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36/65)



〈 36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허니상단에 필요한 인재까지 확보한 칼스는 바로  다음날 에올론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를르성의 용병 길드에 다시 들러 짐꾼으로 쓸 인원을 고용한 그는 시장을 돌며 귀환길에 챙겨갈 물품들을 매입했다.

"흐음. 이 보리들 묵힌 보리인가요?"
"에이! 어디서 그런 섭섭한 말을! 그 녀석들은 한 해를 묵힌 것이 아닌 올해 막 수확해서 가져온 것들이지. 부모님 심부름으로 왔어? 어때  사갈 테냐?"
"가격이 어떻게 되죠?"
"한 포대에 은화 1개. 어때 싸지?"
"뭐어? 은화 1개? 에이~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여? 얘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묵은 보리랑 새보리도 제대로 구분 못할  같아? 안쪽은 보니까 죄다 섞어놨구먼."

상인은 웬 꼬마 녀석이 보리를 사겠다고 기웃거리기에 적당히 웃돈을 얹어서 팔아먹을 생각을 했으나 제법 눈썰미도 있는 데다 다시 한번 자세히 둘러보니 그 소년을 보호하듯 서있는 두 북방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보기에도 험한 생활을 해왔을 거라 생각되는 남자가 윽박지르듯 소리치자 찔끔 겁에 질린 상인은 칼스에게 다시금 보리값을 제시했다.

"으흠! 그. 그럼 동전 50개만 다오."
"40개로 하죠. 40개!"
"아니. 그래도 새 보리가 반절은 섞인 거라  정도까진..."
"40개. 안되면 한바탕 뒤집어보죠 뭐. 처음부터 속여먹을 작정으로 가격을 매긴 건 그쪽이니까. 앙켈젠 지금 루엠상단으로가서 제이콥 씨 좀 불러와줄래요?"

칼스가 뒤에 서있던 앙켈젠에게 루엠상단의 제이콥을 언급하며 이야기하자. 이 꼬마의 배경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은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으으~! 좋아 40개에 넘기마."
"감사! 자 그럼 여기 은화 10개치만 주세요."
"2...25포대나?"
"왜요. 안돼요?"
"젠장! 가져가라 가져가! 올해 봄 장사는 조졌구먼!"


칼스는 억장이 다 무너졌다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짐꾼들에게 보리를 수레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보리는 뭐 하러 그렇게 많이 구입하는 거야? 벌을 키운다더니 요새 벌은 보리도 먹나?"
"아뇨. 이건 제 비장의 아이템을 만들 재료예요. 아마 여러분들도 나중에 이게 완성되면 아주 좋아할걸요?"
"뭔지는 모르지만 기대되는구만. 혹시 맥주?"
"에이. 맥주 정도야 아무리 낙후된 우리 마을에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비장의 아이템이라고 말하지는 않죠."
"어휴. 궁금증만 더 커지게 만드는구만. 쩝... 다음은 어디로 가면 돼?"
"어디 보자. 나무 통을 좀 사야 하는데... 아! 저쪽에서 팔고 있네요."

칼스는 보리를 매입하고 나서 나무로 만들어진 통까지 구매했고,  후엔 마를르성의 토기상인들을 찾아가 특이한 형태의 토기를 주문했다.

크기는 대형 항아리만큼 커다란 것이 아래위가 뻥 뚫려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마치 주전자처럼 긴 주둥이가 튀어나온 형태였다. 처음에는 말로 설명했던 칼스였으나 도무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전통식 증류기인 소주고리였다.


"끙... 그러니까 이렇게 위아래가 뚫린 항아리를 만들되 한쪽에는 주둥이를 붙여달라는 거지?"
"네. 이쁘게 모양을  필요는 없으니 크고 튼튼하게만 만들어주세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다... 난생처음 보는 모양새라. 그린 대로 만들어내려면 시행착오도 생기고 기간도 좀 걸릴 텐데. 몇 개나 필요한 거냐?"
"많을수록 좋긴 한데... 일단 5세트만 주문할게요."
"으음. 실패하는 것까지 고려해서 두   세트당 은화 2닢은 받아야겠다. 대신 크기는 최소 저기 있는 단지보다는 크게 만들어주마."
"좋아요. 그럼 이것도 저번에 주문한 꿀단지를 가져올 때 함께 가져오는 걸로 해줘요."
"알았다. 허참...  수십 년간 여러 그릇을 만들었지만 이런 특이한 놈은 또 처음이군."


그렇게 차근차근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마쳐가는 칼스였고, 그날 오후엔 하루 동안 소식이 없었던 스티븐이 여동생을 데리고 여관에 나타났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깡말라있었는데 스티븐은 그런 그녀를 칼스의 앞에 데리고 와서 인사시켰다.


"칼스님. 말씀하신 대로 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스밀라? 인사하렴 이분이 내가 말한 칼스님이야."
"안녕하세요..."
"안녕? 세상에 얼마나 제대로 먹지를 못했으면 이 귀여운 얼굴이 비쩍 말라버렸을까. 안되겠다 일단 뭐라도 좀 먹자. 스티븐 너도 일단 이리 와서 같이 먹어."


칼스는 그렇게 말하며 여관 주인을 불러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양의 음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듯하게 데워진 수프와 빵 그리고 채소가 곁들어진 샐러드가 들어왔고, 스밀라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순식간에 차려진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뺏어갈 사람 없으니까."
"에엡... 감사. 우물우물. 합니다."


