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 부우우우우웅!!
양봉장은 칼스가 마를르성으로 떠날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벌들은 끊임없이 벌집과 꽃밭을 오가며 꿀과 꽃가루를 가져왔고, 새로 태어난 벌들은 벌집 주변을 배회하며 스스로 하늘을 나는 훈련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양봉장의 모습이 궁금하다며 따라온 인원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벌들의 모습에 압도된 듯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 안으로 그냥 걸어들어간다고?"
"대장. 나도 살면서 실수로 벌집을 몇 번 들쑤셔본 적이 있긴 한데 이건 상상이상으로 많은데?"
"세상에! 이런 광경은 정말 처음 보는군요."
"나 지금 상단 경비일에 투입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어 링메인."
"그래? 나는 궁금한데? 과연 저 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야."
세르티네는 링메인의 말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백수천 마리의 벌들의 모습을 상상했고, 뻔히 보이는 결말에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휘저어댔다. 그사이 잭은 스티븐에게 벌집을 관리할 때 사용하는 여러 도구들의 사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스티븐은 자신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들이 내는 날갯소리에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잭 형님 이...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아직 벌집 근처로는 가지도 않았는데 뭘 그리 쫄아있어. 나중엔 직접 네가 저 벌집을 열고 안에 있는 벌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고, 지금 알려주는 물건들이 그때 벌들에게 쏘이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니 정신 차리고 들어두란 말이야."
"네!"
잭은 제법 선배티를 내보이며 칼스가 만든 간이 훈연기의 사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칼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벌통의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벌집을 하나씩 빼어 내부를 확인해 보았다.
"먹이가 풍부하다 못해 넘치니까 여왕벌이 알을 엄청 많이 낳는 것 같네. 잘못하다간 벌통 안의 집이 꽉 차서 밖으로 탈출하겠는걸. 작년에 여유분으로 만든 집들이 얼마나 남아있나 확인해봐야겠어."
그렇게 몇 개의 벌통을 열었다 닫으며 내검을 하기 시작하자 먼발치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하나둘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그중에 앙켈젠은 오늘 상단주인 칼스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대상인 칼스의 모습과 그 주변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벌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앙켈젠은 어느 순간 표정을 다잡더니 성큼성큼 칼스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부우우우우웅!
"으윽! 당당한 초원의 전사가 이따위 벌레들에게 겁을 먹을까 보냐."
"어? 앙켈젠. 여기까지 와서 호위를 서실 필요는 없는데."
"아니 그래도 우리를 고용한 고용주를 내팽개쳐둘 수는 없잖아.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할 텐데 나도 익숙해져야... 으앗!"
"하하. 그런데 왜 식은땀을 그렇게 흘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줄 수 나 있겠어요?"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 그나저나 멀리서 봤을 때도 놀라웠는데 가까이 오니 이건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군. 온 사방에서 날갯소리가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
"얘들은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거의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으니 급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돼요. 뭐 그래도 한두 방 쏘일 각오는 해야 하지만요. 봐요 저도 여기 벌써 한군데 쏘였는걸요."
칼스는 긴장감에 행동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져버린 앙켈젠에게 벌통 주변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잠시 후 그는 몇 개의 벌통을 내검하는동안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여왕벌이 붙어있는 소비를 들어 상태를 확인하는 칼스의 옆에서 함께 벌들을 살피기까지 했다.
"이 작은 판때기 하나에 몇 마리가 붙어있는 거야?"
"흠... 대충 2~3천 마리? 얼추 그 정도 될 거예요. 보통 이런 벌통 하나에 2만 마리가 좀 넘게 살고 있으니까요."
"으아! 그럼 벌통이 지금 수십 개니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거군?"
"그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꿀을 따오니까 그 양이 어마어마하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서야 이 녀석들이 좀 이뻐 보이는군그래. 결국 이놈들이 우리들의 봉급을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런 셈이죠."
딱히 벌들의 움직임에서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기에 간단히 내검을 마친 칼스는 아직도 훈연기를 가지고 씨름 중인 잭과 스티븐을 향해 걸어갔다. 스티븐 역시 처음에 그 겁에 질렸던 모습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진지한 눈빛으로 잭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잭! 잘 돼가?"
"이제 겨우 지나가는 벌소리에 안 놀랄 정도까지는 된 거 같은데."
"방금 벌통을 열어봤는데 전에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벌통의 꿀이 가득 차있어서 좀 빼내야 할 거 같아."
"안 그래도 제니랑 나랑 그것 때문에 네가 좀 더 늦게 도착하면 둘이서라도 채밀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어. 문제는 꿀을 담아둘 단지가 없었다는 거였지. 근데 이제 꿀단지도 넉넉하게 생겼으니 다시 꿀을 뽑아내야겠지."
잭은 칼스의 지시에 빈 꿀단지들을 쌓아두었던 자리를 가리키며 알겠다 답했다.
"마을 애들 중에 쓸만한 녀석들은 없었어?"
"눈에 띄는 애들이야 몇몇 있지. 왜 걔들도 뽑아서 쓰려고?"
"응. 아무래도 벌통 개수가 많이 늘어날 것 같아서."
"주앙이랑 켈리 이 둘은 당장 데려다 놔도 어느 정도 일을 할 정도는 될 거야. 나머지 애들은 고만고만하고."
"그럼 그 둘이랑 제니까지 불러서 오후에 꿀을 좀 뽑아내는 걸로 하자."
