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제레미와 릴리나도 각자의 할 일을 찾아 떠나고, 칼스는 상단 건물 최상층에 자리한 자신의 방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음. 일단 이번에 새로 도착한 보리로 최대한 스피릿을 뽑아내서 숲의 숨결 물량부터 확보해야겠네. 생각했던 것보다 엘기간테쪽의 반응이 좋았으니까 받은 것도 많은 만큼 신경을 써줘야겠지."
칼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적혀있던 술이라는 글자 옆에 엘기간테와 숲의 숨결이라는 글씨를 적고 체크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오래전에 적어 둔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그 단어 옆에는 [치즈]와 [꿀]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는데 그 옆에 [고기]를 추가해 위에 적힌 술과 큰 원을 그려 묶더니 [미식]이라는 단어를 새로 적어 넣었다.
"꿀과 치즈. 이 두 가지만 잘 활용하더라도 멋진 요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여기에 엘기간테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더해 고기 요리를 개발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할 거 같았던 남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무기가 되어줄 거야."
칼스가 이곳에서 상단을 만들어 키워나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생각했던 아이디어 중에 하나가 바로 귀족층을 타깃으로 하는 상품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단계로 비누를 만들어 시판 준비를 했고, 두 번째가 바로 [미식] 즉 맛있는 음식이었다.
지구에서도 흔히 미슐랭 가이드라고 불리는 안내서가 있다. 이 가이드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흔히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에 가면 볼 수 있는 지역관광안내도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타이어를 만드는 회사가 차를 타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이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해 광고를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각 지역의 맛집들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가이드로 만들어 배포했었다.
그러다가 그 가이드에 실린 맛집들이 유명세를 떨치고 사람들이 그 가이드에 실린 정보를 믿기 시작하자 아예 미슐랭 스타라고 하는 등급을 만들었고, 그가 한참 지구의 삶을 살아가던 시절에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3개의 별점을 받으면 그 식당 한곳을 들리기 위해 여행을 해도 좋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칼스가 중점적으로 본 것은 바로 일정 이상의 명성이 갖춰지면 그곳이 비록 교통수단이 발전하지 못해 접근하기 힘든 곳이어도 부유한 손님들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에올론 마을은 동부 왕국에서도 그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문화적 측면에서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지만 이 지역만의 고유한 음식과 문화를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수도 리온에 살고 있는 귀족들이 돈을 싸 들고 찾아와 기꺼이 그 주머니를 열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문제는 치즈인데... 아직까지 이 근처에서 만드는 치즈는 보존식품의 기능에 집중된 것 같아서 맛이 좀 애매하단 말이야... 일단 꿀을 최대한 활용한 디저트를 무기로 마를르성에있는 귀족 아가씨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게 우선이야."
칼스가 새로 마을밖에 건설하려고 하는 건물 중에는 픽시들이 자리 잡은 꽃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질 것도 있었다. 솔라스 제국의 참화이후 인간 사회에서 꽃의 정령 픽시들은 거의 보기 힘든 존재가 되었는데 그것을 관광아이템으로 활용해 당장 아무 메리트 없는 이 마을을 찾아오게 만들 무기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건물과 기본적인 디저트 세팅이 되는대로 엘레노아에게 편지를 보내 친구들과 한번 방문하라고 해야겠어. 함께 일하러 와준 이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엘프와 픽시 그리고 드라이어드까지 볼 수 있는 마을이라면 귀족 아가씨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충분할 거야. 음... 초콜릿과 커피까지 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지. 문제는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을만한 요리를 만들어줄 인재가 없다는 건데..."
칼스는 예전 마를르성에서 영주 가족과 식사를 할 때 접했던 요리들을 떠올렸고, 과연 그런 요리를 시골마을에서 자란 평범한 여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대해선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마을 내에선 해결불가능할거 같으니 마를르성에서 구해봐야겠네. 제레미라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마를르남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반쯤은 그곳의 귀족사회에 발을 걸친 채 살아온 그라면 혹시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여긴 그는 여러 단어들과 표시로 너저분하게 보이는 종이를 잘 접어서 서랍에 넣어둔 뒤 제레미를 찾아 나섰다.
"에. 그러니까 귀족들의 눈에 들만한 요리를 할 사람을 아느냐는 겁니까?"
"네."
"메릴 씨의 음식 솜씨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음식의 모양새는 몰라도 맛은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아니고, 사업적으로 좀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요."
"아하. 흐음... 귀족가에서 요리를 했던 경력이 있는이라... 나이를 먹어서 은퇴한 이들은 몇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과연 현역 때의 실력을 보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작은 마을까지 내려와줄지도 의문이고요."
