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아르덴 대삼림 그리고 엘프왕국
- 지끈 지끈
"으음...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칼스는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 손을 밀어 넣고 뇌를 주물럭거리는듯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자리에 누운 채 어제 대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도저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드르렁 푸우!
옆 침대에 곤히 잠들어있는 망구다이의 모습과 창밖의 하늘이 아직 어두운 것으로 보아 아직 해가 뜰 시간은 아닌듯싶어 다시 잠자리에 들어보려 했으나. 칼스는 계속되는 숙취로 인해 결국 포기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으음...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벌꿀주만 여섯 잔 넘게 마시고, 여왕이 가져다준 과일주도 계속 들이킨 거 같은데... 으윽! 물이라도 좀 마셔야겠다."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칼스는 침상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와 연신 물을 들이키는데 여전히 밖이 소란스러운듯하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와씨... 엘프들은 죄다 주당들만 모여있는 건가? 아니지 내가 몇 시간 안 잔 걸 수도 있겠네."
복도에 나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혀를 찬 칼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정원에는 여전히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엘프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며 파티를 만끽하고 있었다. 칼스는 그중에서 릴리나를 발견하고는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는데 그녀 역시 그를 발견했는지 미소를 띠며 반겨주었다.
"후후. 하늘정원 최고의 가수 칼스가 다시 돌아왔군요."
"으윽. 너무 크게 말하지 마세요. 머리가 징징 울린다고요. 게다가 그 유치한 별명은 뭡니까."
"뭐긴요. 칼스가 불렀던 노래들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데요."
"그때는 제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그나저나 제가 들어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죠?"
"글쎄요. 꽤 오래 지나긴 했죠. 슬슬 해가 뜰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요."
릴리나의 대답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칼스는 약간 상기되긴 했으나 여전히 멀쩡해 보이는 릴리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세상에... 그럼 밤새 마시고 논 겁니까?"
"엘프들은 원래 파티를 열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즐기는걸요."
"으음. 여기 계신 분들이 왜 독주에 그렇게 환호했는지 알 거 같네요. 다들 주당이었던 거예요. 릴리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전 달콤한 과일주나 벌꿀주가 더 좋아요."
"네네. 그러시겠죠."
칼스는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숲 공기를 마시니 지끈지끈 쑤셔오던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하늘 한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술자리가 마무리됐는지 파티 참여자들이 정원 곳곳에 놓인 술병과 잔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그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왕과 대공이 칼스를 발견하고는 웃음 지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까전에 취해서 잠든 걸 같이 다니던 일행이 들쳐메고 들어간 거 같았는데 어느새 또 나와있네요"
"하하. 취해서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추태는 없었고 멋진 무대를 선보였었죠. 후후. 음유시인들이 꽤나 감명 깊었는지 그 노랫말들을 다 옮겨 적어 두었더군요."
"세상에..."
칼스는 여왕 아옐루나의 말에 자신이 술에 취한 채로 무슨 노래를 불렀었나 떠올리려 했으나 몇몇 곡들 외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전에 떠날 것이라고 했죠? 가는 길에 칼스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인원을 뽑아두었으니 함께 가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준비해두어야 할 일인데요. 어디까지나 칼스는 제 손님으로 방문한 거니까요. 그나저나 들어보니 여기 릴리나를 비롯해 몇몇 주민들을 고용해 상행을 할 거라던데 맞나요?"
"네. 앞으로 엘기간테 방면의 거래는 릴리나에게 일임할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하긴 이 아이 덕분에 칼스와 우리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가장 적합한 인재라고 할 수 있겠군요."
"네. 게다가 이미 몇 년간 인간 사회에 뒤섞여 지내본 적이 있는 만큼 중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후후 분명 그렇게 되겠지요. 부디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아! 슬슬 해가 떠오르나 보네요."
그녀의 말대로 잔뜩 붉어진 하늘과 맞닿은 숲의 끝자락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칼스는 마치 신을 영접하듯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들을 보며 과연 이곳의 태양도 지구의 그것처럼 그저 우주의 한 항성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만의 특별한 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해졌으나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데다 괜한 분란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냥 흘려버렸다.
"자. 이제 해도 떠올랐으니 슬슬 각자의 할 일을 하러 가야겠죠."
"어... 휴식을 취하지 않으셔도 되는 건가요?"
