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칼스가 멍하니 그 엘프가 들어간 복도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창구의 여자가 릴리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머! 릴리! 엘기간테에는 언제 온 거야?"
"어제 낮에 도착했어 로느. 잘 지내고 있지?"
"나야 늘 여기서 비슷한 일만 하고 있지. 어제 도착했다고? 그럼 잠은 어디서 잔 거야?"
"후후. 듣고 깜짝 놀라지나 마. 나 지금 하늘궁전에서 머물고 있어."
"에이. 얘도 참!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순 거짓말만 늘었나 보네."
"정말이라니까? 여기 같이 온 칼스가 여왕님의 손님이신데 나도 같이 왔더니 방을 하나 내주시더라고."
"세상에! 부럽다... 나도 언젠가 한 번쯤 저 위에서 엘기간테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싶은데."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관계였는지 두 엘프 여인은 연신 웃음꽃을 터트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중 로느라고 불린 엘프는 릴리나가 현재 하늘궁전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움을 표했고, 릴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하늘궁전에서 보았던 풍경을 자랑하듯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칼스의 눈빛을 느꼈는지 그에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 엘프를 소개해 주었다.
"아 칼스. 오랜만에 친구를 봐서 반가운 마음에 들떠버렸네요. 이쪽은 저와 같은 엘그랑가드 출신의 로이린느예요."
"안녕? 반가워 나는 릴리의 친구인 로이린느야."
"릴리?"
"릴리나를 부르는 애칭이지. 어렸을 땐 다들 그렇게 불렀거든. 마찬가지로 내 이름도 로이린느를 줄여서 로느라고 불리고 있고."
"그렇군요. 근데 왜 릴리나는 제게 그런 이야기를 안 했을까요."
"얘가 좀 숙맥이라 그래. 그나마 성년식을 치르고 숲 밖으로 나갔다길래 성격이 좀 바뀔까 기대했는데 작년에 다시 숲에 돌아왔다고 해서 만나봤더니 그대로더라구."
"로느!"
그렇게 릴리나가 로이린느라는 엘프에게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며 윽박지르는 사이 안쪽으로 들어갔던 이가 되돌아와 칼스에게 말했다.
"장로님께서 너를 만나보겠다고 말씀하시더군. 근데 로이린느 너는 또 왜 그렇게 들떠있는 거지?"
"아. 그 인간 손님과 같이 온 일행 중에 제 고향 친구가 있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래? 잘 됐군. 그럼 네가 이들을 장로님의 집무실로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자 칼스라고 했지? 나를 따라오면 돼."
로이린느는 친구와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스 일행을 이끌고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릴리나와 로이린느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제는 릴리나의 근황에 대해 묻기 시작한 로느였다.
"릴리. 작년에 숲 밖에서의 임무는 끝마친 거 아니었어? 왜 또 인간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
"음... 이번에 칼스가 만든 상단에서 같이 일하기로 했거든."
"인간이 만든 상단에서? 그럼 아예 숲 밖으로 나가서 살겠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칼스가 꿀을 비롯해서 엘기간테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들을 가지고 있는데, 알다시피 엘기간테로 드나드는 길이 인간들한테는 쉬운 여정이 아니잖아? 그쪽에서 일을 할 거 같아. 물론 숲 밖으로도 자주 드나들긴 하겠지."
"그렇구나. 나는 아예 숲으로 들어오지 않는 줄 알고 놀랐잖아."
"너는 중앙청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여기야 늘 비슷한 모습이지 뭐. 자 도착했다 이 방안에 장로님이 머물고 계실 거야."
로이린느는 그렇게 말하곤 잠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문 앞에 다가서서 노크를 하며 말했다.
"셀트란장로님 로이린느입니다. 여왕님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음. 들여보내주게."
안에서 중후한 남성의 답변이 들려오자 로이린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칼스 일행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셀트란의 집무실은 온갖 서류가 층층이 쌓여 있는 책상이 있었고, 그런 서류들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는 노년의 엘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칼스 일행이 책상 앞에 자리하고 나서도 잠시간 서류를 검토하고 서명을 하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앞에 서있는 칼스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흐음. 자네가 어제 하늘궁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그 인간이로군."
"안녕하십니까. 칼스라고 합니다."
"나는 미력하지만 아르덴 대삼림에 살아가는 여러 이웃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셀트란이라고 하네. 작년에 자네가 보내준 호의는 정말 고마웠네."
"별말씀을요."
"조금 전에 하늘궁전에서 전갈을 받아서 막 확인하던 참이었지. 자네의 상단에서 일할 인원을 고용할 생각이라고?"
"네. 저희 상단에서 엘기간테로의 정기적인 상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이 함께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아무래도 주민들 중에 인간들이 드나드는 것을 안 좋은 눈초리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이제 막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상단의 부지까지 필요한 이유가 없을 텐데?"
"아 그건."
칼스는 셀트란에게 머지않은 시일 내에 엘기간테에도 양봉장을 설치할 생각이며 상단의 부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일부를 엘기간테에 무상 지급할 계획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군. 당장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없다고 해도 미래를 본 투자라는 건가."
"사실. 여왕님께 말씀드리긴 했지만 곧바로 이렇게 부지까지 내어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저 엘기간테에서 사들인 물건을 잠시 보관할 창고 정도만 확보해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을거였으니까요."
