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이제 막 100세를 넘긴 젊은 나이임에도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니고 있기에 연금공방의 책임자 자리를 맡고 있는 엘리사는 어제 수년 만에 자신을 놀라게 만든 매력적인 술을 만들었다는 인간이 연금공방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직접 매장까지 내려왔다.
"어제 안 오길래 그냥 돌아가버린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아. 어제는 다른 곳에 좀 들러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후후.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이 누님이 싸게 해줄게."
"음... 사실 여기 오기 전에는 몇 가지 생각해둔 게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약간 애매해져 버렸네요."
"엥? 왜. 우리 물품이 마음에 안 들어? 인간들이 못 구해서 안달인 것들도 많을 텐데."
엘리사가 이곳 연금공방에 몸담은지도 이미 수십 년이 흘렀다. 지금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직접 물건을 만들고 판매하기도 했었기에 인간들이 엘프들의 마법 물품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어린 인간이 자신들이 만든 물품을 보고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당연히 마법 물품을 한번 사면 오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일회성 물품이더라고요."
"아니.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마법이 발동하려면 마력이 필요한데. 그 마력을 담아둘 그릇이 무한정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마력을 불어넣어 줄 존재가 있기나 할까. 전설의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힘들 거 같은데. 그래도 우리가 만든 물품이 인간들의 조잡한 실력으로 만든 것보단 훨씬 뛰어나단다. 마법을 두 번 쓸 것을 세 번까지 쓰게 만드는 게 우리의 능력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엘리사는 자신의 말에 어째 영혼 없는 대답을 하는 칼스를 보며 속에서 왠지 모를 분노가 솟구치려 했으나. 아직 어린아이인 만큼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라 여기고는 애써 속을 달랬다.
칼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채 일상에서 사용하면 편해질 것 같은 물품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지구의 라이터처럼 불꽃을 일으키는 반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장 제가 쓸만한 것은 이 정도면 되겠네요. 나머지는 기능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서 못 사겠어요."
"흐음. 하긴 우리 물품이 제법 값이 나가긴 하지. 그래도 여왕님의 손님인데 너무 야박하게 굴기 그러니까. 어디 보자. 자!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가져가렴."
- 휘익! 턱! 턱!
칼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몇 가지 물품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었는데, 이것들이 뭔가 하고 내려다보고 있자 엘리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엄청 대단한 건 아니고, 방어 마법 10회 정도 스택 되어있는 반지랑 치유 마법을 세 번 사용할 수 있는 목걸이야."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될지..."
"어디 가서 죽거나 다치지 말라고 주는 거니까. 열심히 그 뭐더라... 그래 숲의 숨결. 그거 좀 많이 만들어서 가져다 달라고."
"감사합니다."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는 거지?"
"혹시. 이런 것도 만들어줄 수 있나요?"
칼스는 엘리사에게 양봉 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될만한 물건 몇 가지를 설명했다.
첫째로 지금은 그저 반합통에 말린 쑥을 넣고 태워 연기를 흘려내는데 그 안에 넣어두고 바람을 발생해서 연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뿜어낼 수 있게 해주는 마법도구였고, 두 번째로는 벌집판에 담긴 꿀을 채취할 때 지금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고 있는데 그런 벌집 여러 개를 걸어두고 회전시킬 수 있는 도구였다.
"음... 강한 바람을 내뿜어서 적을 밀어내거나, 화살 같은 것들을 막아내는 마법도구는 몇몇 있는데, 아주 약한 바람을 오랫동안 뿜어내야 한다는 거지?"
"네."
"흠. 그건 어렵지 않을 거 같고, 나머지 하나는 좀 더 연구를 해봐야 할 거 같네. 뭔가 묵직한 걸 돌리는 용도라면 효율이 그다지 좋을 거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런가요. 뭐 바람을 만드는 도구만 있어도 충분한 도움이 될 거 같네요."
"좋아. 그럼 그건 나중에 시간 날 때 한번 손 봐둘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대신에 알지?"
"네. 다음번에 방문할 땐 엘리사님께 드릴 숲의 숨결을 꼭 챙겨올게요. 아참 숲의 숨결이 아니어도 다른 술도 상관없어요?"
"숲의 숨결만큼 화끈한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그녀는 자신이 선물로 준 물건과 더불어 칼스가 고른 불을 붙일 때 사용할 수 있는 반지까지 모두 공짜로 내어주었다. 칼스는 일단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연금공방 밖으로 나와서는 릴리나를향해 물었다.
"궁금한 게 생겼는데. 원래 엘프들은 다 저렇게 술을 좋아하나요?"
"그게... 오랜 세월을 살아가다 보니 어지간한 자극에는 크게 반응하지 못해서 독한 술 같은걸 찾는 분들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옛날 알펜 숲에서 머물 당시에는 남쪽 지역에서 가져온 환각초를 태우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그 부작용이 알려져서 금지되었지만요."
"그렇군요. 음... 위스키는 인간 귀족들을 대상으로 판매하기 위해 만들려고 했는데, 이러면 또 상황이 달라지는데. 릴리나도 그럼 독주를 즐기는 거예요?"
