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픽시들의 땀을 이용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낸 칼스는 마를르성에 증류기로 사용할 소줏고리를 몇 개 더 주문했다. 그리고 잭의 밑에서 벌통 관리와 술 생산일을 하고 있던 스티븐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상단주님 저를 찾으셨다고 하던데."
"응. 일단 편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스티븐은 깍듯한 예우를 갖추며 칼스의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칼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말했다.
"요새. 일을 하면서 짬짬이 조각도 다시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만약 업무에 지장이 생길 거라 생각하시는 거라면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음 그건 아니고 내가 사실 스티븐을 데리고 온 데에는 그런 손재주가 한몫한 거라서. 슬슬 그 솜씨를 필요로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거든."
칼스는 비누와 향수가 어느 정도 상품성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자각한 순간, 이제 그 상품을 좀 더 돋보이게 만들어줄 디자인의 요소가 들어갈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잘 만든 향수라도 그것이 투박한 병에 들어있으면 매력이 떨어지듯, 이 시대의 상위층을 이루는 귀족들의 눈에 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 그들의 격에 맞는 모양새를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내가 만들어준 비누는 알고 있지?"
"네. 제 동생도 아주 좋아하더군요. 주방에서 나오는 각종 기름때를 닦아낼 때 좋다고요. 냄새도 향기로워서 자기 전에 세수를 할 때도 요새는 꼭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물품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판매할 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거야. 이번에 내가 새로 만든 이 향수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향수요?"
"응. 한 방울을 찍어서 몸에 발라두면 길면 반나절까지도 그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거지. 문제는 이 향수를 담을 병이 너무 못생겼다는 거야. 그래서 이 병을 감쌀 나무틀을 만들 건데, 그 나무틀 위에 멋진 조각을 해서 판매를 할까 생각 중이지. 그리고 그 조각을 스티븐 네가 담당해 줬으면 좋겠어."
"아... 제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처음부터 아주 걸작을 만들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게 아냐. 그저 지금부터 꾸준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간 저 왕도 리온의 왕족들마저도 한눈에 반할법한 조각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어? 내일 내가 잭에게 말해 둘 테니 벌통이나 술을 만드는 일에서 빠져, 그리고 이 향수병 위에 덮을 나무 케이스의 조각을 시작하라고. 처음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으니 기본적인 도안 틀은 내가 정해줄게. 일단 이번에 만들 향수는 장미꽃의 향이 나는 향수야. 그러니 겉에도 장미꽃이 조각되어 있으면 좋겠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스티븐에게 본격적인 디자인 업무를 맡긴 칼스는 좀 더 다양한 종류의 향을 만들기 위해 코가 마비될 때까지 픽시들의 향을 뒤섞어가며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를르성에 거래를 하러 떠났던 앙켈젠이 인부들을 대거 이끌고 도착했다.
마를르성에서 본 것들을 다른 직원들에게 자랑하느라 바쁜 케틀러를 뒤로하고 칼스는 앙켈젠으로부터 마를르성에서 얻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왕국 북부에서 일어난 분쟁이 장기화되는 모양이야. 마를르 성주변에 도적떼가 되어버린 유랑민들이 있더군. 돌아오는 길에 한차례 습격을 받았는데 케틀러 덕분에 피해 없이 잘 막아낼 수 있었어."
"도적떼가 생겼다고요? 마를르성에서는 뭘 하고 있길래."
"겉으로 보기엔 일반 유랑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 게다가 마를르성 내부에도 외부인들이 제법 들어와있는 상황에서 병사들을 밖으로 돌리기 힘들었겠지. 하지만 슬슬 피해자가 생기기 시작할 테니 용병들을 고용해서라도 처리가 될 거야."
"음...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요."
"두 영주가 제대로 한판 붙을 모양이야. 왕도에서도 개입을 해야 할 타이밍을 놓쳤는지 손만 빨고 있다고 하더군. 아무튼 덕분에 인부들은 싸게 모아올 수 있었어. 상황이 그 모양인데 성내에 무슨 일거리가 있겠어?"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고생했어요."
앙켈젠에게 간단히 상황 전달을 받은 칼스는 마를르성에서 귀족들의 저택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을 했다는 인부들과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가을까지 건물을 다 올려달라는 말입니까? 에이. 기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사람들도 많이 상하고 건물도 제대로 지어지질 않아요."
"그 기간 안에 제대로 된 건물을 완성해 주면 약속했던 금액의 반절을 추가금으로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으음... 그럼 조건을 하나 더 달아주시오. 지금 인부들의 숫자로는 아무래 돈을 얹어줘도 힘드니 추가로 인원을 더 뽑아오겠소."
