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48/65)



〈 48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하늘궁전. 엘프들이 자신들의 여왕 아옐루나가 거처하고 있는 건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궁전은 아옐루나의 어머니이자 엘기간테에 정착 후 선출된 여왕이었던 아슈르나의 즉위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실 그녀는 이런 궁전이 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어머니 나무 사방에 돋아난 거대 버섯 위에 감시탑을 세워 혹시나 모를 외부의 적의 침입을 감시하려 했었다. 그러나 엘프들을 비롯한 엘기간테의 주민들이 솔라 제국의 발호 이후 이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을 중재하고 안정화시킨 공로를 이유로 궁전을 지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결과 수년에 걸쳐 세워진 것이 바로 이 하늘궁전인 것이다.

"우와! 여기는 정말 대단하네요. 한눈에 엘기간테의 모습이 다 들어오는군요. 아! 물론 어머니의 나무 뒤쪽은 빼고요."
"후후후.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이곳에 궁전이 아닌 감시탑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으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이런 멋진 궁전이 하나쯤 있는 게 나쁘지는 않은  같네요."

하늘궁전은 디귿자 형태로 지어져있었는데 비어있는 중앙 부분엔 마치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아고라 광장같이 하얀 나무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 공터에는 신기하게도 버섯 위에 흙을 깔아두었는지 아니면 버섯 자체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 모를 꽃과 정원수들이 자라있었고, 정원 중앙에는 커다란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그곳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이들은 아옐루나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게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렇게 아옐루나는 회의장의 가장 상석에 자리하고, 그녀를 따라온 이들도 자리에 앉으니 칼스와 일행들만이 덩그러니 정원에 서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하늘 의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실질적으로 엘기간테를 운영해나가는 분들이죠. 의원 여러분들 저분이 바로 작년 겨울 우리를 위해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은 채 도움을 주었던 칼스님입니다."
"허허. 반갑군. 확실히 레일라가 말했던 대로 아르케 여신님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인간이구만. 나는 엘기간테에서 아르케 여신님의 뜻을 알리고 있는 셀트리온이라고 하네."
"고맙다 인간. 네 덕분에 많은 동족들이 목숨을 건질  있었다. 나는 엘기간테의 드라이어드들을 대표하는 퀜타스라고 한다."
"흥. 여왕님께서 초청했다고는 하나 인간들을 믿을 수가 있나."
"어허. 너무 그렇게 모두를 싸잡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지 않았나..."

아옐루나의 말에 회의장에 착석하고 있던 여러 존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정원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칼스가 어느 타이밍에 인사를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자 아옐루나가 한숨을 내쉬더니 책상을 탕탕 내려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 탕탕!

"의원분들 너무 그렇게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시니 손님께서 당황하시지 않습니까. 손님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감사합니다 여왕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부 왕국의 마를르남작령에 위치한 에올론마을에서 허니라는 작은 상단을 운영 중인 인간 칼스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아르케 여신님의 축복을 받아 많은 것을 얻을  있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에 비해 모자람이 많은 것을 알지만 앞으로 더 좋은 인연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짝짝짝짝

칼스의 인사에 아까부터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몇몇이 손뼉을 치며 그를 환영해 주었고, 그 덕에 조금은 긴장을 풀  있게 된 칼스였다.

"오늘 이렇게 하늘 의회를 소집한 이유는 칼스님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칼스 혹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보세요. 너무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어... 음. 사실 딱히 보상을 바라고 드린 것이 아니라 따로 생각해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방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얼마 전 작은 상단 하나를 만들었는데 엘기간테의 여러분들과도 거래를 할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엘기간테의 재상 역할을 하고 있는 장로 피네이가 그 정도는 수용 가능하다는듯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거래라. 어떤 물건들을 가져올  있고, 여기서 어떤 물건을 가져갈지 알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

이런 반응에 고무된 칼스는 마침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엘기간테의 중추 역할을 하는 이들이라는 걸 깨닫고는 여왕 아옐루나에게 말했다.

"마침 이번에 여왕님을 알현할 수 있다는 소식에 제가 만들어 판매 중인 물품들과 새로 준비한 상품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이곳에서 선보일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꿀 말고도 다른 상품들이 더 있나요? 다른 이에게 위협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면 내보여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망구다이씨 어서 배낭 좀 가지고 와봐요."

여왕과 마주하고 나서 망구다이가 메고 있던 커다란 배낭은 안전상의 이유로 근위대인 장다름의 감시하에 보관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왕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물건을 꺼낼 수 있게 됐고,  망구다이가 몇몇 장다름과 함께 배낭을 가져와 그 안에서 물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오.  달콤한 향기는 레벤틸 꽃의 꿀이 분명하군."
"화재 때 사용한 꿀의 상태도 매우 좋았는데, 이번 역시 나쁘지 않아 보여. 우리 의약방에서도 구입을 해볼까 고민해 봐야겠어."
"저 작은 병안에 든 액체는 뭐지? 술인가?"
"저건 벌꿀주인거 같은데 그 옆에 있는 건 뭔지 모르겠네."

