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새로운 이웃과 새로운 직원들
칼스의 말에 한 픽시가 꽃들 사이로 사라져버렸고, 나머지 픽시들은 링메인과 세르티네가 들고 있는 꿀단지에서 흘러나오는 꿀 냄새를 맡고서는 그녀들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우와아! 진짜 픽시야.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저기 상단주님? 이... 이거 어떻게 해야 해? 혹시 우리한테 덤벼드는 건 아니지? 만져봐도 돼?"
"그거 어차피 얘네들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니까 그냥 내려두시면 돼요. 혹시 직접 만지고 싶다면 픽시들에게 허락을 받고 조심히 하셔야 하고요. 전에 마을 아이들이 픽시 하나를 크게 다치게 할뻔한 적이 있어서요."
[맞아! 인간 아이가 날개를 힘껏 잡으려고 한 적이 있어!]
픽시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던 사건이었는데, 마을의 한 꼬마 아이가 픽시들이 자기와 어울려주지 않는다며 날개를 힘껏 잡아채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픽시들은 반 정령체이기에 물리적인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유유히 빠져나가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한동안 픽시들이 사람들을 경계하며 모습을 감춰버렸었다. 다행히 홀라홀라가 칼스를 찾아와 조치를 취해달라 요청했고, 칼스는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아두고 픽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교육을 펼친 바가 있었다.
"아냐. 절대로 다치지 않게 조심할게."
"응응! 우리는 적이 아닌 이들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 전사들이라고."
두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픽시들에게 손을 뻗었고, 픽시들은 그녀들의 손길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올라타는 등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 홀라홀라를 찾으러 갔던 픽시가 그를 데리고 나타났다.
[오! 칼스. 며칠간 보이지 않더니 다시 돌아왔네?]
"꿀이 워낙 많이 나오는 바람에 그것을 좀 팔기 위해 마을을 떠나있었어요. 그사이 별일은 없었죠?"
[별일이라고 한다면 주변에 벌이 워낙 많다 보니 꽃들이 더 잘 자라서 기분이 좋다는 것 정도일까? 이대로 놔뒀다간 이 근처 초원을 전부 꽃으로 뒤덮어버릴지도 몰라.]
"그건 좀 곤란한데요. 그 부분에 대해선 마을 사람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그치? 그럴 거 같아서 애들한테 함부로 꽃들을 더 늘리지는 말라고 이야기해놨어. 그나저나 그 뒤에 있는 것들은 우리 주려고 가져온 거야?]
"네. 혹시 좀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서 말해요."
[응응. 그렇게 할게.]
홀라홀라는 다른 픽시들에게 칼스가 가져온 꿀단지 안에 들어있는 꿀을 자신들의 마을로 가져가자고 말했고, 그러자 링메인과 세르티네 주변에서 그녀들과 어울려주던 픽시들이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더니 허공에 꿀을 자기 몸집만큼 띄우고선 꽃밭 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홀라홀라. 부탁이 하나 있어서 찾아왔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어요?"
[무슨 부탁인데?]
"조만간 마을에 아르케 여신님을 따르는 사제들이 방문하기로 되어있는데요. 그들이 머물 신전주변이 너무 휑해서 꽃이라도 좀 피워뒀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래? 그런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지! 게다가 어머니를 따르는 인간들이라니. 그런 이들은 언제나 환영이야.]
"고마워요. 아 참! 그리고 혹시 엘프분들한테도 연락을 할 수 있다면 언제쯤 방문해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숲의 아이들에게? 음. 바로는 안될 것 같고 숲에 드나드는 애들에게 말을 해두긴 할게.]
"그 정도만 해줘도 충분해요. 꽃밭은 며칠 후에 제가 다시 한번 와서 이야기해 줄게요. 지금은 아직 신전으로 사용할 건물을 꾸미는 중이라서요."
그 후로는 마을 사람들이 혹시 귀찮게 하지는 않는지, 가축들이 꽃밭을 망치지는 않는지 등을 물었으나 홀라홀라는 딱히 문제는 없다고 말하며 꽃밭 속으로 사라져갔다. 링메인과 세르티네는 픽시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비어있는 꿀단지만 남게 되자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칼스에게 물었다.
"저 픽시들은 꽃밭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음... 마을 애들이 픽시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겠다고 꽃밭을 헤집고 다녔었는데 발견을 못했다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힘으로 숨겨진 곳에 모여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긴. 픽시도 정령이니 정령계에 들어가 있는 건가."
"아! 좀 더 만져보고 싶었는데."
"만지긴 뭘 만져. 방금 전에 손 위에 올라왔는데 아무런 느낌도 안 나던데. 그래도 귀엽긴 하더라."
아쉬워하는 둘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 칼스는 본격적으로 여왕벌을 키워내 벌통의 수를 늘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구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든 왕대(여왕벌로 키워질 애벌레가 들어있는 특수한 방)를 가지고 손쉽게 여왕벌을 키워낼 수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그런 왕대를 만들어내기 힘들었기에 벌들이 자연적으로 분봉을 하려고 만든 왕대를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주변에 밀원이 되는 꽃밭이 늘어나서인지 많은 수의 왕대가 이미 만들어져있었다.
"음... 작년엔 로열젤리를 채취하느라 여왕벌을 늘리는 건 자제했는데. 이제는 꽃이 많아지니까 왕대가 너무 많아서 벌통을 늘리면서 동시에 로열젤리도 어느 정도 채취가 가능하겠네."
