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남은 것들 중에 절반은 엘기간테로 보내고, 두 병 정도는 마를르남작에게 보내야겠지? 그럼 겨우 8병이 남는 건가. 확실히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긴 하네. 성수를 좀 더 안정적으로 얻을 방법을 구해야겠는데."
마를르 성에 있는 아르케 신전에서 성수를 받아올까도 고민해 봤던 그였으나, 하이디아에게 물었을 때 오히려 그곳이 에올론마을의 신목보다 성수 생산량이 적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걷던 그의 눈에 여전히 화사한 꽃들을 피워내고 있는 신전의 화단을 오가는 귀여운 픽시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 신기한 인간이다!]
[어디 어디?]
[저 인간이.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그 인간이야?]
[응응!]
픽시들 중에 일부는 칼스도 처음 보는 개체였는데 그들 역시 칼스에 대해 호기심이 있는지 그의 얼굴 주변을 날아다니며 이리저리 살피는 모양새였다. 그중에 하나는 아예 그의 머리 위에 앉더니 아르케 여신이 성흔을 남겼던 이마 부근을 가리키며 웃음 지었다.
[여기 여기! 어머니의 흔적이야!]
"이봐. 너희들은 본 적이 없는 친구들 같은데. 새로 태어난 거야?"
[응.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어! 로자야!]
[나는 써니!]
픽시의 생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고, 칼스 역시 그 부분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기에 그저 꽃밭의 영역이 넓어지고 관리가 잘 되면서 그들의 개체 수가 늘었나 보다 여기며 픽시들의 대표격인 홀라홀라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재잘대는 픽시들을 떼어놓은 칼스는 마을 밖에 있는 꽃밭으로 향했는데, 여름을 맞이해 장미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칼스가 이에 가까이에 피어있는 장미꽃으로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픽시 하나가 날아오더니 그에게 소리쳤다.
[조심해! 그 꽃나무엔 가시가 있으니까.]
"고마워."
처음엔 꽃을 꺾지 말라고 하려는 줄 알았으나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 좋게 대답을 해준 칼스는 화사한 장미꽃들을 구경하다가 다시금 꽃밭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자신이 길러낸 수많은 벌들이 꽃과 꽃들 사이를 오가며 열심히 꿀을 채밀하는 과정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홀라홀라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칼스잖아? 킁킁! 어머니의 냄새가 또 짙게 나는 걸 보니 기도를 드리고 왔나 보구나?]
"하하하. 네. 그래서 아쉽게도 오늘은 빈손으로 왔어요."
[괜찮아!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뭐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아뇨. 그냥 못 보던 새로운 픽시들이 태어났길래 어찌 된 건가 싶어서 와본 거예요."
[다 너희덕분이지 뭐. 꿀벌들이 많다 보니 꽃들이 많이 피어났고, 거기에 마을에 어머니 나무까지 심어줬던데? 그래서 그 기운을 받은 새 친구들이 태어난 거야.]
"음? 여신님의 나무와도 관련되어 있다고요?"
[몰랐어? 우리들도 가끔씩 가서 어머니에게 기도를 드리고 오는데. 하긴. 보통 인간들이 잘 다니지 않는 밤에 몰래 다녀오니까 몰랐을 수도 있겠네.]
"그랬군요."
칼스는 홀라홀라의 말을 듣고, 어째서 이 작은 마을의 신목에서 마를르성보다 더 많은 양의 성수가 생산됐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이곳의 어머니 나무엔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픽시와 엘프,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진실된 믿음이 전해졌기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일 터였다.
[왜. 앞으로는 가지 말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곳에서 함께 기도해 주면 좋죠. 굳이 밤에 몰래 오지 않으셔도 다 같이 기도를 올려도 좋을 거 같네요."
[아직까지는 인간들 곁에 가는 게 부담스러워서. 뭐 요새는 그래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아참. 저기 언덕 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건데요. 그곳에도 멋진 화단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위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대신에 알지?]
"네. 돌아가는 대로 갓 따낸 꿀을 한통 보내드릴게요."
[좋아! 칼스 너는 역시 대화가 잘 통하는 인간이란 말이야.]
단 꿀 한 통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뛰어난 실력의 정원관리사들을 부릴 수 있게 된 칼스는 기뻐하는 홀라홀라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를 비롯해 픽시들의 몸에서 각각 다른 독특한 향이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물었다.
"이제서야 느낀 건데. 픽시들은 다 제각각 다른 향이 나네요?"
[응? 당연한 거 아냐? 나는 페홀라꽃에서 태어났으니 페홀라꽃 향기가 나는 거고, 다른 픽시들은 각각 자신이 태어난 꽃의 향을 품고 있지.]
"그... 그럼 혹시. 그 향을 따로 더 세게 뿜어내거나 할 수 있나요?"
[글쎄?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잠시 기다려봐. 끙! 이건 아니고. 에잇! 이얍!]
칼스의 말에 허공에 떠서 이리저리 힘을 주며 기합성을 내는 홀라홀라였고, 이내 포기했는지 공중에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기진맥진한 어조로 말했다.
[헥헥... 안되는 모양이야. 괜히 땀만 흘렸네. 냇가에 가서 좀 씻어야겠어.]
"그렇군요... 땀...? 땀!? 픽시들도 땀을 흘려요?"
[응? 물론이지. 우리도 열심히 일하면 땀 정돈 흐른다고?]
"픽시... 땀..."
[뭐. 뭐야? 지금 굉장히 위험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래. 땀! 픽시들의 땀에 분명 향이 묻어 나올 거야.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시원한 물을 받아올 테니."
[그... 그래.]
