들이 싫은 건 아니야. 근데 그 녀석들은 우리만 보면 자꾸 손으로 잡으려 들거든.]
이처럼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오곤 했는데,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작고 귀여운 모습을 한 픽시들을 보더니 자꾸만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 꽃밭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픽시들과의 소통의 창 역할을 도맡게 된 칼스는 마을 어른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 주의를 주라고 이야기해야겠다 생각하면서 한편에 챙겨두었던 작은 꿀단지를 홀라 홀라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온 김에 이것 좀 가져가서 나눠먹으세요."
[오오! 레벤틸 향이 가득한 꿀이네! 늘 고맙다는 말밖에 해줄게 없어서 미안한걸.]
"천만에요. 픽시 여러분들이 꽃들을 잘 가꿔준 덕분에 많은 꿀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픽시들이 가꾼꽃이라 그런지 꿀의 향과 맛도 더 좋아진 것 같고요."
[후후. 당연하지! 꽃에 대해서는 어떤 존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칼스의 칭찬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으쓱거리던 홀라홀라는 곧 칼스가 선물한 작은 꿀단지를 공중에 띄우곤 꽃밭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처음엔 그들의 덩치보다도 더 큰 꿀단지를 과연 옮길 수 있을지 걱정했던 칼스였지만. 정령이라는 존재답게 마력을 다룰 줄 아는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들고 나르곤 했다.
"앗! 가버렸잖아?"
"응? 에일린 누나 여기엔 웬일로 찾아온 거야? 집에 꿀이 더 떨어져가던가?"
"아니! 내가 무슨 꿀만 찾으러 여길 오는 줄 알아?"
'사실이 그렇잖아.'
칼스가 마을에 양봉장을 설치하고 꿀을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이곳에서 일하는 잭과 제니를 제외하면 가장 자주 이곳에 들른 이가 바로 에일린이었다.
그녀는 처음엔 자기와 곧잘 놀아주던 동생이 이상한 일을 벌이더니 자신과 어울려주지 않자 토라져 심술을 부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칼스가 일하는 곳에 가면 달콤한 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들러서 꿀을 얻어먹곤 했었다.
"오늘은 꿀 때문에 온 게 아니야. 방금 전에 날아가 버린 픽시를 가까이서 구경해보고 싶어서 온거라구."
"아하. 홀라홀라를 보러 온 거구나."
"방금 그 픽시 이름이 홀라홀라야?"
"응. 픽시 마을의 촌장 같은 자리를 맡고 있대. 요즘 자기들이 가꾸는 꽃밭에 우리 마을의 애들이 자주 들어와서 소란을 피운다고 하소연하고 갔어."
"그.. 그래? 곤란한 일인 걸?"
칼스는 자신의 말에 갑자기 화들짝 놀라더니 어색한 몸짓을 보이며 답하는 누이를 보고 적어도 그녀가 홀라홀라가 말한 아이들 중 하나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누나. 아무리 픽시가 신기해 보인다고 해도 무작정 애들을 데리고 꽃밭에 들어가는 건 곤란해. 그러다가 숲에서 위험한 짐승이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으이잉~ 알았어. 하지만 픽시의 모습을 직접 한번 보고 싶었단 말이야. 톰이랑 제시가 자기들은 봤다면서 얼마나 자랑한지 알아?"
"어휴... 그래서 꿀이라도 얻어먹으러 왔다가 홀라홀라가 있는 걸 보고 훔쳐보고 있었어? 차라리 들어왔으면 인사라도 시켜줬을 텐데."
칼스는 자신의 말을 듣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일린을보자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기에 홀라 홀라에게 픽시들과 마을 아이들의 만남을 주선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지금처럼 남들 몰래 꽃밭을 찾아가 제멋대로 뒤지고 다니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서 픽시들과 한바탕 어울리고 나면 이런 일도 훨씬 줄어들 거라 생각한 것이다.
"마을 애들한테도 함부로 꽃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줘. 그리고 픽시들이 나타나더라도 손으로 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만 잘 해주면 내가 그들한테 부탁해서 직접 만나게도 해줄 테니까."
"정말? 알았어!"
그의 말에 기뻐하는 에일린이었고 칼스는 그런 그녀에게 작은 종지에 담긴 꿀을 내어주고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창고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칼스였는데 슬슬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을 꿀들을 채취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으음... 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마를르성에 다녀와야겠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에올론마을 입구에서 한무리의 인원이 커다란 단지들이 실린 수레들을 끌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선두에는 칼스가 사 온 말이 끄는 수레가 있었는데.
더 이상 채밀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버린 꿀을 판매하고, 공식적으로 허니 상단을 영주에게 인가받은 후 함께 일할 사람도 구해오기 위한 상행이었다.
"콥스 형 선뜻 같이 가준다고 해줘서 고마워. 이번에도 잘 부탁해."
"야. 네 덕분에 멜린한테 점수를 따서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했거든. 적어도 내년에는 결혼해서 독립하고 싶은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너를 잘 따라다니면 먹고 살 일은 해결될 거 같아서 말야."
"이거 알고 보니 검은 속내가 있었던 거네. 그런데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멜린 누나도 괜찮대?"
"어. 멜린네 부모님께도 다 허락받았어."
"이야... 제법인데? 좋아 안 그래도 이번에 마를르성에가면 정식으로 상단 설립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는데. 그거 정리되는 대로 사람을 좀 뽑으려 했거든. 형 정도면 충분히 뽑아줄 수 있지."
"고맙다. 창고지기든 잡일이든 뭐든 다 열심히 할게."
콥스 외에도 이번 상행에 따라나선 마을 사람들 중 상당수는 칼스가 만들 상단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혀왔고, 애초에 이번 상행에 따라온 사람들은 차후에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이들이었기에 칼스는 그런 그들에게 어지간하면 다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마을을 출발한 지 한나절이 지나서야 마를르성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저번처럼 마를르가문의 깃발을 내세울 수 없었기에 병사들에게 검문을 받아야 했다.
"어디에서 오는 이들인가?"
"에올론 마을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판매할 꿀을 가지고 왔어요."
"꿀? 아! 네가 엘레노아 아가씨의? 으음... 진짜 모두 꿀이로군. 좋다 들어가 보도록 해."
"네? 네. 감사합니다."
병사들은 미리 전달받은 내용이 있었는지 수레 위에 실려있는 단지의 내용물을 살펴보더니 별다른 말없이 칼스 일행을 들여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