그렇게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칼스는 먼저 자신의 주력상품이자 여왕이 이곳에 초대를 하게 만든 1등 공신인 꿀단지를 개봉했다.

그리고 혹시 작은 종지 그릇이 없는지 물어봤는데, 앉아있던 엘프 중에 아까 지상에서 이곳까지 이동할 때 마법을 사용했던 이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슥 휘두르자 그의 앞에 작은 접시 모양의 나뭇잎 한 무더기가 생겨났다.

칼스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꿀을 조금씩 덜어내어 나눠주었고, 작은 나뭇잎 접시에 담긴 꿀의 향을 맡아보고 맛을 본 그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물질이 거의 없는 순수한 꿀이군."
"전혀 텁텁한 맛이 없어서 좋구만. 아침저녁으로  꿀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로 마시면 든든할 거 같아."
"자. 이번에는 꿀로 담근 벌꿀주입니다. 혹시 술을 마시지 않는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칼스가 이번에는 벌꿀주를 조금씩 따라서 시음하게 했는데, 예상외로  누구도 술잔을 거부하지 않았던 데다 꿀을 선보였을 때보다 더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르케 여신의 성수와 스피릿을 희석해 만든 술을 개봉했다.

- 퐁!

"어허허! 대체. 어째서  병안에서 여신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흐으음! 향이 정말 좋네요. 향료 같은 건가요 칼스?"
"아뇨. 이것 역시 술입니다. 다만... 술이 좀 독한 술이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놀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어린 인간이 술에 대해 뭘 알겠느냐만 여기 있는 이들은 다들 술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니 걱정하지 말고 내어주게. 냄새만 맡아도 아찔한  술맛이 궁금해 죽겠으니 말이야."

본의 아니게 백 년 이상 술을 접해온 술꾼들을 자극하게 된 칼스였고, 그들은 당장에 술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압박했다. 이에 칼스는 그들 중에 딱 봐도 군인일 거 같아 보이는 엘프에게 가장 먼저 잔을 채워주었고 그는 그것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콜록콜록! 크흑!"
"론우드 장군!"
"인간! 대체 무엇을 내놓은 것이냐!"

주변에 서있던 장다름들은 론우드라는 장군이 술을 털어 넣기 무섭게 기침을 해대자 그것이 독극물이라 생각했는지 검과 창을 들이밀었다.

"크흠! 흠. 이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것들 집어넣어. 그냥 술이 생각보다  독해서 놀랐을 뿐이야."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놈들아! 내가 괜찮다는데 왜 난리야? 회의 끝나고 한바탕해봐?"
"아닙니다!"

이내 기침이 잦아든 론우드가 몰려든 장다름들을 물리고 비어버린 잔을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 인간이라고 깔봤던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겠군. 아주 끝내주는 술을 만들어냈구만."
"론우드장군. 그 술이 정말 그렇게 끝내준단 말입니까?"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한번 맛을 보시면 알게  겁니다."
"오오. 나도 어서 따라주게."

론우드의 반응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방금 전 벌꿀주를 따라주었던 나뭇잎 잔을 들고 아우성쳤고, 결국 모든 이들에게 조금씩 술을 따라주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여왕 아옐루나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아옐루나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망울을 한 채 그를 향해 잔을 내밀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술잔을 받아든 이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내지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다른 분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기대되는군요."
"부디 이 술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칼스는 공손한 자세로 들고 있던 술병을 기울여 그녀에게도 한잔 따라주었고, 그녀는 잠시  술에서 피어오르는 향을 코로 음미하다가 입안에 털어 넣었다.

- 꿀꺽
"하아아아... 정말 최고의 술이네요."

아옐루나는 술을 삼키고 나서 한참을 눈을 감은 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 누가 들어도 아주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탄성 소리였기에 칼스는 반쯤 남아있는 술병의 입구를 코르크마개로 다시 단단히 봉인한 후 그녀에게 진상하며 말했다.

"사실 이 술은 제가 원래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본래 만들려 했던 술은 숙성이 되려면 더 오랜 기간이 필요로 하기에 급한 마음에 수중에 있던 아르케 여신님의 성수를 술과 희석했더니 이렇게 멋진 술이 탄생한 것입니다."
"역시. 여신님의 향취가 물씬 풍긴다 했더니. 성수가 들어간 것이었군."
"아무튼.  술은 여왕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아직 마땅한 이름조차 없는 술이지요. 여왕님께서  술의 이름을 지어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 술의 이름을 제가요?"
"네."

칼스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더듬던 그녀는 아직 반쯤 남아있는 술병안에든 액체를 들여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숲의 숨결]. 숲의 숨결이라고 하고 싶네요. 저는 이 술을 마시면서 드넓은 숲의 공기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거든요."
"숲의 숨결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 술의 이름은 앞으로 숲의 숨결이라 불리게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