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칼스는 여왕벌을 길러 벌통의 개수를 늘리는 작업을 함과 동시에 마를르성에서 사 온 보리 중 일부를 물에 불렸다가 젖은 천 위에 올려두는 식으로 싹을 틔워냈다.
그렇게 약 사흘 정도를 반복하자 싹이 보리 크기보다 더 크게 자라났고 그때부터는 더 이상 물에 적시지 않고 그대로 싹을 제거해낸 후 볶아서 보관했는데, 바로 이것이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였다.
"뭐야. 저번에 물었을 땐 맥주를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이거 맥주 만드는 거 맞구만."
"흐흐흐. 안 그래도 저번에 상단주가 줬던 술 말고는 술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주는 거야?"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앙켈젠과 망구다이는 당연하게도 맥아의 사용처를 알고 있었고, 이내 히히덕거리며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칼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언제쯤 맥주가 완성되냐며 그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맥주를 만드는 재료는 맞는데. 단순히 맥주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기다려봐요."
"아니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이야. 맥주를 만드는 재료인데 만드는 게 맥주가 아니라니."
"뭐 여러분이 원한다면 맥주도 조금 만들어줄 수는 있는데. 근데 홉이 없어서 잘 되려나..."
"아무튼 그거 갈아야 하는 거지? 예전에 도시에서 맥주 만드는 걸 보니까 갈아서 쓰던데."
"네 맞아요. 완전히 곱게 갈 필요는 없고, 적당히 갈아서 쓰면 되는데 갈아주시게요?"
"간단히 힘쓰는 일이면 우리가 하는 게 낫지. 곁에서 보고 적당한지나 확인해 줘."
칼스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맥아를 갈아내고 그것을 뜨듯한 물에 담가서 맥아당을 만들었다. 원래 여기서 맥주를 만들려면 잘 식힌 맥아당에 홉이라 불리는 식물의 꽃줄기와 물을 넣고 벌꿀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어낸 효모를 넣은 후 발효시키면 된다.
하지만 칼스는 애초에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증류주인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맥아를 만들어낸 것이기에 홉을 넣지 않은 채 그대로 물과 효모만 넣고 발효시키기 시작했다.
"역시 술의 꽃은 싱글몰트위스키 아니겠어? 그리 오래 숙성시키지 않더라도 포도주에 맥주 일변도인 이 세계에서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을 거야."
처음 꿀과 로열젤리를 판매해 큰 이익을 본 칼스는 앞으로 좀 더 자신의 상단을 키워나가려면 주력으로 삼을 상품이 몇 가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비싼 향료를 사서 비누를 개량해 판매처를 알아보기도 했는데, 그와 동시에 계획했던 것이 바로 술이었다.
지구에서 김현석으로 살아가던 시절 여름에 채밀이 끝나고 늦가을에 벌들이 월동준비에 들어가게 되면 딱히 바쁜 일이 없었기에 강원도 산골에서 나는 여러 임산물들로 술을 담그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기가 많은 술인 위스키와 브랜디에 대한 공부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대략적인 술의 주조법을 배우고 키트를 활용해 직접 싱글몰트위스키를 주조해보기도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곳으로 떨어져 술이라곤 밍밍하고 탄산 함유량도 없다시피한 맥주와 제대로 보관이 안되어 식초에 가까운 맛을 내는 싸구려 와인밖에 마시지 못했으니 자연스레 제대로 된 술을 만들어 팔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첫걸음이 바로 벌꿀을 발효시켜만든 벌꿀주였는데 생각보다 벌꿀주에 대한 반응이 좋았기에 본격적인 증류주를 만들어 팔아보고 싶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문제는 소줏고리에서 위스키로 쓸 스피릿이 제대로 뽑혀지느냐인데... 일단 물건이 도착하면 한번 증류를 해보지 뭐. 문제점이 있으면 좀 고쳐주면 되니까."
그 후 맥아를 발효시키며 기다리던 차에 하이디아 일행과 함께 소줏고리가 도착했고, 이에 본격적으로 증류주를 만들어낼 준비가 갖춰진 것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증류 작업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아르케신전이 마을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어야 했고, 왕대에서 갓 태어난 여왕벌이 새로운 벌통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그쪽에 더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가고, 순조롭게 분봉(벌통을 나누는 일)작업이 끝난 것을 확인한 칼스는 그제서야 앙켈젠에게 부탁해 상단 건물 뒤편에 작은 화덕을 만들고, 창고에 있던 소줏고리를 꺼내어 그 화덕 위에 아래층을 이루는 단지를 얹어놓았다.