 남매가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던 그때. 제레미가 루엠상단의 일을 모두 정리했는지 여관에 찾아왔다.

"제레미! 그쪽 일은 다 끝난 거예요?"
"네. 일단 제가 하고 있던 일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인계하고 왔습니다."
"고생 많으셨겠네요. 아참 식사는 하셨어요?"
"루엠상단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온 참입니다. 그럼 언제 마을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마침 모여야  사람들도 다 왔으니 내일 오전에는 출발할까 해요. 있다가 관청에 가서 최종적으로 상단 접수 신청서를 내고 영주성에 들러 인사를 드리면 이곳에서의 일은 다 끝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겠습니다."


남작가의 가족들과 왕래를 어느 정도 하는 편이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마음 편히 만나긴 힘든 모양인지 제레미는 숙소에 남아 다른 일행들과 친해질 시간을 갖겠다 말했고, 칼스는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스티븐 남매와 제레미가 묵을 방을 잡아준 후 영주성으로 향했다.

이미 오전에 별채를 나서면서 저녁에 영주성에 들러 인사를 드리겠다는 연락을 취해둔 칼스였기에 먼저 관청에 가서 최종적으로 허니 상단의 창단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영지 재무관이자 루엠상단의 총수인 크리스티안 루엠이 직접 수령해 주었다.


"흐음. 영주님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다. 종합 상단으로 키워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다던데."
"네. 물론 앞으로도 루엠상단과는 좋은 관계를 이어갈 거예요. 어쨌든  가족이 될 분들이 운영하는 곳이니까요."
"우리로서도 영지에 그럴듯한 상단이 하나 더 생기면 나쁜 일은 아니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칼스 허니상단주."
"감사합니다. 재무관님."
"그나저나 상단의 문장이  귀엽군. 이건 벌을 그림으로 나타낸 건가?"
"네. 아무래도 저희 상단의 상징이  친구들이니까요."

칼스가 허니 상단의 문장으로 등록한 것은 바로 꿀벌의 모습을 간략화하여 그려낸 것이었다. 그렇게 상단 등록 절차까지 모두 마친 칼스는 크리스티안 루엠이 건네준 증명서 역할을 하는 양피지를 받아들고선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내일 마을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마를르가의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엘레노아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영주성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정원을 거닐었다.


"내일이면 돌아가는 거네?"
"네. 아무래도 이번 방문 자체가 갑자기 늘어난 꿀을 급하게 팔려고 온 거라서요. 당장 봄철이라 준비해야 할  많은데 며칠간 마을을 비우다 보니 영 마음에 걸리네요."
"다음번엔 언제쯤 올 거야?"
"글쎄요. 몇 달간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다음 달엔 신전에서 마을에 방문해 주시기로 해서 그분들을 모셔야 하고, 그러면 또 여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가을이나 돼야 좀 여유가 생기겠네요."
"아니 무슨 일은 너 혼자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좀 맡기면 안 돼?"
"엘레노아도 알다시피 제가 배운 지식이 좀 특별하잖아요. 그래도 올해만 잘 넘기면 내년부터는 많이 여유로워질 거예요."


엘레노아는 칼스가 분명 자기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둘이 있게 되면 응석을 부리곤 했다.

"내년이라... 좋아. 내년까지 나도 최선을 다해 검을 수련해서 정식 기사 자격을 따내볼까?"
"그럼 그땐 마를르경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후후. 멋진 갑옷을 입고 찾아갈 테니 기대해도 좋아."

엘레노아는 정식으로 기사서임을 받고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고, 마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듯한 그녀를 바라보던 칼스는 자기도 모르게 엘레노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엉겁결에 칼스의 품에 안기게 된 엘레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이에 칼스는 짓궂은 미소를 짔더니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흐읍??!"

단순한 버드키스 정도를 생각했던 엘레노아는 자신의 입을 헤집고 들어오는 칼스의 설육에 몸을 파르르 떨었고, 칼스는 그런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간질이듯 희롱하며 정신을 쏙 빼놓곤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었다.

"너... 너!"
"그럼 다음에 볼 땐 멋진 여기사님이 되어있길 기원할게요. 그럼 안녕히."

그는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아의 손에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키스를 한 후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 역시 붉게 상기어있었고 심장은 마치 전력 질주로 마을을  바퀴 돈 것처럼 쿵쾅대고 있었다.

'칼스 너 제정신이냐? 엘레노아는 아직 잘 쳐줘봐야 여고생 뻘이라고, 거기서  나가면 범죄야 범죄.'


그렇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식히며 영주성을 빠져나오는 칼스였으나 그 역시 이곳에서는 겨우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날 칼스가 외성의 여관으로 들어가 귀환 준비를 하는 일행을 돕는 동안 엘레노아는 자신의 방에서 얼굴을 붉힌  하루 종일 멍하니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던 에밀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온 후 말했다.


"했네! 했어! 칼스  녀석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더니 제법이잖아?"


한 소녀가 잠 못 이루는 밤은 지나가고 동이  무렵이 되자 칼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마를르성을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 에올론 마을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왔던 이들의 수는 열  남짓이었는데, 지금 에올론마을로 향하려 하는 이들의 수는  배를 훌쩍 넘긴 듯 보였다.

"칼스! 우리는 준비  됐다."
"상단주님. 짐꾼들도 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아요! 다들 마지막으로 빼놓은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칼스 일행은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만끽하며 에올론 마을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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