"하루쯤 밤새운다고 골골대는 약골 따윈 진정한 엘프가 아니지. 내가 한참 장다름에서 활동할 땐 삼일 밤낮으로 술잔치를 벌인 적도 있다네."
"결국 저한테 술내기에서 졌지만 말이에요."
"끙... 누가 알았겠소. 궁전에서 곱게 자란 줄로만 알았던 여왕의 후계자가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술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제가 싫은가요?"
"그럴 리가."
"후후후. 그럼 오늘 밤에 기대해봐도 되겠군요."
"이런! 당해버렸군."
"하하... 금슬이 참 좋으시군요. 부럽습니다."
그렇게 여왕 부부의 닭살 넘치는 애정행각으로 엘기간테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환송회도 끝이 났고, 칼스는 잠에서 깬 링메인과 망구다이 그리고 그들을 숲 밖까지 안내해 줄 정찰대원 몇몇을 대동한 채 엘기간테를 떠나 에올론마을로 향했다.
망구다이와 링메인의 등에는 큼지막한 등짐이 매여있었는데 그것은 여왕 아옐루나가 떠나는 칼스 일행에게 내려준 선물이 담겨있었다.
"어째 들어갈 때보다 더 짐이 많아진 거 같은데."
"그래도 부피에 비해 무게는 덜 나가잖아요?"
"그렇긴 한데 숲길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말이지."
"음. 엘기간테에서 엘그랑가든 사이라도 길을 좀 내도 되는지 여쭤봐야겠네요. 엘그랑가든에서 에올론마을 사이는 아직 힘들어도 그 안쪽은 가능할 거 같은데."
"뭐. 앞으로 이쪽 상행은 릴리나양이 담당한다고 했으니 그쪽에 말해두면 알아서 하겠지. 어우 모르겠고 어서 돌아가서 좀 쉬고 싶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알딸딸한 거 같아."
"킥킥. 어여쁜 엘프 아가씨들이 술 따라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마시더니."
"아니. 낸들 엘프들이 하나같이 너 같은 주당인 줄 알았냐?"
투닥거리며 걸어가는 망구다이와 링메인을 바라보던 칼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고, 그런 그의 시야에는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어머니의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엘기간테로 향했을 때 함께했던 타렌과 레일라는 되돌아가는 길에 함께하지 못했고, 대신 엘기간테 주변을 지키는 정찰대원 다섯이 그들의 귀향길을 도왔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할 뿐 딱히 칼스와 얽히려 하지 않았기에 묵묵히 여정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걸어 도착한 엘그랑가든에서는 릴리나의 부모가 머물고 있는 집에 방문하여 앞으로 릴리나가 칼스와 함께 일을 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그런가. 뭐 이제 그 아이도 제 앞길을 알아서 찾아갈 나이니까."
"흠. 그래도 제 짝을 찾을 때까지는 숲속에서 머물렀으면 했는데."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릴리나를 고용한 이유가 엘기간테로 향하는 상행을 전담할 믿을만한 이가 필요했기 때문이거든요. 앞으로도 그녀는 에올론마을보다는 엘기간테쪽에 머무는 기간이 더 길 거예요."
"그럼 다행이군. 네 상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딸을 잘 부탁하마."
두 부부는 이제 성년이 된 딸의 일에는 크게 간섭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저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전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머문 칼스는 다음 날 아침 엘그랑가든을 출발하여 드디어 하늘을 뒤덮고 있던 푸른 장벽을 넘어 픽시들이 가꿔낸 아름다운 화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까지가 저희의 임무였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 곳까지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여왕님의 손님으로 왔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겠지요."
"시간 여유가 되시면 잠깐 마을에 들렀다 가는 게 어때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겠군요. 저희가 빠진 만큼 동료들이 바빠지니까요."
그렇게 말한 경비 대원들은 칼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왔을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나뭇가지를 밟아가며 숲속으로 사라져갔고, 칼스는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왜 숲 안에 딱히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도착했네요. 두 분 다 고생이 많으셨어요. 조금만 더 힘내서 마을까지 가보도록 하죠."
"오늘은 편하게 발 뻗고 자겠군."
"누가 들으면 엘기간테에서는 잘 못 잔 줄 알 거 아냐. 실컷 먹고 잔 주제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너는 그 성격 때문에 애인이 없는 거다 링메인."
