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부지런히 걸어온 덕분인지 아직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오기까지는 몇 시간 여유가 있었고, 칼스와 망구다이 그리고 링메인은 본격적인 마을 구경을 하기 위해 릴리나를 대동하고 집을 나섰다.
어느 생명체이든 낯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왕성한 건 아직 어린 개체이기 마련이고,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칼스 일행이 릴리나의 집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인간으로 치면 6~7살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어린 엘프였다.
"우와아! 정말로 인간이야! 들었던 대로 신기하게 생겼어."
"에이샤.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실례가 될 수 있단다."
"앗! 릴리나 언니! 그런 건가요? 저 나쁜 엘프가 되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 보이는 엘프가 릴리나의 칼스를 올려다보며 그렁그렁 한 눈으로 물었고, 순간 그 살인적인 귀여움에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꼬마 아이를 끌어안을뻔했던 그는 애써 그 충동을 억누르고 그의 앞에 서있는 꼬마 엘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직 어린엘프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대신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네!"
"아유 귀여워라. 에이샤라고 했지? 몇 살이야?"
"에헤헤... 열다섯 살이에요!"
"하... 하하. 그렇구나."
"큭큭큭."
"우리 상단주님 당황 좀 하셨겠어?"
칼스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예닐곱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꼬마 엘프가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칼스의 모습을 보며 망구다이와 링메인은 웃음을 터트렸고, 릴리나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원래 우리들은 성장 기간이 인간들보다 길거든요. 에이샤가 성년식을 치를 때쯤이면 칼스는 아마 멋진 중년 신사가 되어있을 거예요."
"헤에... 이 인간 오빠 이름이 칼스야? 칼스도 냥냥이들처럼 금방 어른이 되나 보구나!"
"응. 내 이름이 칼스야. 근데 냥냥이라니?"
"우리 마을에 냥냥이들이 사는데, 걔들도 금방 훌쩍 자라서 우리랑 같이 안 놀아주거든."
칼스는 에이샤라는 어린 엘프가 저 멀리 나무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묘인족들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냥냥이라는것이 묘인족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묘인족들은 인간들과 비슷한 성장 기간을 갖고 있거나 혹은 그보다 빨랐을 것이고,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묘인족이 어느 순간 훌쩍 자라 더 이상 그들과 놀아주지 못했으리라.
"냥냥이말고 다른 친구들은 없어?"
"우응... 있는데 걔들은 아직 어려서 집 밖으로 잘 안 나와서 내가 찾아가야 해. 그래서 냥냥이들이랑 많이 놀았었는데..."
"그래도 그 어린 친구들이 금방 자라서 에이샤랑 놀아줄 거야. 자 이건 내가 주는 선물! 나중에 그 친구들이랑 나눠먹으렴."
칼스는 품속에서 간식으로 챙겨들고 다니는 꿀에 잘 절여둔 말린 과일들을 꺼내 꼬마 엘프 에이샤에게 건네주었다. 에이샤는 릴리나를 바라보며 이것을 받아도 되는지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였고,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칼스에게 [감사합니다.]라며 배꼽인사를 하더니 아마 방금 그 아이가 말했던 어린 엘프들이 사는 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버렸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는 편이 아니라서요. 에이샤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는 스물여덟인가 되었을 테니 슬슬 성년식 준비에 한창일 거 같네요."
"성년식을 서른 살에 하나 봐요?"
"네. 그쯤에 성년식을 치르고 장로님으로부터 엘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면 그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바깥세상이 궁금해서 밖으로 나가는 걸 원했기에 마을 밖의 동족들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된 거죠."
릴리나는 그 외에 마을에서 같이 살아가는 묘인족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엘프들은 묘인족들을 반려동물 비슷한 느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묘인족들은 원래 엘프들이 아르덴 대삼림으로 이주해오기 이전부터 이 숲속에 살던 원주민이었는데, 엘프들이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숲속에 자리 잡자 하나둘 마을 안으로 스며들더니 이제는 완전히 마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야생에서 살던 묘인족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니며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엘프들이 해주는 요리를 얻어먹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요리 솜씨는 아주 끔찍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들도 그들에게 차마 직접 해먹으라는 말은 못 하겠더라고요."
"수인족들의 요리는 거의 생존 음식에 가까우니까. 그냥 굽고 태우는 방식이라 우리 부족의 전통음식만도 못하더군."
"아! 저기가 제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들어가서 인사를 좀 드려볼까요?"
"그래볼래요? 어머니가 평소에 칼스에 대해 궁금해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릴리나는 부모님이 살고 있다는 집으로 칼스를 안내했고, 곧 맑은 현악기 소리가 울려 퍼져 나오는 건물 앞에 도착한 릴리나가 흘러나오는 연주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 디리링. 딩딩
"흥흐흥. 어머니께서 류트를 연주하시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중간에 끊고 들어가면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잠깐 기다려주실래요."
"물론이죠."
그렇게 잠시 류트 연주를 감상하는 시간을 가진 후 한 곡조가 끝나자 릴리나가 다음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저예요! 바깥에서 방문한 손님들을 모셔왔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안으로 모시려무나."
