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전채요리로 나온 샐러드를 맛본 칼스가 독특한 향의 드레싱에 내심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남작의 옆에 있던 첫째 부인 마가렛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듣기로는 올해 열두 살이라고 하던데.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그 나이대로 보이지가 않는구나. 혹시 나이를 속이거나 한건 아니겠지?"
"전 올해로 열두 살이 된 것이 맞습니다. 그저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다 보니 점점 이렇게 덩치가 커져버리더군요."
칼스는 마가렛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고, 그녀는 그런 답변을 듣고서는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캐롤린을 향해 어떠냐고 묻는듯한 눈빛을 보내었다.
"그 정도 기본은 되어있어야지요. 가진 것 하나도 없는 주제에 게으르기까지 하면 구제불능의 머저리나 다름없으니까요."
"저 말은 정말 사실이에요 어머니. 얼마 전 칼스의 마을에 방문했을 때 아침 수련을 하러 밖을 나왔는데 쟤는 벌써 나와서 몸을 풀고 마을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있더라니까요?"
엘레노아는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에올론 마을에 머물렀을 때 봤던 칼스의 일상을 생동감 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련을 하던 이야기에서 시작됐으나 어느새 그 이야기의 화제는 여신의 가르침을 받아 시작했다는 벌을 키우는 일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가게 됐다.
"글쎄. 작은 나무 통을 열었더니 그 안에 벌이 수천 마리는 넘게 모여있더라구요."
"에이.. 과장이 좀 심한 거 아냐? 기껏 해봐야 수백 마리 정도였겠지. 벌이 얼마나 사나운 곤충인데."
"아니 정말이라니까? 나는 그렇게 벌이 많이 모여있는 건 처음 봤어. 게다가 그런 나무 통이 열 개도 넘게 있었지."
엘레노아의 말에 그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아 보이는 남자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빈정스러운 답에 억울하다는 듯 자신이 봤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맛봤던 갓 따온 벌꿀의 달콤한 맛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을 때 마침 이날 저녁의 메인메뉴인 꿀과 버터를 이용해 맛을 낸 소고기 스테이크가 등장했다.
마를르 남작가의 주방장이 직접 나와 요리에 들어간 주요 재료와 조리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어제 칼스가 가지고 온 꿀을 활용해 다양한 요리를 준비했다는 말에 다시 한번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칼스 네가 이곳에 꿀을 가지고 올 때면 달콤한 꿀이 가미된 요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게 좋은 것 같군그래."
"정말 달콤한 꿀에 고소한 빵을 찍어 먹을 때면 기분이 확 풀린다니까."
남작과 그의 가족들은 금세 메인 요리를 해치우고 곁들여 나온 빵과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칼스 역시 자신의 몫으로 나온 요리는 다 목구멍으로 넘기긴 했으나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때 가져온 꿀로 만든 술은 안 가져온 거야? 그거 독하면서도 달큼한 게 아주 끝내주던데."
"아. 벌꿀 술은 다음번에 가져올 계획입니다. 아직 맛이 덜 영글어서요."
"그래? 그건 좀 아쉽군그래. 아 참! 난 엘레노아의 큰 오빠인 레오폴드라고 한다. 처음에 너와 약혼을 시킬 거라는 소식을 듣고 씩씩거리며 나갔던 엘리가 돌아와선 얼마나 네 이야기를 해대던지. 사실 난 네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았다니까?"
"오라버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이크. 아무튼 나는 일단 네가 엘리와 이어지는 데에 딱히 유감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근데 저기 있는 알베르 녀석이나 파비올라는 엘리를 어렸을 때부터 엄청 귀여워한 녀석들이니 조심해야 할 거야. 아 참! 셋째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하하. 조언 감사합니다."
나름 칼스에게 도움을 준다는 듯 태연하게 이야기한 레오폴드 마를르였으나 식당 내에 모든 이목이 칼스에게 집중된 상태였기에 그가 지목해 준 당사자들은 칼스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마치 '네깟 녀석이 우리 막내를 데려간다고?'라고 말하는듯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중에서도 엘레노아와 같은 어머니를 둔 알베르 마를르는 이곳에 마를르남작과 다른 어머니들이 안 계셨다면 당장에라도 칼스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흥! 내 동생을 데려가려면 적어도 내 검을 10번 이상 받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머! 우리 영지에서 검술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너에게 10번의 검격을 받아낼 이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 동생을 평생 옆에 끼고 살 참이야?"
"멜리사 누님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가능만 했다면 진짜 다른데 시집 안 보내고 제 옆에 끼고 살았을 거예요."
"어휴..."
"흥! 오빠의 검은 내가 받아내면 돼! 칼스는 내가 지켜줄 테니 말이야."
"저! 저 저! 벌써부터 엘리 치마폭 뒤에 숨는 꼴을 봐!"
알베르 마를르가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엘레노아의 말에 발끈하여 소리치던 바로 그 순간. 여태껏 가만히 이 소란스러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캐롤린 마를르부인이 나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알베르. 잠시 가만히 있거라 너무 흥분한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칼스라고 했지? 내가 엘레노아의 친어머니인 캐롤린이다. 사실 나는 줄곧 부군께 요청하여 엘레노아를 바렌튼 백작가의 아들과 엮어주려 했었다. 그는 동부 왕국 전역에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검술 실력이 빼어나다고 소문이 났으니 엘레노아의 바램을 어느 정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야. 게다가 바렌튼 백작가의 후계자이기도 하니 측실이라고는 해도 우리에게는 꽤나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거야."
"어머니! 하지만 그는 저보다 나이가 곱절은 더 많다구요!"
