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 부스럭부스럭
몸에 배어있는 습관 탓이었을까 새벽이 되자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난 칼스는 잠시 상쾌한 숲의 공기를 만끽하며 이불 삼아 덮고 있던 외투를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지붕과 같이 하늘을 뒤덮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여명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는데, 여느 엘프들이 다들 그러하듯 새벽의 정기를 받기 위함인지 세 엘프들 모두 이미 잠에서 깨어있었다.
"잘 잤어요? 여전히 부지런하네요 칼스."
"하하. 이게 습관이 되다 보니 저절로 눈이 떠져서요. 다들 잘 주무셨나요?"
"숲에서 맞이하는 아침이야 우리들에게 일상과 같은 일이지."
타렌 역시 동틀녘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칼스의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은 모양인지. 평소에 보이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에 답하며 점점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아예 작은 제단 같은 것을 꺼내두고서 아르케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칼스는 그런 엘프들의 해맞이 장면을 구경하며 아침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가 체조로 몸을 풀고 가볍게 야영지 주변을 뛰어다닐 때쯤엔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망구다이와 링메인도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린 인간인 네가 숲에서의 이동을 잘 따라온다 싶었는데.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자기 단련을 해온 모양이군."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몸이 아프면 곤란하잖아요.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을 기르면 웬만한 병에는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좋은 마음가짐이다. 아무튼 그 덕에 오늘 발걸음을 좀 서두른다면 점심때쯤엔 엘기간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타렌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칼스는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는 숲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웠기에 빠르게 아침식사를 해결하고선 엘기간테로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걸었을까 계속해서 푸르른 수풀과 나무뿐인 경치가 질린 나머지 바닥의 길만 보며 걷고 있던 칼스의 귀에 링메인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칼스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칼스가 아닌 앞쪽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저기 저 나무 아까부터 계속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저게 엘프들이 아르케 여신의 신물처럼 모신다던 그 나무인가 본데?"
망구다이의 말이 이어지고 나서야 칼스도 그들이 무엇을 봤는지 알아채고서 고개를 돌려 앞쪽의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 저 멀리 원근법을 무시하는듯한 느낌의 커다란 나무가 비죽이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나무와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이기도 했으나. 가면 갈수록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더니 나중에는 마치 지구에서의 삶에서 빌딩 숲 사이에서 보았던 초고층 건물처럼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우와! 아직 거리가 꽤 먼 것 같은데도 엄청난 크기네요."
"대단하지? 저게 우리들의 자랑인 어머니 나무야. 옛날에 이곳 대삼림으로 이주했을 때 크게 상처를 입었던 우리 종족에게 큰 희망을 준 고마운 나무지. 우리들은 저 나무가 아르케 여신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려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렇군요. 확실히 저 정도면 그 누구라도 신의 손이 닿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될 거 같네요."
"그럼~ 예전에 말이야..."
레일라에게 어머니 나무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걷던 도중 타렌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며 말했다.
"앞에 정찰대의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거의 다 도착한 것 같군."
"정찰대요?"
"엘기간테의 주변에는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 정찰대가 배치되어 있지. 그들 중에 하나가 저 앞에 있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본격적인 엘기간테의 영역에 도착했다는 말이지."
"정말요?"
"뭐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더 걸어야 할 거다."
"그 정도면 정말 다 온 거네요."
조금 더 나아가다 보니 타렌의 말대로 숲속을 정찰하던 엘프 한 명이 나타나 일행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는 처음엔 엘프들만 모여있는 일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칼스와 링메인 그리고 망구다이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고, 타렌이 그런 그에게 여왕님이 직접 모셔오라고 한 손님이라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쪽으로 진입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 후로 조금 더 걸어가니 나무만 울창했던 숲에서 점점 나무의 밀도가 적어지고 뭔가를 심고 기르는 듯 보이는 밭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숲속에 이렇게 넓은 경작지를 만들어 내다니. 대단하네요."
"처음엔 숲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과일이나 열매 등을 식량으로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엘기간테에 모여사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저렇게 따로 식량 재배를 위한 농경지를 만들기 시작했지. 인간들에게 배운 하나의 지혜라고 보면 될 거 같아."
"흐음... 확실히 인구수가 늘어나면 식량 수급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니까요."
그렇게 넓은 경작지를 지나니 높이가 20M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이 기둥 역할을 하고, 그 나무 사이를 넝쿨로 단단히 채워 넣은 5미터쯤 되어 보이는 벽이 등장했다.
넝쿨에 자라난 푸른 이파리 때문에 마치 푸른 벽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곳에는 출입구로 사용하는 듯 보이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곳 양옆에는 아까 보았던 정찰대와는 다른 복장을 한 엘프들이 지키고 있었다.
"엇! 타렌님!"
"고생들이 많군. 알고 있겠지만 여왕님께서 초청하신 손님들이야."
"안 그래도 방금 전 외곽에서 순찰 중인 조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되겠군. 고생하게."
경비병 임무를 담당하던 엘프의 허가가 떨어지자 타렌은 일행들을 이끌고 문을 통과했다. 생긴 것부터 특이하게 생긴 이 나무 벽에 호기심이 많았던 칼스는 성문 안쪽을 통과하면서 벽 내부를 살폈는데, 역시나 바깥에서 본 것처럼 두터운 나무줄기로 꽉 채워져있었다.