"일단 다음 상행 때 그런 분들을 찾아가서 한번 물어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렇게 제레미에게 부탁한 칼스는 이번엔 발걸음을 옮겨 상단 건물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아르케 여신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러 온 것으로 보이는 마을 주민들과 그런 그녀들의 기도를 돕는 리지사제가 있었다. 잠시 신전 입구에서 그들의 기도가 마무리되길 기다린 칼스는 마을 주민들이 한결 환해진 얼굴로 신전을 빠져나가며 칼스에게 인사를 해오자 가볍게 그들의 인사에 답해준 후 안으로 들어섰다.
"점점 더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습니다."
"후후. 그러게요. 아마 여신님의 은총을 직접 받은 칼스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아참! 아까 여기 신전으로 드라이어드 한 분을 보냈는데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드라이어드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하이디아님께서 그분을 정겹게 맞이해 주시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저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전에 남아있는 방 하나를 내어드렸죠. 햇볕이 너무 잘 드는 방이라서 비워둔 건데 그분께는 더 좋은 환경인듯하더라고요."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하이디아님은 어디에 계시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방문했는데."
"방에서 쉬고 계실 건데. 딱히 낮잠을 주무시는 분은 아니시니 문을 두드리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리지는 다른 두 복사들과 기도실을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갔고, 칼스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하이디아가 머물고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다.
-똑똑똑
"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실례합니다 하이디아님. 저 칼스입니다."
"칼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일단 들어오렴."
하이디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칼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이디아는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었는데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읽고 있던 문건을 정리해서 책장 속에 꽂아놓았다.
"방해가 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방해랄 게 뭐가 있겠니. 적적한 노인네를 찾아와 이야기 벗이 되어준다는데. 그나저나 아침에는 조금 놀랐단다. 드라이어드라니 네가 엘프 왕국에 방문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 마을에 나와서 살게 될 줄이야."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크게 불편하신 건 아니지요?"
"불편할 거까지야. 오히려 그녀가 꽃나무의 상태를 보다 세밀하게 살펴주더구나. 고마운 일이지."
"그럼 다행이고요. 아참 이번에 방문한 건 전에 말씀드린 성수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되어서 부탁을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성수라... 그래 생각난 김에 내려가볼까."
칼스의 말에 하이디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금 전 그가 통과해왔던 기도실로 향했다. 한참 기도실 주변에 자라난 꽃들을 관리하던 리지는 하이디아와 칼스가 기도실로 들어서자 두 복사에게 일을 맡겨두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이디아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셨어요?"
"칼스 요 녀석이 성수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느냐. 안 그래도 슬슬 시기가 된 거 같아 오늘 개화를 시키려고 한단다."
"앗. 그러면 저희도 준비를 할게요. 로라! 수잔! 성수 받을 준비들 하세요."
"네!"
하이디아가 여신의 꽃나무 앞에 경건한 자세로 자리했고, 리지를 비롯한 복사들은 기도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찬장에서 성수를 담는 용도로 쓰이는 자그마한 병들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하이디아가 양팔을 벌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신의 꽃나무를 비롯해 기도실 주변에 피어있던 꽃들이 마치 엘기간테의 어머니 나무와 같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여신의 꽃나무에 달려있던 꽃망울들이 일제히 개화하더니 성수에서 느껴졌던 상쾌한 향이 기도실을 가득 채워갔다.
"지금이에요! 한 방울이라도 더 받아내야 합니다."
그때 긴장된 표정으로 기도를 지켜보던 리지가 두 복사에게 소리치며 꽃나무에 피어난 꽃을 향해 달려갔고, 나머지 두 복사들도 재빨리 다른 꽃들에 달라붙더니 피어난 꽃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가 흐르자 계속해서 이어지던 하이디아의 기도가 끝났고, 꽃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지자 부산하게 움직이던 세 명의 여인들도 숨을 고르며 자신들이 받아낸 성수가 담긴 병의 입구를 단단히 봉해놓았다.
"하이디아님! 성수가 엄청 많이 나왔어요! 심은 지 1년도 안된 나무인데."
"그만큼 이곳이 여신님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라는 거겠지. 자 그것들을 내게 줘보렴."
하이디아는 세 사람이 건네준 성수병을 들고 이리저리 그 내용물을 살피더니, 그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 들어있던 병을 칼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여기 네가 부탁했던 성수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나요?"
칼스가 건네받은 병에 든 양은 엘기간테에 방문하기 전에 받았던 양의 몇 배는 되어 보였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고, 하이디아는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후후. 어차피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이만큼의 성수가 나왔다는 게 신기한 거란다. 아마도 네가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것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아닌 여신님께 드리려무나. 그 성수를 가지고 뭔가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니? 그중 일부를 여신님께 봉헌하는 것도 괜찮겠지."
"정말 그래야겠네요. 그분이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칼스는 전에 보았던 여신이 과연 자신이 준 술을 받아줄지 의문이었으나, 그녀의 기운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라는 엘프들이 하나같이 주당인 걸 생각해 보면 생각 외로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성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