아직까지 잭과 제니에게도 여왕벌을 키워내는 작업과 로열젤리 채취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이 부분은 오롯이 칼스 혼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그가 양봉장에서 여왕벌과 로열젤리를 두고 씨름을 하는 사이 임시 신전으로 사용할 공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신전으로 사용할 건물 앞에 꽃밭을 조성하기 위해 마을 안으로 픽시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오오! 온다 온다!"
"꺄아! 귀여워!"
이미 마을에도 픽시들이 들어와 임시 신전의 꽃밭을 만들어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기에 허니 상단 주변은 구경나온 인파로 가득 차있었다. 홀라홀라를 선두로 칼스의 곁에 날아든 픽시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신기해하며 물었다.
[인간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있네. 그렇게 이 작업이 중요한 건가?]
"으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하긴 이런 마을에서 자랐으니 여신님께 선택받은 아이가 탄생한 거겠지. 그럼 어디에 꽃을 피우면 되는 거야?]
"자. 보면 바닥에 고른 흙을 깔아둔 곳이 있죠? 그 위에다가 피워주시면 돼요."
[응응. 저기로군. 들었지 얘들아? 빨리하고 돌아가자.]
[알았어! 이 정도야 금방이지!]
-샤라라라라랑
픽시들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작업을 시작하자 그들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칼스가 지정해 준 땅속으로 스며들었고, 곧 녹화된 비디오를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싹이 돋아나더니 순식간에 자라나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한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가 손을 모아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칼스 역시 눈앞에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장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스슥!
-파앗! 파앗!
"와! 레벤틸 꽃이 저렇게 다양한 색으로 피어날 수 있는 거구나."
"향기도 엄청나. 여기를 아르케 신전으로 사용한다는 거지? 꼭 기도를 드리러 와야겠어."
순식간에 휑하던 건물 앞 공간이 화사한 꽃밭으로 변모했고, 픽시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즐거워졌는지 좀 더 힘을 쏟아부어 바깥의 꽃밭보다 훨씬 다양한 꽃들을 피워냈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어때?]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걸요. 고마워요 여러분들."
[헤헤. 칼스가 늘 우리에게 맛있는 꿀을 챙겨주니까 힘 좀 써봤어.]
"에이. 여러분들이 피워낸 꽃에서 나온 꿀인데요. 아무튼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가 가끔씩 들러서 꽃들이 시들지 않게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근데 급하게 꽃을 피운 거라 조금 기운이 달릴 테니 물을 좀 넉넉하게 줘야 할 거야.]
"물주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오늘은 돌아가 볼게 인간들도 잘 있어!]
픽시들은 자기들의 할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마을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칼스는 마을 사람들 중 몇몇에게 꽃밭에 물을 넉넉히 줄 것을 부탁하고서 화사한 꽃이 피어있는 임시 신전 건물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비록 규모는 마를르성에있는 신전에 비할 바 못했으나 픽시들이 힘을 써준 덕분에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춘 것에 만족하며 사제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신전에 대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에 여왕벌들이 탄생해 새로운 벌집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는데 워낙 일벌의 수가 많다 보니 금세 안정화되어 산란을 시작했다. 그렇게 벌통을 60개까지 늘린 후에는 더 이상 여왕벌을 만들지 않고 왕대를 분리해 로열젤리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팔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채취할 수 있겠는데... 엘프 여왕을 만나러 갈 때 선물로 좀 나눠줘야겠다. 거기서 엘릭서를 만들 때 쓴다고 했었으니까."
며칠이 지나고 마을 입구에 아르케 신전의 사제들과 주문했던 꿀단지들을 가져온 상인들이 도착했다. 상인들은 제레미와 상단 직원들이 맞이하여 물건을 인수받았고, 칼스는 아버지 한센과 함께 아르케 신전에서 온 사제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올론 마을의 촌장 한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숲의 평안이 함께하길. 여신님의 은혜는 어느곳에나 존재하니 우리도 어디든 갈 수 있답니다. 특히나 이곳은 여신님의 축복이 깃든 곳이 아닙니까. 응당 찾아와야 했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아르케 여신님의 종인 하이디아라고 합니다."
"하이디아님 정말 직접 찾아와주셨군요. 감사드려요."
"후후. 사제가 되어 약속을 했는데 어길 수가 있겠니? 얼굴을 보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마을에 지내실 곳을 마련해놨으니 안내해드릴게요."
하이디아는 총 3명의 사제를 데리고 에올론 마을을 찾았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정식으로 본단에서 사제의 서품을 수여받은 이는 한 명이고, 나머지 둘은 마를르성에서 정식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인 지망생들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꽃을 상징하는 여신인 아르케를 따르는 이들의 성비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넷 모두가 여성으로 이뤄져 있었고, 그녀들은 자신들이 머무르게 될 임시 신전 앞에 조성된 꽃밭을 보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꽃의 색이 정말 다채롭기 그지없구나."
"하이디아님! 여기 있는 꽃들 모두 생기가 넘쳐 흘러요."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나름 먼 곳까지 와주신 사제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입니다."
"이렇게 멋진 화단을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대체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음... 지금은 마을에 없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인사시켜드릴게요. 사실 이 꽃들은 사람이 아닌 픽시들이 피워낸 것들이거든요."
"아! 이 마을 근처에 픽시들이 자리 잡았다고 했었지? 근데 내가 알기로 그들은 사람들이랑 별로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제가 여신님께 받은 기운을 그들도 느끼나 봐요."
"아아... 여신이시여."
하이디아와 여사제들은 건물 앞 꽃들을 피워낸 이가 아르케 여신이 직접 창조했다고 알려진 픽시들의 작품이라는 소리에 경건한 자세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