"엘레노아. 네가 태어나 지금까지 누린 모든 것들은 마를르 가문에서 나온 것이야. 그런 만큼 너도 가문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야 한단다. 어쨌든 가문의 가주이자 네 아버지에게도 언질을 넣었지만 그런 그보다도 바로 너 칼스를 선택한 것이다. 너는 과연 바렌튼 백작가의 소가주보다 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부하느냐. 또한 엘레노아가 너와 결혼했을 때 결코 후회할 일이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느냐?"
캐롤린의 진지한 질문에 칼스는 자세를 고쳐잡고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답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후회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장담키 어렵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그 후회라는 것이 저라는 존재에 의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지금은 비록 이름 없는 시골마을의 작은 소년에 불과하나 언제고 동부 왕국. 아니 대륙 전체를 넘어 온 세상에서 저와 엘레노아의 이름을 알게 되도록 거대한 상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고작 장사치를 지향하면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냐?"
"지금 이 자리에 올라온 온갖 음식들과, 여기 계시는 마를르가의 여러분들 몸에 걸쳐진 것들 모두가 그 장사치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비록 검과 마법과 같은 직접적인 힘은 모자랄지 모르나 재력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중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바로 그 재력을 제 힘으로 삼아 뻗어 나갈 것입니다."
한때 고위 귀족가의 영애를 지키던 수호기사였으며, 마를르남작과 결혼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일선에서 활약했던 여기사의 기백을 그대로 받아넘긴 칼스는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그들 앞에서 밝혔다.
그런 그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음일까 캐롤린은 굳어있던 표정을 어느 정도 풀며 자신의 딸인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칼스가 자신의 어머니의 물음에 당당히 답하는 모습을 보며 어떠냐는듯한 표정으로 캐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정말 이 결혼에 만족할 수 있겠니?"
"어머니께서도 방금 들었잖아요? 칼스가 비록 저보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남다르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후우~ 알겠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괜찮다니 원하는 대로 하거라."
캐롤린은 그렇게 말하며 이제 자기가 할 말은 다했다는 듯 준비된 디저트에 손을 뻗으며 남편인 마를르남작에게 슬쩍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여태껏 가만히 가족들과 칼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보두앵 마를르남작이 가볍게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 짝짝
"자. 그럼 칼스를 엘레노아의 약혼자로 받아들이는데 이견이 없음을 확인한 걸로 하겠다."
그런 남작의 말에 알베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아버지! 저는 아직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알베르. 이제는 엘레노아를 걱정하기보다는 네 집사람을 챙기는 게 중요하지 않겠느냐. 언제쯤 손주를 내게 소개해 줄 것이냐."
"그. 그게 노력은 하고 있는데 검술 수련을 하다 보니 시간이..."
"검술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가족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네 아내가 요새 틈만 나면 네 어머니를 찾아와 하소연을 늘여놓는다 더구나."
알베르는 보두앵의 말에 자신의 옆에서 조신하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말 없는 질문이 담긴 눈빛에 원망과 당혹감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런 아내의 표정을 본 알베르는 조용히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마를르 남작가의 가족들과의 첫 식사는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는 캐롤린과 엘레노아 그리고 그녀의 몇몇 누이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가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칼스는 자신이 왜 마를르가문의 여러 여성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은 잠자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를르남작의 셋째 부인인 캐롤린과 그녀의 딸 파비올라, 그리고 엘레노아의 배다른 누이인 멜리사만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첫째 부인인 마가렛과 둘째 부인 헨리에타까지 들이닥쳐 마를르가의 모든 여성진이 포진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호호호.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다른 건 몰라도 캐롤린은 자신이 한말은 지키는 아이니까."
"아이라는 지칭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일단 마가렛언니의 말처럼 이제는 딱히 너를 몰아세우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편하게 앉거라."
"그나저나 이 비누라는 거 네가 만든 거라고 하던데 사실이니?"
마를르남작의 세부인중 둘째부인인 헨리에타는 크리스티안 루엠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녀의 부모 역시 루엠상단에 속해있었고 어렸을 때는 직접 상단의 일을 돕기도 했었기에 마를르남작가의 집안 살림은 그녀가 도맡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는 얼마 전 에올론 마을에 다녀온 제이콥으로부터 특이한 물건을 받았는데 바로 레벤틸 향이나는 비누였다.
"네. 아무래도 꿀만 가지고 상단을 꾸려가기에는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꿀이 제법 비싼 조미료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이잖아요. 제대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저만이 내세울 수 있는 상품이 필요하다고 여겨져서 만들어보고 있는 게 바로 그거예요."
"흠... 확실히 이런류의 물품이 제대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큰돈을 끌어모을 수 있긴 하지. 하지만 이 비누라는 것 역시도 다른 곳에서 만들어 사용하고 있기는 매한가지 아니니? 당장 성내의 시종들에게만 가더라도 이와 비슷한 물품을 사용하고 있단다. 물론 네가 만든 비누라는 게 향이 뛰어나고 잡내가 거의 없다고는 하나 결국 이런 것들은 다른 이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물건이야."
"그렇긴 할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게 상품에 담긴 보이지 않는 가치예요. 만약 똑같은 레벤틸 향이 나는 비누가 있는데 하나는 꽃의 요정인 픽시가 키워낸 꽃에서 추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야생 레벤틸꽃에서 추출한 것이라면 과연 귀족들은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될까요?"
"음... 가격차이가 크지 않다면 전자를 선택하겠지. 아무래도 뭔가 더 좋은 기운이 담겨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바로 그런 물품을 만들어낼 거예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꾸준한 홍보를 통해 [허니]라는 상단에서 만든 물품은 특별하다는 인식이 형성되면 그때부터는 약간의 웃돈을 얹어 판매한다고 해도 줄을 서서 사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