"이 벽은 전부 나무로 만들어져 있나 보네요. 그럼 불에 취약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나무이다 보니 불에는 약한 편이지. 그래도 나름의 방비는 해두었으니 단순히 불을 지른다고 벽이 몽땅 타버리거나 하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 이곳이 바로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엘기간테다."
"오오오!!"
몇 미터는 될법한 두께의 나무 덩굴 벽을 통과하자 그 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도시 중심에 거대하게 솟아오른 어머니의 나무가 가장 먼저 보였고, 어머니 나무 밑동엔 작은 건물들이 버섯들처럼 붙어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나무의 끝자락에서 성벽에 이르는 영역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져있었고, 길목마다 엘프들과 여러 이 종족들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저 문이 엘기간테의 서문이다. 여왕님이 계시는 하늘궁전은 어머니 나무의 남쪽면에 자리 잡고 있지."
"아하. 저기 커다란 버섯 같은 받침 위에 세워진 건물이 하늘궁전인가 보네요?"
"버섯 같은 이 아니라 진짜 버섯으로 이루어진 토대 위에 지어져있지. 아무튼 저기까지 가야 진짜 여정의 끝이니 힘을 내도록 해라."
워낙 어머니의 나무 크기가 거대했기에 그것을 이정표 삼아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엘기간테의 주민들은 엘그랑가든과는 달리 딱히 인간이 나타났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레일라의 설명에 따르면 해마다 소수의 인간이 이곳 엘기간테에 방문하여 물건을 사고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요? 근데 왜 릴리나의 고향마을에서는 인간 보기가 힘들다는 거죠?"
"보통 인간 상인들은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뮤즈강을 따라오거든요. 칼스도 이틀간 걸어와봐서 알겠지만 인간들끼리 길잡이 없이 숲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는 일이 쉽지는 않으니 말이에요."
"그렇군요."
"뭐 그렇다고 엄청 대단한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들이 가져다주는 옷감이나 식재료 등을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물건들과 맞교환하는 정도니까요."
"그럼 그들은 여왕님과 직접 거래를 하는 건 아니라는 거군요."
"네. 인간들이 꾸준히 마법 물품을 거래하고 싶어 했지만. 여왕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뭐 가끔 귀한 물건을 가져와서 개인적으로 만든 마법 용구와 바꿔가는 인간들은 있는 것 같지만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머니 나무 근처까지 다다르게 되었고, 어머니 나무 외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자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버섯 위에 세워진 하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사실 규모 면에서 봤을 땐 궁전이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지만. 엘프 여왕이 머무는 장소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하늘 궁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했다. 그런 하늘궁전의 입구에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여왕 아옐루나가 그녀를 보필하는 여러 엘프들과 함께 나와 칼스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요. 제가 바로 이곳의 여왕직을 맡고 있는 아옐루나입니다."
"헉! 이렇게 몸소 반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에올론 마을에서 작은 상단을 운영 중인 칼스라고 합니다."
칼스는 여왕이라는 직위에 올라있는 이가 직접 자신을 마중 나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고, 그 뒤를 따르던 링메인과 망구다이 역시 같은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아옐루나는 그런 그들을 몸소 일으켜 세워주었는데 그제서야 칼스는 엘프 여왕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의 녹색 머리에는 신비한 푸른빛이 감도는 잎으로 짜인 왕관이 씌워져있었고, 복장 역시 과도하게 치장되지는 않았으나 여타 엘프들과는 차별화된 연녹색 빛깔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일전에는 그대의 도움 덕에 큰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이에 대한 감사를 표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이렇게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됐군요."
"주변 이웃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데 당연히 도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도움을 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때 나눠드린 꿀은 아르케 여신님이 제게 주신 선물과 같은 것이니 숲속에서 여신님을 따르는 엘프분들을 위해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칼스의 공손한 대답이 더더욱 마음에 와닿았는지 만면에 미소를 띤 여왕은 그를 데리고 온 다른 일행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타렌. 레일라. 두 사람 모두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릴리나?"
"네 여왕님."
"후후. 릴리나 덕분에 우리는 좋은 이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상황이 시급하다보니 짚고가지 못했지만 그대의 공도 치하를 받아 마땅하지요."
"저는 그냥 마을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그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 우연이 수많은 동족들과 이웃들을 살릴 수 있었지요. 만약 릴리나가 그 마을에 가서 칼스를 보았을 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넘어갔다면 이런 만남이 이뤄지지 못했을겁니다. 자 일단 성으로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아옐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수십 미터 높이의 버섯 위에 지어진 궁전으로 올라가자 말했고, 칼스와 일행들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를 지닌 버섯 위로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걱정을 했다.
- 우우우웅!
"으아앗?!"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를 저 위로 올려보내주는 마법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는데 아옐루나의 뒤편에 서있던 한 엘프가 주문을 외우자 커다란 발판이 그들 모두를 하늘로 띄워올렸고, 순식간에 그들은 하늘궁전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버섯 위로 올라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