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29/65)



〈 29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칼스는 너무나도 쉽게 통과시켜주는 경비원의 행동에 잠시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이내 엘레노아와의 약혼 건을 떠올리곤 대충 납득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 마를르성을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숙소에 다시 한번 짐을 풀어놓은  그곳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수고비를 주고 외성에 위치한 루엠상단에 자신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제는 칼스와의 거래에 있어 거의 전담하고 싶다 한 제이콥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왔다.

"하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군그래."
"제이콥 님! 이 시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셨던 거예요?"
"어중간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늘 일에 치여 사는 법이지. 아무래도 상단주님은 재무관의 직책도 갖고 있다 보니 그분한테 가야 할 일까지 나에게 오는 기분이야. 오늘은  핑계로 조금 일찍 나온 편이라고."


그렇게 말한 제이콥은 칼스의 앞에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고는 편한 자세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엘레노아 아가씨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봐? 그때 말했던 일정보다 열흘은 일찍 오고 말이야."
"그런 건 아니구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꿀이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급하게 일행을 꾸려서 나온 거예요."
"예상치 못한 일? 보통 일이 터지면 더 일이  풀리기 마련이지 않나?"

칼스는 제이콥에게 픽시와 관련된 일들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모두 감춰야 할지 고민했던 그였으나 어차피 마을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그것을 감추려 들다가 서로의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기느니 일찌감치 오픈하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루엠상단과 칼스가 만들 허니상단은 함께 할 동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꽃의 요정인 픽시가 자리 잡았다고? 하긴... 네가 아르케 여신님의 호의를 얻었으니 그들도 그것을 알고 모인 것이겠지. 그럼 앞으로도 계속 생산량이 늘어난다고 봐도 되겠지?"
"무한정 늘지는 않겠죠. 관리할 수 있는 벌통의 양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작년에 계산했던 것보단 훨씬 많은 양이 생산될 겁니다."

칼스의 말에 제이콥은 기뻐하며 앞으로의 물량 소화에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고 말했고, 칼스는 그런 그에게 이번에 마을에서 가져온 꿀들을 모두 넘겨주고 그 값을 받을  있었다.

"와... 이렇게 가격을 좋게 쳐줘도 되는 거예요?"
"그때는 일반적인 꿀의 값에 견주어서 가격을 매겼는데 네가 가져온 꿀들은 텁텁한 느낌이 적다 보니 기존 꿀들보다 더 비싸게 팔아도 재고가 모자랄 정도로 인기가 좋았거든."

칼스는 이전 거래에서 작은 꿀단지 하나당 은화 1개를 받았었는데, 지금 값을 쳐준 것을 계산해보니 그때보다 1.5배 정도는 높은 가격으로 매입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루엠 상단의 입장에선 비록 영지 내에서 기반이 가장 적은 편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영주의 딸과 결혼하게  칼스가 만든 허니 상단과의 거래에서 많은 이득을 남겨보겠다고 달려들 필요가 없었기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해준 것에 불과했다.

"아 참. 여기 오기 전에 내성으로도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네."
"내성으로요?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됐는데."
"앞으로  장인어른이 되실 분인데 당연히 연락을 취해야지. 괜히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문책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저녁식사 자리에라도 초대했을지 모를 일이야."
"하하. 저에겐 다행이네요."


작년 가을에 그저 영주라는 직책을 가진 보두앵 마를르 남작을 대면했을 때도 부담감이 제법 컸는데, 이제는 장인어른이 될지 모르는 입장이 된 그와 저녁식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칼스였다.


그러는 사이 제이콥이 예상했던 대로 영주성에서 보낸 이가 숙소로 삼은 여관에 도착했는데, 그는 칼스도 이미 한차례 만나본 바 있는 마를르가의 집사 보렐손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칼스님."
"아. 집사님이시군요. 성함이... 보렐손 맞죠?"
"네. 맞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처음 보았을 그때와 똑같은 차림의 보렐손이었으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칼스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마를르남작의 여식과 약혼을  예정인 칼스를 윗사람처럼 깍듯하게 대우했는데 오히려 칼스는 그런 그의 모습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직은 그저 시골마을 소년에 불과한데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엘레노아 아가씨가 셋째부인이신 캐롤린 남작부인의 소생이라고는 하나 어찌 됐건 마를르 남작가의 고귀한 피가 흐르는 건 같으니 말입니다.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분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마를르 남작가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크흠흠. 그럼 저는 이만 상단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
"아! 제이콥 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제이콥은 보렐손의 반응을 보며 자신이 칼스를 편하게 대했다는 사실을 보렐손이 알게 되면 한차례 횡액을 치르게 될까 두려워 재빨리 상단의 일을 핑계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한 칼스는 별말 없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를 보내주었고, 제이콥은 칼스에게 약간 어색한 인사를 해 보이더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근데 집사님은 여기에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무슨 일이라니요. 당연히 칼스님을 모시려 온 것이지요. 이런 누추한 곳에서 머물게 했다는 사실을 영주님이 알게 되면 경을 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영주성에 모셔가고 싶지만 칼스님이 불편하게 느끼실 수 있으니 내성에 위치한 손님용 별관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 지금 바로요?"
"네. 일행분들은 제가 이곳 숙소 주인에게 잘 모시라고 전해두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일단 마을 사람들한테 양해를 좀 구해야  테니 잠시 기다려주실래요?"
"먼저 내려가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준비가 되시면 내려오시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숙소 밖으로 나갔고, 칼스는 함께 이곳에 와준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보렐손의 입장도 헤아려야 했기에 일단 숙소는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제이콥과의 대화를 편하게 나누라는 뜻에서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칼스의 말에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뭐. 네가 영주님의 사윗감이라는  마을에서도  아는 사실이니까 집사라는 그 사람도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겠지."
"죄송해요. 대신에 꿀을 판매해서 얻은 대금이 있으니 여러분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여윳돈을 넉넉히 지급해드릴게요. 뭔가 일정이 변경되면 제가 직접 오던지 사람을 보내든지 해서 알려드릴 테니 그때까지는 편히 쉬고들 계세요."
"그거참 반가운 소식인데?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도록 해. 차후에 처갓집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니 잘 보여야 할 것 아니야."