"뭐. 어차피 엘기간테 중심가에 위치한 자리를 내어달라는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벌을 키우는 용도라면 픽시들과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동남부 지역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보도록 하겠네. 그리고 자네의 상단에서 일을 할만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일단 공지를 올려놓기는 할 텐데 그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거 같은데 그때까지 자네가 이곳에 머물 생각인가?"
"아뇨. 그 부분은 여기 릴리나에게 일임할 생각입니다."
"음? 벌써 일할 사람 하나는 구해 둔 건가? 제법이군. 알겠네 그럼 관심이 있는 이들은 그녀를 찾아가 보라고 하면 되겠어. 더 이상의 용건이 없다면 돌아가 봐도 좋네."
"감사합니다."
셀트란은 별다른 이견 없이 칼스의 의견을 수용해 주었고, 릴리나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칼스와 함께 셀트란 집무실을 빠져나와서야 질문을 던졌다.
"칼스. 제게 모든 걸 맡기다니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무래도 며칠 후면 에올론으로 돌아갈 저보다 릴리나가 직접 보고 결정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으음 이거 참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네요... 그럼 몇 명을 뽑으면 될까요?"
"너무 많아도 곤란하니 릴리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을 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해요."
"알았어요. 그럼 칼스가 말한 대로 할게요. 대신에 나중에 보고 마음에 안 든다고 뭐라고 하면 안 돼요."
"네. 아참! 그러고 보니 마을에서 이곳을 왕래할 때 짐을 제법 들고 다녀야 할 텐데 마법 배낭 같은 걸 구하긴 힘들겠죠?"
"아마 연금공방에 가면 그런 물품을 팔고 있긴 할 텐데 가격이 만만치 않을걸요? 차라리 에올론 마을을 왕래할 때 데리고 다닐 가축을 알아보는 게 나을 거예요."
칼스는 릴리나에게 엘기간테 지부에 대한 전권을 넘기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짔고 뛰어난 마법 물품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연금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기간테의 연금 공방은 뮤즈강과 맞닿아있는 항구에 위치해있었는데 릴리나의 설명에 따르면 연금공방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재료들을 뮤즈강을 통해 드나드는 외부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겨울의 눈이 녹기 시작해 강의 물살이 거세지는 지금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들이 거의 없어서 전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기가 뮤즈강이예요. 엘기간테를 비롯해서 아르덴 대삼림 전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소중한 젖줄이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폭이 넓네요. 저거 범람하거나 하지는 않죠?"
"가끔 봄철에 비가 많이 내리면 넘친다고 하는데. 제가 이곳에 사는 게 아니라 직접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네요."
뮤즈강은 서울의 한강보다도 강폭이 넓은 거대한 강이었다. 릴리나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덴 대삼림 북쪽에 있는 콜로네산맥에 발원지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부터 아르덴 대삼림을 관통하여 남부 습지대를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고 했다.
작년 대화재 당시 이 뮤즈강이 천연의 방화벽 역할을 해주어서 강의 동부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불길이 서쪽으로 더 번지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는데 이곳은 화재지역과는 거리가 먼 남부지역이다보니 강 건너에도 화마의 흔적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자. 여기가 연금공방이예요. 각종 실생활에 필요한 마법 물품부터 군사물품까지 다양한 분야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곳이죠."
"기대되는데요?"
엘기간테의 대부분의 건물이 목조건물인데 이곳 연금공방은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처럼 튼튼한 돌벽으로 지어져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이란 특수한 힘을 다루는 장소이다 보니 화재에 취약하기에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백화점처럼 넓은 내부 공간에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각 물건의 위에는 그 물건들에 부여된 마법과 효과, 그리고 그 지속시간 등이 적힌 안내판이 적혀있었다.
"와. 이게 다 마법 물품인 거예요?"
"정확히는 마법 물품이 되기 직전인 물건들이에요. 아직 마법 활성화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그대로 가져가면 그냥 일반 물품과 다를 바가 없죠. 저기서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마법사에게 가져가 돈을 지불하면 그곳에서 직접 마법을 활성화시켜주는 식이거든요."
"오호... 어디 보자. 방어 마법을 3회 시전 가능한 반지가 금화 한개? 치유 마법을 5회 사용할 수 있는 완드는 금화 열개네요? 가격이 장난이 아닌데요?"
"잘은 몰라도 마법을 특정 물체에 깃들고 작용하게 만드는 매개체의 값이 비싸다고 들었어요."
칼스는 매장 내에 진열된 물건들의 성능과 가격을 쭉 둘러보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책정되어 있는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대부분의 물품이 일정 횟수를 사용하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소모성 물품이었다.
좀 더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예전에 레일라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마법 배낭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도 또 한 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칼스였다.
"이런. 마법 배낭도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는 거군요."
"당연하죠. 마법 공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력이 계속 소모되는데. 아 물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용의 심장과 가죽으로 만든 배낭이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유지할 순 있겠지만요."
"그렇군요. 전에 꿀을 가져갈 때 사용하는 걸 보고 그냥 계속 유지되는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사실 칼스의 생각처럼 마법 배낭이 무한한 시간 동안 마법 공간을 유지해 주는 물품이었다면 이미 수많은 상단에서 그것을 활용해 상행을 이어가고 있어야 정상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위와 같은 공간 확장 마법의 지속시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물품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칼스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하늘 의회에서 보았던 엘프가 그를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