"읏차! 이제 이 위에 이걸 얹으면 되나?"
"아뇨. 아직 잠깐만요. 그전에 뭘 좀 넣어야 해서요. 링메인 저쪽 창고에 가서 장작을 좀 넉넉하게 가져와줄래요?"
"알았어. 그런데 당최 뭘 만들려는지 알 수가 없네..."
"기다려보시면 알 거예요. 자 망구다이는 이걸 저 단지 안에 좀 부어줘요."
"이거 저번에 담근 맥주 아냐? 쩝쩝... 윽! 이거 맛이 왜 이래? 정말 쉬어버렸는데."
"맥주는 나중에 따로 만들어줄 테니 일단 좀 부어봐요. 앙켈젠은 망구다이가 단지에 저걸 다 부어 넣으면 그 위에 그걸 얹으면 돼요. 그 후에는 저기 물 떠놓은 거 보이죠? 맨 위 칸에 찬물을 계속해서 부어줘요."
칼스는 두 장정이 낑낑대며 작업을 하는 동안 미리 준비한 고운 황토 흙을 물에 개어 적당히 반죽해두었다. 곧 망구다이가 발효된 워시(맥아를 발효시킨 액체)를 증류기 하층에 모두 쏟아 넣자 앙켈젠이 그 위에 얹을 소줏고리 상층부를 가져다 댔고, 바로 그 순간 칼스는 두 단지 사이의 틈을 황토 흙으로 잘 틀어막아 바깥으로 증기가 새어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 후에 미리 준비해둔 장작에 불을 붙여 소줏고리 하단부를 가열하기 시작했고, 적당히 불 조절을 하며 가열하자 수증기가 되었던 워시액이 증류기 최상단부의 차가운 부분에 닿아 결정화되어 옆으로 삐져나온 주둥이를 타고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아리송해하던 사람들은 주둥이로 나오는 물방울에서 강한 술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는 걸 알아채곤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와! 이거 냄새가 완전 사람 미치게 하는데."
"나 한 방울만 맛보면 안 될까?"
"안돼요! 아직 저도 맛을 못 봤는데 무슨! 장작 떨어져가니까 그거나 더 가져와요. 찬물도 떨어지지 않게 계속 채워주고요. 안 도와주고 농땡이 피우는 사람한테는 맛볼 기회도 안 줄 겁니다."
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은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듯 뛰어다녔고, 마침 주변 순찰을 하고 있던 세르티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쟤들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왜 저런데?"
"아! 세르티네. 주변에 별일은 없죠?"
"뭐 이 동네야 워낙 평화로운 곳이니... 사실 우리를 왜 고용했는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을 정도니까."
"지금이야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평화로울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무려 젖과 꿀이 흐르는 마을인데!"
"그러면 뭐해. 농사짓기엔 영 별로라 매번 밖에서 사 들여야 하는데. 그나마 목축도 엘프들 없었으면 불가능했을걸? 꿀이야 뭐 네 능력이니 논외로 치지만. 근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차라도 끓이나?"
"후후후. 아뇨 이건 술을 만드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쟤들이 저 난리를 치는 거였구나? 나중에 완성되면 맛보게 해줄 거지?"
"네. 다 시음할 기회를 드릴 테니 걱정 말고 근무하세요."
칼스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세르티네는 다시금 마을 안을 순찰하러 돌아갔다. 그녀는 등에 활을 메어 두고 허리춤에는 곡도를 걸어둔 모습이었는데 겉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 자잘한 상흔이 가득한 것을 보면 그녀 역시 빼어난 전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몇 시간가량 증류를 반복하자 1리터가 조금 넘는 양의 로우 와인을 얻을 수 있었다. 정제된 로우 와인을 작은 종지 그릇에 떠서 시음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잘 작동하는 것 같아 안심한 칼스는 호기심 왕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명의 술꾼들에게도 조금씩 로우 와인을 맛볼 기회를 주었다.
"한번 마셔봐요."
"크으... 벌꿀주도 제법 독하다 생각했는데. 이것도 비슷한데?"
"근데 벌꿀주는 달콤한 맛이 있었는데 요건 좀 더 깔끔하네."