"뭐야? 죽고 싶어?"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머금은 칼스는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에올론마을을보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쪽에서도 칼스 일행을 발견했는지 마을에 남아있던 상단 직원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상단 건물에 들린 칼스는 가져온 짐들을 내려놓으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모여든 이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제가 자리 비운 사이에 큰일이 있지는 않았나요?"
"우리야 늘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 뭔 일이야 있었겠나."
"맞아. 여기는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이란 말이지."
"벌들도 순조롭게 불어나는 중이야. 스티븐도 이제 내검정도는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지."
"오... 열심히 가르쳤나 보네."
"내가 잘 가르쳤다기보다. 이 녀석의 간절함이 더 컸던 거겠지."
잭의 칭찬에 스티븐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여동생 스밀라는 주방 일을 담당하는 메릴의 밑에서 잔심부름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아옐루나가 준 선물들을 하나씩 열어 확인해 보았는데 대부분이 아르덴 대삼림에서 나는 약초와 버섯들이었고, 드라이어드들이 키워낸 향목들도 조금 섞여있었다.
"약초들도 아주 귀한 것들이 아닌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네요. 이건 해열에 효과가 있는 거고, 이건 말려서 차를 끓여마시면 진통제 역할을 하는 거고요."
"좋네요. 그럼 약초들은 상단에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걸로 하죠. 나머지는 제가 적당히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럼 따로 뭐 이야기해야 할 건 없죠?"
"네."
"그럼 전 집에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숲을 가로질러 오다 보니 피곤하네요. 망구다이와 링메인도 고생 많으셨으니 며칠간 푹 쉴 수 있게 해줘요."
"알겠습니다. 저 녀석들 얼굴을 보면 고생한 거 같지는 않은데 고용주의 지시라면 그리해야죠."
칼스는 집에서 쓸 분량의 약초와 버섯, 그리고 향료 일부를 챙겨들고 상단 건물을 나섰다. 며칠 만에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어머니 안나와 그의 누이 에일린이 그를 반겨주었고, 칼스는 둘에게 가져온 선물들을 건네주었다.
"칼스. 아르덴 숲은 정말 엄청 넓어?"
"음. 며칠동안을 걸었는데도 끝을 알 수 없는 곳이니 엄청 넓기는 하지."
"그럼 엘프들의 왕도 보고 온 거야?"
"응. 여왕님이셨는데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어. 게다가 그 여왕님이 머무는 궁전은 커다란 나무 밑동에 자라난 버섯 위에 지어졌는데.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지."
"나무 밑에 돋아난 버섯 위에 궁전이 있다고? 엘프 여왕은 저기 꽃밭에 사는 픽시들처럼 자그마한 거야?"
"아니. 그 나무가 정말 엄청나게 커다랗거든. 마을 앞 언덕 위에 커다란 나무 있지? 그거에 수십 배는 더 큰 나무야. 그들은 그 나무를 어머니의 나무라고 부르면서 아르케 여신님이 준 선물이라 여기고 있어. 실제로 밤에는 나무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데 주변에 정령들이 날아다녀서 엄청 신비한 모습을 뽐낸다고."
"세상에. 엘프들이 사는 곳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 나무가 빛을 낸다는 건 처음 알았구나."
"네. 아무튼 그 나무에 커다란 버섯이 자라나있는데, 그 위에 궁전도 있고 넓은 정원도 있었어요. 여왕님의 배려 덕분에 엘기간테에 머무는 3일 동안 그 궁전에서 지낼 수 있었죠."
가족들은 칼스의 말에 다들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고, 특히 한창 감수성이 풍부해질 나이인 에일린의경우 칼스가 말한 광경을 상상이라도 하는지 눈을 감은 채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구경시켜드리고 싶은 곳이었어요."
"음. 네가 초대된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들의 안내를 받아도 이틀을 걸어야 하는 곳이라면서, 길도 없는데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는 숲에 잡아먹히고 말게다."
"물론 그냥 들어가면 큰일 날일이죠. 그 안에서 집채만 한 곰도 만났던걸요."
칼스는 엘기간테로 가던 도중 보았던 리즐베어와의 조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엘프들과 어울려사는 여러 이종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칼스가 피곤함이 몰려왔는지 조는 모습을 보이자 한센과 안나는 칼스를 들여보내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