안쪽에서 릴리나의 어머니의 대답이 들렸고, 이에 안쪽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거실에서 류트라고 불리는 현악기를 품에 안은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엘프 여인과, 그런 그녀의 곁에 함께 앉아있는 남자 엘프를 볼 수 있었다. 짙은 녹색 빛깔의 머리를 한 엘프 여인은 만약 릴리나에게 어머니라는 소개를 받지 않았다면 그녀의 자매뻘로 여겼을 만큼 닮아있었고, 남성 엘프는 이에 반해 짙은 남색 머리를 짧게 잘라 전체적으로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딸아이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거기 어린 인간이 칼스인가 보군요. 반가워요 전 릴리나의 어머니인 이렐린이라고 합니다."
"릴리나의 아버지인 카르카스라고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칼스라고 합니다. 뒤에 두 분은 저를 지켜주기 위해 함께해 주신 분들이고요."
"망구다이요."
"링메인이라고 합니다."
칼스가 느낀 릴리나의 부모인 이렐린과 카르카스의 첫인상은 겉으로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유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렐린의 경우 칼스 일행이 인사를 건넸을 때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마주하며 마주 인사를 해준 반면, 카르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까닥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신. 그래도 딸아이가 데려온 손님인데 표정 좀 풀어요."
"내 성격이 이런 걸 어쩌겠소. 칼스라고 했던가? 내 자네들에게 딱히 나쁜 감정이 있어 이러는 게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사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인간들은 믿지 못할 족속이라는 교육을 받았던지라 솔직히 조금 껄끄럽군."
"하하하. 그러실 수밖에요. 저는 아직 어려서 그때의 참상을 잘 알지 못하나 솔라스 제국의 광신도들이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후우... 말해 뭐 하겠나. 내가 태어났을 때 보았던 건 이 대삼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하던 어른들의 모습이었지. 지금에야 대삼림 전역에 우리 동족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땐 온갖 짐승에 괴물들까지 상대하며 터전을 갈고닦았어야 했지."
카르카스는 그때 자신들의 세대가 겪었던 고생들에 대해 열거하기 시작했는데 릴리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냈고, 이렐린이 적당한 시점에 그 무용담을 끊어주어 엘프판 [라떼는말이야]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아무튼 네가 우리 엘프들과 대삼림 속에 살아가는 여러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가지고 있던 꿀을 나눠줬다고 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그 덕분에 제가 살고 있는 마을 근처에 픽시들이 자리 잡게 되어 더 많은 꿀을 얻을 수 있게 됐는걸요."
"딸아이인 릴리나가 첫 임무를 받아 숲의 바깥으로 나갔다 오더니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인간을 보았다며 이야기를 했을 땐 저 맹추가 어디 이상한 인간에게 속아넘어간 건 아닌가 걱정도 했었지."
"아버지!"
"아무튼 간에 인간의 몸으로 숲을 통과해 엘기간테까지 가려면 제법 고생스러울 거다."
릴리나는 계속해서 자신을 어린애로만 여기는 카르카스가 못마땅했는지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이번에도 꿀을 좀 넉넉하게 챙겨왔는데 깜빡하고 들고 오질 못했네요 릴리나의 집에 조금 놔두고 갈 테니 나눠드세요."
"어머. 우리는 딱히 네게 줄 것이 없는데. 저번에도 딸을 통해서 받아먹었는데 또 받기만 하는구나."
"아까 멋진 연주 소리가 건물 밖으로 흘러나오던데 꿀값으로 다시 한번 그 연주를 들려주시면 될 거 같은데요."
칼스는 그녀의 옆에 세워져있는 류트를 보며 이야기했고, 카르카스는 그런 칼스의 말에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렐린의 연주가 제법 값이 나가기는 하지. 내가 저 소리에 반해 그녀에게 청혼했었으니 말이야."
"맞아. 우리 어머니의 류트 연주는 마을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야."
"후후 그럼 가볍게 한 곡조 뜯어볼게요."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이렐린의 류트 연주가 시작되었고,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다 보니 먼 길을 걸어온 피로가 녹아없어지는듯했다. 사실 그것은 칼스의 착각만은 아니었는데 이렐린은 류트를 연주할 때 마력을 활용해 음악을 듣는 이의 피로를 감소시켜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은 어린 칼스가 또다시 내일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연주를 펼쳤고, 카르카스가 그녀의 연주의 값이 비싸다는 말은 이러한 효과까지 감안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곡조가 끝나자 눈을 뜬 칼스와 두 사람은 물개박수를 치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와!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었어요."
"이건... 찬트의 일종인 건가요?"
"인간들의 성가를 말하는 거라면 비슷한 거라고 말할 수 있겠네. 하지만 딱히 특정한 신을 찬미하는 내용은 아니니까 다르다고 봐야 하려나?"
"대단하군요. 단일 연주를 통해 타인에게 이만큼의 효력을 발휘하다니."
칼스는 그냥 듣기 좋은 연주였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링메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저 단순한 연주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며 물었다.
"링메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 전 릴리나씨의 어머니께서 류트를 연주할 때 마력을 사용해 일종의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어. 대충 체감되는 걸로 봐선 피로회복의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아."
"아. 방금 전 노래를 들으며 피로가 가신다고 느낀 게 착각이 아닌 거였군요."
"보통은 신전의 성가대가 단체로 노래와 음악을 통해 발휘하는 능력인데... 혼자서 연주하는 게 이 정도라니 대단한 실력인 거야."
칼스는 링메인의 설명에 왜 밍슈펠트르가 그녀와 함께 가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뭔가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만 한 그녀는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기술과 이능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방금 전에도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은은한 마력의 파장을 느끼곤 대번에 이것이 일종의 마법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