칼스는 정령들이 비록 정령이기는 하지만 물리력 행사가 가능한 개체들이라는 것과, 그들의 몸에서도 땀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후다닥 마을의 우물로 달려가 커다란 단지에 물을 반쯤 채워서는 다시금 꽃밭으로 향했다. 그리고 홀라홀라에게 그물로 몸을 씻게 했는데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나는 남성체야!]
"에이. 제가 설마 그런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겠어요? 그저 전 여러분들이 흘린 땀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니까요. 킁킁!"
[뭔가 매우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일단 찝찝하니까 씻긴 씻어야겠지.]
홀라홀라는 칼스가 가져온 단지안으로 들어가더니 세수를 하기도 하고 그 안에 잠수도 몇 차례 하며 온몸의 땀을 씻어내더니 이내 공중으로 떠올라 몸에 묻어있는 물기를 털어내었다.
칼스는 재빨리 그가 빠져나온 물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의 예상대로 픽시가 땀을 씻어낸 물에서는 그의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이 진하게 풍겨나고 있었기에 항아리에서 고개를 뗀 그의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 물려있었다.
그길로 홀라홀라가 씻은 물이 담긴 물이 담긴 단지를 들고 마을로 돌아온 칼스는 책상에 앉아 각종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제레미의 앞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터억!
"음? 이게 뭡니까?"
"뭘 거 같아요? 한번 맞춰보세요."
"음... 킁킁! 호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물이군요. 마시는 겁니까?"
"어... 음. 마셔도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렇습니까? 흐음."
-찰박
제레미는 칼스의 말에 자신의 손을 그안에 담가 이리저리 휘저으며 물의 감촉을 느껴본 후 빼내더니 그 위에 약간 고여있는 물의 냄새를 맡아보고, 급기야 조심스럽게 그것을 입에 머금었다가 뱉기까지 했다.
"보니까 물 안쪽 깊숙이까지 향이 배어있는 건 아닌 것 같군요. 마치 기름처럼 물 위에 향을 내는 물질이 떠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엘기간테에서 제가 모르는 향료라도 구해온 건가요?"
"아. 그거? 픽시가 씻은 물이에요. 제레미가 방금 입에 머금은 건 그들의 땀이나 노폐물 정도가 되겠죠?"
"케엑! 켁켁! 에퉤퉤!"
"글쎄 그러니까 입에 넣지는 말랬는데도."
칼스의 말에 입에 남아있던 물기를 뱉어내느라 난리를 치는 제레미였고, 잠시 후 옆에 놓여있던 컵 안의 물로 입안을 헹궈낸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칼스에게 물었다.
"대체 이걸 왜 가져온 겁니까? 혹시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으신 건..."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방금 전 그게 뭔지 알려주기 전까지는 향긋한 냄새라면서 마시려고 한 사람이."
"그건. 그 정체를 몰랐으니... 아?"
"그래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원료만 모른다면 이만큼 좋은 향료가 없을 거 같단 말이죠."
"으음... 확실히. 향료를 만들 때 엄청난 양의 꽃들을 농축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애초에 꽃의 정령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몸에서 나온 물질이라면 그야말로 천연 향료나 다름이 없는 거군요."
"그쵸? 내가 이상한 게 아닌 거죠?"
"음... 물론 그런 발상을 했다는 것부터 정상정인 거 같지는 않습니다만..."
뭔가 심히 위험한 존재를 눈앞에 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제레미의 모습에 칼스는 올려두었던 물이담긴 단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아 모르겠고, 이걸 가지고 비누의 개량 작업을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고요."
"... 다른 존재의 땀이나 노폐물로 몸을 씻을 때 쓰는 비누를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뭐 안될 건 없잖아요?"
"그들이 협조해 주기는 한답니까?"
"뭐... 더러운 물만 아니면 어차피 씻을 거 도와주지 않을까요?"
"그것부터 확인을 하고 진행하시죠."
뭔가 머리가 아파진다는 듯 미간을 주무르며 제레미가 답했고, 칼스는 투덜거리면서 다시금 홀라홀라의 땀[?]이 섞인 물을 챙겨서 창고에 옮겨두곤 다시금 마을 밖으로 나가 홀라홀라와 픽시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처음엔 그의 말에 굳이 시냇물을 놔두고 따로 담긴 항아리의 물에 씻을 필요가 있겠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그들이었으나, 이내 꿀의 공급량을 두 배로 늘려주겠다는 칼스의 공약에 그까짓 목욕 하루에도 몇 번씩 해줄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
그날 저녁부터 칼스는 홀라홀라에게 얻은 물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우선 픽시들에게서 나오는 향료는 공기에 노출된 상태에서 반나절 정도가 지나면 그 향이 다 날아가 버리고 일반적인 물로 변모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전에 동물성 기름과 같은 것에 흡착시키면 향은 좀 옅어지지만 그 지속성이 대폭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향이 배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상단의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평가를 부탁했는데, 제레미를 뺀 나머지 직원들은 다들 괜찮은 것 같다며 호평했다.
꽃향기가 나는비누가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한 칼스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픽시들의 땀을 채취하기 시작했고, 그 용처를 한동안 밝히지 않았기에 마을엔 칼스가 픽시들이 몸을 씻은 물을 가지고 밤마다 집무실에서 뭔가를 하며 웃음을 터트린다는 괴 소문이 퍼져나갔다.
비누를 만드는것 외에도, 남아있던 40도 언저리의 스피리트에 픽시의 땀을 조금 희석시킨후 다시한번 더 증류시켜 알콜 도수를 높였더니 놀랍게도 거의 현대에서 사용하는 향수와 비슷한 형태의 알코올형 향료를 만들어낼수 있었다.
"좋아... 이건 무조건 팔릴거같아. 이제 꿀 말고 내세울 수 있는 무기가 더 생긴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