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보두앵 마를르 남작은 칼스를 겁주기 위해 일부러 꺼내 보였던 자신의 애검을 제자리에 놓아두며 주눅 들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서있는 그의 모습에 역시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군그래. 일단 자리에 앉도록 아직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으니 말이야."
칼스는 마를르남작의 말에 그의 반대편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레노아 아가씨 건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어째서 저 같은 배경조차 없는 놈에게 혼담을 주신 겁니까."
"흐. 너무 스스로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닌가? 뭐 지금 당장의 모습을 보면 네가 말한 대로다. 왕국 구석에 처박힌 영지에서도 그 끝자락에 있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니. 하지만 세상 모든 이가 좋은 혈통을 타고날 수 없는 노릇이고 늘 밑바닥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곤 했지. 적어도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행보를 생각해 보면 내 결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군."
"여러 가지로 제게 부담이 되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행히 엘레노아녀석도 네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내 귀엽지만 말썽꾼인 막내에 대해서 말이야."
온화한 어조로 물음을 던지는 마를르남작이었으나 칼스는 그의 한쪽 손이 방금 전까지 닦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괜히 여기서 대답을 잘못했다간 분노한 아버지의 참격에 짧았던 이 세계의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그는 재빨리 지구에서 습득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그저 제게는 과분할 뿐입니다. 외모도 제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선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우신데다 마음씨도 고와 보이더군요. 저 같은 녀석과 혼담이 오가면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걸 보면 늘 감사할 뿐입니다."
"흐흐흐. 고 녀석이 제 어미를 닮아 제법 미색이 뛰어나긴 하지. 성격까지 빼닮았다면 앞으로 밤에 고생 좀 하게 될 거야. 아! 아직 이런 말은 조금 이른가? 아무튼 내가 추진한 일인 만큼 어지간하면 이대로 쭉 밀어붙일 생각이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해. 듣기로 네 맞형이 혼인할 때까지는 시일을 미뤄달라고 했다지?"
"네. 영주님께서 진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일단은 형님이 결혼을 하고 나서 했으면 합니다."
"흠. 네 나이가 열둘이고 엘리가 열다섯이니 한두해쯤이야 기다려줄 수 있지. 하지만 약혼 일정까지 늦어서는 곤란해. 괜히 엘리에게 나쁜 소문이 돌 수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엘레노아와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 지어지자 칼스는 자신이 만들 허니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남작님. 이번에 제가 상단을 하나 설립하려고 합니다."
"남작님이라니. 너무 멀게 느껴지지 않나. 이제 그냥 둘이 있을 땐 장인어른이라고 불러라."
"네? 하지만...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자신을 장인어른이라 부르라는 보두앵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해보려던 칼스는 보두앵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확인하곤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 안 그래도 올라온 보고를 받았었지. 근데 꼭 따로 상단을 설립할 필요가 있나? 마을이 외진 곳에 있어서 장사를 하기엔 별로 좋지는 않을 텐데. 차라리 근거지를 여기로 옮기는 게 어때? 그 벌들도 이곳에서 기르고 관리하면 될 거 아니야."
"벌집을 이곳에 만들어 관리할 수는 있으나 그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 거예요. 그리고 제가 구상하는 상품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제 근거지가 어디에 있든 간에 거래를 트기 위해 제가 머물고 있는 마을로 오게 될 겁니다."
"왜지? 꽃이 부족해서라면 마를르 성 인근에 영지민들을 동원해 꽃밭을 조성해도 될 것인데. 그리고 상인들이 그 구석진 마을까지 찾아오게 만들 상품이 있나? 꿀은 아닐 것이고... 설마 그 로열젤리라는 물건을 대놓고 판매하려는 건 아니겠지? 중앙의 늙은이들이 보인 반응을 봤을 때 잘못하다간 큰 횡액을 치를 수도 있어."
"로열젤리는 제 상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장인어른을 통해서만 판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양도 극히 제한적이게 되겠죠. 그리고 벌꿀을 뽑아내는 것도 마을 근처에 픽시들이 자리 잡았기에 다른 곳보다 월등한 생산성을 지니게 됐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서 머무는 게 좋아 보입니다."
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의 일부를 남작에게 들려주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에올론 마을은 동부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엘프들과의 교류를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에올론 마을이야말로 최고의 이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작년 겨울 아르덴 대삼림에서 화재가 있었을 때 자신이 엘프들의 도움 요청에 응했으며 이에 그들의 여왕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엘기간테에 한번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까지 이야기하자 마를르 남작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군! 엘프들이 살고 있는 아르덴 대삼림 속에 있는 도시 엘기간테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싶어 했던 곳이지. 하지만 엘프들은 아르덴 대삼림 외곽에 있는 자신들의 작은 마을들만을 인간들에게 공개했을 뿐 엘기간테에는 그들과 인연이 깊은 소수이 인원만이 발을 디딜 수 있었어. 게다가 그냥 일반 엘프가 아닌 여왕의 초청으로 간다고?"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때 피해가 심각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마침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꿀이었고요."
"으음. 숲과 꽃의 여신께서 확실히 너를 아끼는 게 분명한 것 같군. 생각해 보면 엘프들도 결국 숲에서 살아가는 일족이고 픽시들은 여신님께서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령들이 아닌가. 그리고 네 말대로 엘프들과의 직접적인 거래를 틀 수만 있다면 그 근거지가 어디가 됐건 간에 사람들은 물품을 사러 그곳을 방문하겠지."
