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칼스가 엘레노아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어제 그거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이콥이 그를 찾아왔다.
제이콥은 응접실에 칼스 혼자 있는 것이 아닌 에밀과 엘레노아가 함께 있다는 시종의 말에 멈칫했으나 이내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다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제이콥. 이른 시간부터 불러내서 죄송해요."
"아니. 뭐 어차피 만나러 가야 할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니 상관없다. 그나저나 꽤나 이른 시간인데 엘레노아 아가씨도 계시는군요."
"칼스는 별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잖아? 내가 아니었으면 혼자 있다가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을걸?"
"아가씨. 그건 좀 억지가..."
"에밀! 아까부터 자꾸 내 말에 토를 다는 거 같은데?"
티격태격하는 두 여인을 내버려 둔 채 제이콥은 의자 하나를 빼서 칼스의 건너편에 앉았고, 품속에서 두터운 몇 장의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상단을 만들 때 작성해야 할 것들이야. 뭐 내용이야 형식적인 내용들뿐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군."
"어디 보자. 상단명이랑 근거지. 그리고 활동 범위? 이건 뭔가요. 일정 지역 내에서만 상거래가 가능하다는 건가요?"
"활동 범위라고 쓰여있는 건 네가 만들 상단이 단순히 몇 가지 상품을 납품하는 선에서 그칠 건지 아니면 우리 상단처럼 여러 가지 물품을 사고파는 상단이 될 건지 정하는 항목이야. 처음에는 몇 가지 품목만 거래하다가 상단의 규모가 커지면 그 후에 바꿀 수도 있어. 그 부분을 명확히 해야 영지에 낼 세금의 양을 책정할 수 있거든."
"음... 정해진 품목만 거래하면 좀 더 세금을 적게 낸다는 거군요."
칼스는 신고방식에 따라 내야 할 세금이 달라진다는 말에 좀 더 유의 깊게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지. 특히 특정 품목만 거래하는 상단이 우리와 독점계약을 할 경우에는 더더욱 매겨지는 세금의 양이 적어지지."
"으음. 고민되네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일단 여러 가지 물품을 취급하는 상단으로 키워나가는 게 목표이긴 한데. 그렇게 신청하게 되면 한 해에 내야 할 세금이 얼마 정도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거래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소 금화 한 개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구나."
"헉! 그럼 어제 팔았던 꿀 값 대부분이 세금으로 나가게 된다는 거네요?"
최소 금화 한 개 이상의 세금이 물려질 거라는 제이콥의 말에 칼스는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어댔다. 어제 마을에서 가져온 꿀을 모두 판매한 금액이 금화 한 개하고도 은화 서른 개였다. 지구의 한화로 따졌을 때 근 4천만원 가까운 수익을 올린 것이었으나 종합 상단으로 등록하게 되면 그중 3천만원가량은 세금으로 내게 생긴 것이다.
"일반적인 종합 상단의 경우 어제와 비슷한 규모의 거래를 일 년에 수십 회씩 하게 되니 그 정도의 세금이 붙는 거지. 네게는 특별한 상품이 있잖아 그 뭐더라? 로열젤리라고 하던 거."
"로열젤리는 꿀처럼 마구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게다가 로열젤리는 영주님께서 함부로 외부에 물량을 풀면 위험할 수 있을 거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고요. 사실 꿀도 원래는 이렇게 막 뽑아낼 수 없는데 픽시들 덕분에 생산량이 폭증한 거예요."
"내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일 경우를 가정한 거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종합 상단으로 등록하더라도 거래량이 적다면 그만큼 세금을 적게 내지 않겠어? 여태 우리 영지에서 루엠상단 외에 다른 곳이 종합 상단으로 활동한 일이 없어서 다른 대도시의 예를 들었을 뿐이야."
제이콥의 말대로 현재 마를르 남작령에서 외부에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상단이래봐야 루엠상단이 유일하다 싶은 상황이었다.