칼스는 그날 오후 잭이 언급했던 두 아이를 불러 채밀 작업에 들어갔고, 그날 뽑아낸 꿀들 중 일부는 꽃밭에서 살고 있는 픽시들에게 가져다주기로 했다.
제레미는 오후에 꿀이 채밀되는 모습을 보더니 그 엄청난 양에 놀라워했는데 심지어 이것이 전체의 1/4도 안되는 수준이라는 제니의 말에 허니 상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지 체감하게 되었다.
"이런 꿀을 1년에 몇 번씩이나 뽑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이거 제대로 판매 계획을 잡지 않으면 주변의 꿀 시세가 박살이 날 수도 있겠군요."
"다행인 건 꿀은 그 자체만으로는 상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거죠. 거기에 꿀 자체로만 소비하지 않고 술을 담그거나 꿀에 절인 보관식을 판매하는 식으로 나눠서 판매할 거고, 아직은 큰 틀의 계획만 세워둔 것인데 또 다른 판매상품들도 이미 생각해 둔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말대로만 이뤄진다면 적어도 동부에서는 독보적인 상단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사이에 상단 규모 자체도 좀 키워야겠지만요. 왜 상단주님이 근거지를 이곳 에올론마을로 고집하나 싶었는데 다 이미 어느정도 계산이 되어있으신 거였군요."
"그러니까 그 부분까지 감안해서 상단 운영계획을 짜줘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제레미가 그 부분에 있어선 뛰어나니까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날 이후 제레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일단 마을 촌장인 한센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마을 사람 몇 명을 정식으로 상단에 고용했다. 그리고 칼스에게 건의해 허니 상단의 경비 대장직을 신설해 그 자리에 밍슈펠트르를 임명하더니 고용한 마을 사람들을 훈련시키게 했다.
그러면서 제레미는 상단 직원이 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칼스와 허니 상단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시키는 교육을 담당했다.
칼스는 그동안 마을 목수인 잭슨과 함께 아르케 신전에서 찾아올 인원들이 머물 공간을 만드는데 신경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몇 주 사이에 제법 그럴싸한 형태의 임시 신전이 상단 한쪽에 만들어졌다.
"후우.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떠냐 칼스."
"음. 좋네요! 촉박한 시간이었는데 대단해요."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사제님들이 머물 공간이라는 말에 제법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니 네가 잘 좀 말해서 우리 마을에도 사제분들이 머물 수 있게 해봐."
"네. 그래봐야죠. 으음... 근데 뭔가 건물 밖이 좀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
마을의 여건상 석재를 활용한 건물을 짓는 건 불가능했기에, 목재로 지어올린 건물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창고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을 자체가 장식품이라곤 하나 없다 보니 그런 것 아니겠냐. 멋들어진 조각상이나 정원 같은 게 없으니 건물만 휑해 보이는 거지."
"조각상이라... 아직 스티븐에게 그런 걸 맞기긴 그렇고, 정원은 한번 이야기만 잘 하면 될 거 같은데. 고마워요 잭슨 아저씨!"
"그래. 나는 며칠 좀 쉬다가 제레미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부탁한 일을 하러 가야겠다."
"제레미가 뭐 따로 부탁을 한 게 있어요?"
"마을 입구 앞쪽에 숙소로 쓸 건물을 올려야겠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몇몇이 마를르성에 자재를 사러 갔지 않냐."
"아! 그 일까지 잭슨 아저씨가 하시는군요."
"누구 때문에 말년에 이게 뭔 고생인지. 아무튼 난 먼저 간다!"
잭슨은 피곤해하면서도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고, 칼스는 임시 신전주변의 휑한 공간에 작은 꽃밭이라도 만들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픽시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픽시들이 만든 꽃밭의 영역은 이제 더 이상 넓어지지는 않고 있었고, 그 꽃밭 주변에는 늘 마을에서 혹시나 픽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찾아든 마을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누이인 에일린의 말에 따르면 픽시들 중에 몇몇은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걸로 보아 픽시들도 어느 정도 사람들과의 접촉에 익숙해져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처음에 픽시들이 자리 잡은 꽃밭이 마을 근처에 있다는 상단주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었는데."
"후후. 픽시들은 만나봤어요?"
"아니!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나 동료들이 근처로만 가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고, 멀리서 보면 마을 애들이랑은 곧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낯을 좀 가리는 편인 것 같아 보여요. 뭐 세르티네나 링메인도 여기에 살다 보면 저들이랑 친해질 수 있겠죠?"
"아무튼! 그래서 오늘 상단주가 픽시들을 찾아간다는 말에 앙켈젠이랑 망구다이가 간다는데도 우리가 나온 거야. 그래도 우리가 그 떡대 둘보다는 낫지. 암!"
세르티네와 링메인은 픽시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는지 제법 묵직한 꿀단지를 들고서 칼스의 뒤를 쫓아 꽃밭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그 꿀단지들의 무게가 제법 나갔기에 앙켈젠과 망구다이를 데리고 오려 했었는데 그녀들이 부득불 자신들이 가야 한다고 빼앗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기대를 알기라도 하듯 칼스가 꽃밭의 영역에 발을 내딛자 꽃들 사이에서 몇몇 픽시들이 날아들더니 주변을 맴돌며 재잘댔다.
[앗! 칼스야!]
[어? 정말 칼스가 왔네? 근데 뒤에는 처음 보는 인간들인데?]
[얘네들 꿀을 들고 있어! 그거 우리 주려고 가져온 거야?]
"안녕? 혹시 홀라홀라를 좀 불러줄 수 있어? 그와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홀라홀라? 잠깐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