칼스의 말에 마를르남작은 무릎을 탁 내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들이 솔라 제국의 참화이후로 인간들과의 교류를 확대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건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터전에서 나오는 물품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고, 가끔씩 엘프 개개인이 가지고 나오는 마법 물품들이 시장에 나올 때면 높은 가격에 팔려나가곤 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상인들이 그들과 직접 거래하기를 원했으나 여태까지 그 누구도 그것을 성사시키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방문하는 길목에 있는 마를르성에서도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거고요."
"거기까지 내다본 건가? 요즘 시골마을 촌장의 교육수준이 어지간한 귀족가보다 나은 것 같군그래. 그렇지 사람이 오가면 자연스럽게 돈이 오갈 것이니. 그런데 엘프들과의 거래를 이끌어낼 수 있겠나? 우리 영지에도 텔드라스라는 엘프 한 분이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긴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분일 뿐 그들은 여전히 외부와의 접근을 최소화하고 있어. 우리 루엠상단에서도 텔드라스님을 통해 엘프들과의 거래를 해보려 했으나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었지."
"일단 당장은 거래를 트기 힘들다고 해도 꾸준히 교류를 이어나가면서 신뢰감을 쌓아나간다면 언젠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엘프들의 물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상품들을 구상해둔 것도 있구요."
"그 향기 나는 비누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안사람들이 썩 만족해하는 눈치더군. 향유 같은 경우에는 향기는 더 진하고 오래가는데 비해 몸을 씻어내는 기분이 덜하다면서 말이야."
"네. 그런 것들도 조금씩 더 개선해나가면 충분히 매력적인 상품이 될 겁니다."
마를르 남작은 칼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단순히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닌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좀 더 손해를 보는 거라 생각했던 이 혼담이 오히려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엘레노아야 리온 왕가와 연줄이 닿아있다고는 하나 변방의 작은 영지를 가꾸는 남작가의 여식일 뿐이었고, 이에 반해 칼스는 여신의 관심을 받는 데다 엘프여왕과의 인연까지 닿아있는 재능 넘치는 소년. 만약 이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게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단일 품목을 납품하는 것이 아닌 종합 상단으로 등록하고자 하는데, 당장은 거래할 품목이 꿀밖에 없다 보니 고민입니다."
"고민의 주된 이유는 역시 세금이겠지? 일단 후자의 경우에는 내야 할 금액의 단위가 달라질 테니 말이야."
"그렇다고 세금을 회피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규모를 어느 정도 키울 때까지는 적당한 선으로 유지해주십사 부탁드려보는 거죠."
"좋아. 네 의견도 묻지 않고 혼담을 진행시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세금 부분에선 일반 상단과 비슷하게 적용하라고 크리스티안에게 말해두도록 하지. 다만 그가 생각했을 때 적당한 시점이라고 여겨질 땐 다시 정상적인 액수로 올릴 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음... 그럼 슬슬 식사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나는 잠시 다른 일을 봐야 하니 너는 이곳에서 쉬고 있도록 해. 시간이 되면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식당에서 다시 보자고."
마를르남작은 칼스가 잠시만이라도 푹 쉴 수 있게끔 자리를 비워주었고, 그런 그의 배려 덕분에 넓은 접객실에 홀로 앉아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칼스였다. 상단의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잘 풀린 것 같은 데다 무엇보다도 남작이 그가 구상하고 있는 계획에 크게 동조해 주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이제 겨우 한고비를 넘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시종의 말에 안내를 받아 마를르 남작가의 식당에 들어선 칼스는 자신을 향해 꽂히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과연 자신이 음식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들 반겨주도록 해라. 저 아이가 우리 집안의 귀염둥이 엘리를 꿰어찬 당돌한 녀석이니 말이야."
"아... 안녕하십니까. 에올론 마을의 칼스라고 합니다."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엔 마를르 남작이 앉아있었고, 그의 옆으로는 세 명의 중년 미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남작의 부인들인 듯 보였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식탁을 따라 십여 명의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고, 그중 끝자락에 앉은 엘레노아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칼스가 앉을 자리인 듯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을 받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왠지 모르게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엘레노아는 칼스를 자리에 앉히곤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이야기했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평소엔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지도 않으면서 네가 온다니까 궁금했는지 죄다 모인 것뿐이니까. 그리고 우리 집은 딱히 식사예절에 있어서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니까 기본적인 것만 지키면 돼. 그리고..."
나름 자신 때문에 곤욕을 치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칼스를 챙겨주는 엘레노아였으나. 그런 모습을 본 남작의 세부인들 중 화사한 금발의 여인이 짙은 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한 여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캐롤린. 저 아이가 제 짝이라고 벌써부터 저렇게 챙기는 모습을 보이네."
"끄응... 마가렛언니. 저는 아직 저 녀석을 우리 엘리의 남편감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이미 많이 늦은 것 같은데? 저거 봐 딱 다들 보고 있는데 딱 달라붙어선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잖아?"
"어휴! 쟤는 어미 속도 모르고!"
세 남작부인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밖에서 시종들이 음식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고, 칼스는 남작가의 저녁식사 치고는 꽤나 소탈한 편인듯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귀족가의 식사 치고는 소탈한 것 같다는 것이지 마을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식사보다는 훨씬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