"루엠상단도 처음에는 단일 품목으로 시작했나요?"
"우리랑은 비교하기가 애매하지. 사실 우리 상단은 만들어진 목적이 부의 축적보다는 부족한 영지 내 물품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데 있었으니까. 세금이랄 것도 매기기 애매한 것이 설립 초기 수십 년간은 세금은커녕 영주님의 가산을 들이붓다시피 해서 유지했었지. 자세한 건 영주님과 직접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네가 영주님의 사위가 된다면 어느 정도의 혜택은 주어지지 않겠나 싶은데."
"나도 아버지한테 잘 이야기를 해볼게."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레노아역시 칼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 말했고, 그런 두 사람의 말에 칼스는 일단 마를르남작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후에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활동 범위에 대한 부분은 공란으로 두고 상단명을 [허니]라 적은 후 근거지는 에올론마을로 적어두었다.
"근데 꼭 근거지를 에올론마을로 적어둘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물품을 사고파는 일 대부분은 이곳에서 이뤄질 거 같은데. 상점 건물을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내가 한번 알아봐 줄게."
"아. 꼭 상점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녜요. 나름대로 제게도 계획이 있다 보니 에올론 마을을 근거지로 둔거거든요. 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요."
이때 엘레노아가 어차피 종합 상단으로 운영할 거면 마를르성에 상점을 하나 구입해 줄 테니 이곳을 근거지로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을 했으나. 칼스는 나름대로 생각해둔 계획이 있었기에 그녀의 말을 완곡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일단 이 정도면 기본적인 정보는 다 적었군. 상단의 문장을 생각해 둔 것이 있나?"
"문장에도 특별한 조건 같은 게 있나요? 가령 어떤 문장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들요."
"일단 금지된 것은 리온 왕가의 상징인 금빛 사자의 형상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 문장은 왕실과 관련된 기관이 아닌 경우에 사용하다 적발될 경우 큰 곤욕을 치를 수가 있어. 그 외에 다른 가문의 문장과 흡사한 모양은 피하고, 특정 종교의 상징들도 웬만해서는 기피하는 게 좋지. 특히 솔라 제국을 상징하는 태양 문양의 경우 몇몇 영지에서는 거부감이 심하니까."
"그렇군요. 종교적 상징과 귀족가의 문장을 피해야한다라. 근데 귀족가의 문장을 모르면 어떻게 하죠?"
"그래서 보통 상단이 소속된 영지의 문장에 자신들이 주로 판매하는 물품을 그려 넣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칼스는 제이콥의 말에 마를르 가문의 상징인 성채의 양옆에 푸른 나무가 그러져 있는 문장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문양에 꿀단지나 꿀벌 그림을 넣어보았더니 영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끙... 이상한 모양이 되어버리는데요."
"안 그러면 아예 상행을 할 때 두 개의 문장을 걸고 다녀도 돼. 하나는 소속된 가문의 문장을 걸고 그 아래 상단을 상징하는 문장을 걸어두는 거지."
"그게 차라리 낫겠네요. 제가 생각한 문장이 다른 가문의 것과 비슷하지만 않는다면요."
"영지 내에 문장사가 있으니 나중에 그를 찾아가 확인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거야."
허니 상단에 대한 대략적인 사안을 정리할 때쯤 마를르성에서 토기를 구워 판매하는 상인이 찾아왔고, 제이콥은 상단에 해야 할 일이 밀려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칼스는 대량의 꿀단지용 토기를 구매했는데, 그는 지금 당장의 물량으론 그 주문을 소화해낼 수 없다며 일단 현재 가지고 있는 물품은 숙소에 머물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나머지 물건들은 완성이 되는 대로 인편을 통해 직접 에올론 마을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전에 칼스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모두 다녀가자 옆에서 이러한 일들을 구경하고 있던 엘레노아가 기다렸다는 듯 칼스를 끌고 별채 밖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이따가 낮에 신전에도 들려야 하는데요."