"후후. 저는 아직 어리다 보니 그 정도까지 자극을 찾지는 않아서요. 아직 독주보단 달콤한 벌꿀술이 더 좋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릴리나는 다음 목적지를 물었고, 딱히 이다음 행선지를 생각해두지 않았던 칼스는 그녀에게 아직 못 가본 명소가 있다면 구경시켜달라 말했다.
그 후로 해가 질 때까지 엘기간테 동쪽 방면에 거주 중인 드라이어드들의 거주지를 방문하여 작년의 대화재의 상흔과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힘쓰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하늘궁전에 있는 여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장다름의 본단에 찾아가 멋들어진 검과 갑옷을 선물 받기도 했다.
특히 론우드 장군이 예전에 엘기간테를 침입하려 했다는 인간들을 저지하고 얻었다는 검은 문외한인 칼스의 눈에도 꽤나 뛰어난 명검처럼 보였다.
"큭큭. 칼스. 돌아가면 검술 훈련도 해야겠는데? 그 좋은 검을 썩히긴 아깝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에 와서 검술을 배우느니 차라리 엘레노아가 정식으로 기사서임을 받으면 선물로 줄까 생각 중이에요."
칼스는 론우드가 검과 갑옷을 선물할 때 자신은 검에 대해 잘 모르니 줘도 써먹지 못할 거라고 말했는데, 그는 어차피 자신이 쓰는 검은 따로 있으며 이것들은 창고에서 먼지만 쌓이던 것들이니 그의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며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엘리사때와 마찬가지로 숲의 숨결처럼 독한 술이 만들어지면 자신의 몫도 꼭 챙겨달라는 부탁은 덤이었지만.
"후후. 그 아가씨가 부러워지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도 챙겨주는 걸 보니 말이야."
"링메인도 슬슬 연인을 만드셔야 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밍슈펠트르님은 어떻게 된 거지."
"흐흥~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말이지."
"대장님은 고향마을에 두 분의 아내와 네 아이를 두고 계시지. 몰랐었나 보군?"
"네. 딱히 그런 이야기를 제 앞에서 꺼내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아내와 아이들을 못 본 지도 꽤 되셨겠는데요."
"그렇지. 예전에 고향 쪽으로 가는 임무를 끝내고 잠깐 들렀을 때가 1년 전쯤이니..."
"흐음... 그렇군요."
칼스는 망구다이의 말에 만약 이들이 1년 계약이 끝나고도 계속 허니 상단에 남게 되면 그들의 가족들도 마을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궁전으로 되돌아왔다.
이미 다음날 오전에 엘기간테를 떠날 것이라고 아옐루나에게 이야기를 해두었던지라 그녀는 환송연을 해야겠다며 하늘 의회 회의장을 거대한 파티장으로 꾸며두었고, 해가 저물 때쯤에는 하늘정원에 그가 엘기간테에서 만났던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과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몇몇 엘프들은 하프와 류트 같은 악기를 꺼내들고 연주했는데 그 음악이 환상적인 엘기간테의 야경과 어우러지자 그야말로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 칼스였다.
- 디리링! 디딩!
"후후. 어때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요?"
"여왕님. 정말 최고네요. 고작 시골마을 출신의 상인인 제게 이런 극진한 대우를 해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작이라뇨. 칼스 당신은 우리들이 모시는 아르케여신님의 축복을 받았고, 그 축복받은 지혜를 활용해 우리를 도왔어요. 인간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당신의 지위는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죠. 그리고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지위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높아질 거 같은걸요."
"아옐루나의 말대로 자네는 분명 머지않아 그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게 될 걸세."
"감사합니다."
여왕 아옐루나와 그의 남편인 카를로스 대공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대공의 손에 며칠 전 칼스가 선물한 '숲의 숨결'의 빈병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파티에서 남아있는 술을 나눠 마신듯했다.
실제로 파티장 이곳저곳에는 칼스가 가져온 꿀과 벌꿀 술 등이 놓여있었고, 그들은 그 술과 꿀이 칼스가 가져다준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지나가면서 한 번씩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했다.
그렇게 한참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엔 칼스 역시 여러 잔의 술을 들이켜서인지 들뜬 기분이 되었고, 그는 연주하고 있는 엘프에게 류트를 빌려 들더니 하늘 의회의 탁자 위에 올라서서 소리쳤다.
"여러분! 저를 환송해 주는 이 멋진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진 것도 없는 어린아이인지라 딱히 드릴 것은 없고, 여러분들을 위해 한 곡조 불러볼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칼스의 외침에 다들 웃으며 그렇게 하라며 답했고, 이에 자신감이 붙은 칼스는 며칠 전 릴리나의 어머니 이렐린에게 배운 기본 코드를 제멋대로 튕겨대며 지구에서 가끔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담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안치환 - >
비록 어설픈 솜씨로 인해 제대로 된 반주도 없는 상태에 취기에 젖어 부른 노래이긴 했으나, 워낙 그 노랫말이 강렬하고 이들의 정서에 맞아서였을까. 두 번째 반복되는 구간이 됐을 땐 파티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이 노래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 후로 몇 가지 노래를 더 부른 칼스였으나 분위기에 취해 마신 술로 인해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겨버린 그였다. 다만 그날 그가 처음 불렀던 노래는 엘기간테내에 굉장한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