"나는 달콤한 게 더 좋은 거 같아. 여기에 꿀을 타면 더 괜찮을 거 같은데."
링메인은 아무래도 달착지근한 것이 더 좋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면 앙켈젠과 망구다이는 작은 종지에 담아준 로우 와인을 홀짝 다 마셔버리곤 남아있는 술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칼스는 그런 두 사람의 눈빛을 무시하며 알코올 성분이 날아가지 않게 술병의 입구 부분을 단단히 봉인하며 말했다.
"안돼요. 아직 완성이 안된 거라고요. 어차피 오늘 만드는 녀석은 시음용으로 다 쓸 거니까 기다려요."
1차 증류된 로우 와인을 다시 한 번 더 증류하기 위해 소줏고리를 분해한 칼스는 1차 증류과정에서 나온 이물질들이 묻어있는 내부를 깨끗하게 씻어내고는 다시 한번 2차 증류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양이 많지 않았기에 1차 증류 때보다는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됐지만. 그래도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작은 술병만 한 크기에 담긴 위스키 원액. 즉 스피릿을 얻어낼 수 있었다. 스피릿이라는 명칭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증류주가 초기에 연금술의 약재 정도로 쓰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생명의 물'이라는 이명을 얻어 스피릿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로우 와인이 20~30도 정도의 알코올 도수인 것에 비해 처음으로 만들어낸 스피릿의 알코올 도수는 50도 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이마저도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싱글몰트위스키의 원료인 스피릿에 비해서는 낮은 도수인지라 아쉬워하는 칼스였다.
'아무래도 재료도 재료고, 만들어 내는 증류기 역시 조악하다 보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해야지. 사실 성공할지도 의문인 상태로 시작한 거 아니겠어?'
세 사람은 2차 증류가 되어 완성된 스피릿도 시음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이것은 저녁식사시간에 다 같이 조금씩 맛보기로 하고 정리 작업을 지시하는 칼스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스피릿을 참나무통에 넣고 숙성시켜 제대로 된 위스키로 만들어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다 얻어낸 스피릿의 양도 워낙 적었던 터라 일단 오늘 만들어낸 스피릿은 시음용으로 소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상단 건물에 들어선 칼스는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낮에 다른 일을 하느라 1차 시음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의 눈빛이 아주 강렬했는데 평소에는 과묵한 자세로 중심을 잡아주던 밍슈펠트르조차 어딘가 들뜬 모양새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애들에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신기한 술을 만들어 냈다고 하던데."
"맞아! 얘들이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어우! 아까 잠깐 지나갈 때 한 모금이라도 맛을 봤어야 했어."
"좋은 술은 늘 비싼 값에 팔리곤 하지요. 과연 어떤 상품일지 저도 궁금하군요."
"자. 여기 가져왔으니까 그 잡아먹을듯한 눈빛은 저리 치워둬요. 잭이랑 제니도 궁금하면 와서 한잔해봐도 좋아. 스티븐이랑 스밀라는... 아직 좀 이를 거 같네. 술을 못하는 사람에겐 조금 독한 녀석이라서."
"오오! 일단 독한 술이라는 거군!"
칼스는 들고 온 작은 병에 담긴 스피릿(위스키 원액)을 조금씩 따라서 상단의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앞에 놓여있는 잔속의 액체를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고 싶어 했으나. 칼스가 첫 잔은 다 같이 마셔야 한다며 그들을 만류했다.
"겨우 이만큼씩만 나눠주는 거야? 킁킁. 아까 낮에 마셨던 것보다 훨씬 더 독한 냄새가 올라오는데."
"이 냄새 어디서 맡아본 느낌이... 아 그래! 우리 부족의 주술사들이 가끔 제례를 지낼 때 사용하는 신수가 이런 냄새를 풍겼었지."
"그것도 주 재료가 술인가요?"
"아마 그럴 거야. 말 젖을 삭힌 술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대충 비슷할 거예요. 자. 그럼 다들 맛을 보되, 생각보다 독할 수 있으니 적당히 나눠서 드시는 걸 추천할게요. 육포랑 치즈도 좀 가져왔으니 안주로 드시고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푸른 매 부족 출신의 세 남성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더니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커흡! 콜록! 상단주. 이거 우리가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술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
"켈룩켈룩! 모.. 목이 타는 것 같아!"
"으흠!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