"아직 점심시간도 안됐잖아? 나가서 옷이나 한 벌 맞추러 가자. 저녁에 어머니랑 아버지께서 분명 너를 식사 자리에 초대할 텐데 그렇게 하고 가려고?"
"그거라면 작년에 여기서 맞춰둔 옷이 있..."
"조용히 하고 따라와! 늦게 가면 치수 조정하기 힘들단 말이야."
칼스는 오전 내내 자신이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가만히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엘레노아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고, 그렇게 그는 내성에서도 귀족들이 주로 방문한다는 의류점에 끌려가 근사한 옷 한 벌을 선물 받았다.
그 후에 내성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까지 해결한 후 엘레노아는 오후에 가문의 기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며 영주성으로 돌아갔고 그제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칼스였다.
"으음. 여러모로 신경 써주는 것 같아 고맙긴 한데 영 부담스럽단 말이지. 아무래도 잘 쳐줘봐야 여고생뻘인데 약혼녀라니... 어휴."
칼스는 잠시 외성에서 머물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 오전에 상인으로부터 구매한 꿀단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며 밤사이 특별한 일이 있는지 물었고, 딱히 큰 문제 없이 편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말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신전에 봉헌하기 위해 남겨뒀던 꿀단지를 챙겨서 다시금 내성으로 들어와 아르케 여신의 신전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작년에 찾아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모습 없이 한산했는데, 가을꽃이 아닌 봄꽃 그것도 영지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레벤틸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도 레벤틸꽃이 이렇게 많이 피는 거 보면 벌통 한두 개 정도는 가져다 둬도 괜찮을 거 같은데... 뭐 당장은 마을 외부로 벌집을 만드는 일은 피해야 겠지만."
"혹시 칼스?"
"아! 하이디아님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내 눈이 아직은 쓸만한 모양이구나. 싱그러운 숲의 기운이 함께하길. 작년에 네가 준 밀랍 덕분에 무사히 기도회를 마칠 수 있었단다. 게다가 네가 여신님을 영접한 모습을 본 신도들이 더욱 신실한 모습으로 기도에 전념해 많은 진전을 보였었지. 오늘도 여신님께 기도드리러 온 것이니?"
하이디아는 잠시 신전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꽃밭 근처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 중인 칼스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네. 올해 갓 떠온 꿀도 조금 가져왔으니 여기 계신 분들과 나눠드시면 될 거 같아요. 아쉽게 밀랍은 올해 벌집을 좀 늘려야 할 거 같아서 가져오지 못했네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단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휠리나 주교도 너를 보면 기뻐할 거다."
하이디아는 칼스와 함께 신전 내부에 있는 기도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여전히 기도에 전념 중인 휠리나를 만나 인사를 나눈 그였다. 그녀들은 이번에도 여신의 기적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기대하면서 칼스가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이번엔 여신이 다른 일[?]로 바쁜 것인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도를 올리자 아르케 여신의 신상에서 은은한 빛무리와 함께 상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에 다들 역시 그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소년이라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역시. 저 아이는 여신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네요."
"휠리나. 작년에 중앙 본당에 이 사실을 알렸지?"
"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제가 직접 올라가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에요. 거기에 작년에 그 일 이후 조금의 성취도 있었고요."
"오오! 설마 대주교의 시험을 치를 때가 된 건가?"
"네. 하이디아님도 아시다시피 저 아이가 다녀간 이후로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그 성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나왔으니까요. 이곳 자매님들 중 몇몇은 주교 시험을 볼 준비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 내가 이곳 마를르성에 파견됐을 때만 해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곳이어서 막막하기까지 했었는데. 여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그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아련한 눈빛으로 빛을 뿜어내는 아르케 여신의 신상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다른 시설들은 그간 조금씩 확장되고 발전했으나 이 기도실 중앙에 있는 이 신상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