칼스는 콥스에게 마을 사람들이 넉넉하게 쓰면서 며칠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여윳돈을 건네주고 숙소 밖으로 나왔고, 그곳에는 예전에도 한번 타본 적이 있는 커다란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렐손은 칼스가 숙소를 나서는 것을 보고는 마차의 문을 열어 그를 에스코트해 주었고, 마차는 해가 다 저물어가는 붉은 하늘을 배경 삼아 마를르내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일 따로 정해진 일정이 있으신지요."
"어어. 일단 마을에서 사용할 꿀단지들을 좀 매입해야 해요. 그리고 마을에 제가 상단 하나를 세우려고 하는데 그 절차를 밟아야 해서 이에 대해 제이콥 씨한테 설명을 좀 들어야 하고요."
"루엠 상단에 계속해서 납품하시는  아니었습니까?"
"꿀 외에도 여러 상품을 좀 만들어서 팔아보고 싶어서요."
"역시! 알겠습니다. 그럼 영주님께는 그렇게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칼스는 별생각 없이 해야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것을 마를르남작에게 보고한다고 보렐손이 말하자 그런 것까지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에엑? 영주님께 보고까지 돼야 할 사안인 건가요?"
"일단은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또 다른 일정은 없으십니까?"
"으음. 아! 이곳에 왔으니 아르케 여신님의 신전도 들러봐야겠어요. 그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별채에 병사 몇을 상주시킬 테니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될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제법 규모가 큰 저택에 도착한 칼스는 보렐손의 안내에 따라 지구에서 간혹 매체를 통해 접했던 호화로운 가구로 들어찬 방에 들어서게 됐다.

약간은 멍해진 표정으로 방안의 여러 장식품들을 구경하는 칼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침대맡에 있는 종을 울리면 된다고 이야기한 보렐손은 영주성으로 돌아갔고, 그제서야 방에 홀로 남겨진 칼스는 여러모로 편히 쉬기엔 부담스러운 환경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거. 차라리 외성에 있는 여관방이 더 편할 거 같은데."

그러나 칼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랜만에 맛본 제대로  침대 위에서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다음날 평소보다도 훨씬 상쾌한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이 내성안의 저택인데다 이른 아침부터 다른 사람을 부리기가 미안했던 칼스는 널찍한 응접실에서 실내운동을 통해 몸을 풀고 있었는데 바깥이 시끌시끌해지더니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


"칼스님 혹시 깨어나 계시는지요?"
"음? 네. 일어나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 그것이."
"거봐! 일어나 있을 거라고 했지? 비켜봐 좀. 칼스! 나야 엘레노아 들어가 봐도 될까?"
"엘레노아? 들어오세요."


엘레노아는 어젯밤 칼스가 마를르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간이 늦었기에 당장 그를 찾아갈 수 없었고, 아침이 밝자마자 그라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거라며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엘레노아! 에밀! 그간 잘 지냈어요?"
"응? 으응. 나야 뭐 잘 지냈지. 근데   이리 일찍 온 거야? 제이콥의 말에 따르면 열흘은 더 있어야 할 거라고 했는데."
"제 일정까지 다 꿰차고 계셨나 보네요."
"아... 아니 그렇다기보단 적어도 네가 올 때는 내가 맞이해야 할  같아서."
"아가씨가 어젯밤에 얼마나 안절부절해하던지. 칼스 혹시 그때 그 꿀에 제가 모르는 약이라도 탄 건 아니겠죠?"
"에밀! 내가 언제 안절부절못했다고 그래?"
"어제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당장 칼스를 보러 가겠다고 난리를 쳤잖아요. 아마 이 소식은 영주 성내에 파다하게 퍼졌을 테니 영주님과 캐롤린님도 들으셨을걸요?"

에밀의 말에 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연자실해하는 엘레노아였고, 칼스는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듯한 그녀의 모습에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요. 근데 에밀의 말마따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궁금한데요."
"그야 여기 있으면 너 혼자 아침식사를 해야 하잖아? 그러니 같이 아침식사를 하자고 하려 했지."
"그... 영주님이 계신 성에서요?"
"응."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 칼스였고, 에밀 역시 한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아가씨가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이러니 양해를 좀 해주세요. 자자... 아침식사는 이곳 별채에서 해결하는 걸로 하죠. 저는 다른 이들에게 아가씨도 여기서 식사를 할 테니 함께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고 올게요."
"부탁드립니다. 에밀."
"후후. 단둘이 있다고 애먼 짓을 벌이면 안 됩니다? 아직까지는 말예요."

그렇게 에밀은 별채를 관리하는 하인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방을 나섰고, 응접실에는 왜 자신이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몰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엘레노아와 아침부터 홍역을 치른 칼스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거야? 뭐 일이 잘못된 건 아니지?"
"음. 정확히 말하자면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일찍 온 거예요. 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차버렸거든요."
"오! 정말? 잘 됐다. 근데 그렇게 갑자기 꿀이 많이 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게..."


칼스는 엘레노아에게 픽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꽃의 정령 픽시들이 에올론 마을 인근에 자리 잡았다는 말을 듣고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자기도 꼭 그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고, 칼스는 그들에게 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사이 에밀이 돌아와 아침식사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말했고, 그렇게 혼자 아침을 먹을뻔했던 칼스는 엘레노아와 에밀과 함께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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