"대신 추가로 인원이 늘어나는 만큼 보상금의 액수는 약간 조정을 하겠습니다. 물론 기본금은 지금과 동일하고요."
"좋습니다. 그럼 당장 일을 시작하도록 하죠."
칼스는 애초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싼 임금으로 인부들을 고용했기에 추가로 인원을 더 뽑아서 쓴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고, 오히려 그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기 위해선 가을까지 그럴듯한 숙소 하나가 완성되어야 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고 칼스는 상단의 일을 살피면서 수시로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현장에 들러 일의 진척도를 살폈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수확의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그사이 한 번 더 에올론 마을에 방문한 릴리나에게 완성된 숲의 숨결을 넘겨줄 수 있었고, 꾸준한 생산을 통해 어느덧 근 오크통 네 개를 위스키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서늘한 지하창고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그 오크통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이상 숙성될 예정이었다.
또한 스티븐의 실력도 제법 괜찮아져서 그럴싸해 보이는 조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칼스의 눈에는 충분히 쓸만해 보였으나 귀족가의 물건들을 자주 접해봤던 제레미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기에 좀 더 기술을 다듬고 있었다.
- 탕! 탕! 탕!
"어이! 거기 마무리 작업 잘 지으라고! 괜히 잘못 쳐서 나무 기둥에 금이라도 가면 골치 아파!"
"걱정 말라고!"
마을 밖 언덕 위에 새로 짓고 있는 숙소는 이제 건물이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지 단순한 짐꾼 노릇을 하던 인부들은 다 해산됐고, 능숙하게 망치를 다루며 건물 구석구석에 마감 작업을 하는 기술자들만이 남아있었다. 칼스는 그들 중 가장 대표격인 인물과 함께 건물 내부를 거닐며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여기 이쪽은 보다시피 약간의 대리석을 씌워 고급스러움을 더했습니다. 나무들 역시 최고급 원목만을 취급했으니 갑작스러운 수축이나 뒤틀림 현상은 없을 겁니다. 다만 내부를 밝히기 위해서 초를 사용할 때는 조금 조심해야 할 겁니다. 도시의 저택보다 목재의 비율이 높다 보니 화재에는 조금 취약하기 때문이죠."
"불이라. 그 부분은 직원들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 방법밖엔 없죠."
"2층에는 꽃밭이 내려다보이는 방향에 10개의 객실이 있고, 각 객실의 건너편에 사용인들이 머물 방이 2개씩 있습니다. 그리고 저택에서 사용하는 물은 각층의 사용인들의 방 쪽문을 통해 나가면 보이는 물 저장고에서 떠서 사용하면 됩니다. 물론 그 저장고 안에 물을 채우는 건 그쪽 상단 직원분들의 힘을 통해야겠지만요."
사실 픽시들의 꽃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위해 포기한 것이 바로 물의 편안한 공급이었다. 아무래도 건물이 지어진 위치가 언덕 위쪽이다 보니 따로 우물을 팔수도 없었고, 오로지 근처의 물가에서 직접 물을 떠서 저장고 안을 채워놓아야 했다.
게다가 귀족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물의 소비가 많았기에 매번 채워줘야 하는 물의 양도 어마어마했기에 해결책이 필요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마감 작업까지 마친 인부들은 철수했고 그들과 함께 일했던 잭슨이 칼스를 찾아왔다.
"잭슨 아저씨 어때요? 나중에는 직접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글쎄다. 어깨너머로 열심히 훔쳐보긴 했는데 몇 가지 세밀한 기술은 연구를 좀 해봐야 할 거 같다."
"뭐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 몇 번 더 지켜보면 되겠죠."
"근데 건물은 완성됐는데, 안에 채워야 할 가구나 장식들은 어찌할 셈이냐. 네 말대로 귀족들의 눈에 맞추려면 한두 푼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는 게 있어요."
처음에는 칼스도 마를르성에서 귀족들의 저택에 쓰이는 가구와 장식품을 들여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필요한 물품들의 가격을 알아보니 건물을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어차피 자신만의 특색 있는 모습을 메리트로 삼기로 했으니 가구와 장식까지도 이에 따르고자 했다. 바로 엘기간테에서 엘프들이 쓰는 가구와 장식품들을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릴리나가 부디 제대로 된 물건을 가져와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
며칠 후 칼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릴리나 일행이 에올론마을에 도착했는데, 그녀의 뒤에는 이전에 새로 뽑았다는 새 직원들 외에 낯선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호오. 이곳이 그 마을인가 보군."
"확실히. 픽시들이 자리 잡았다더니 어머니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구려. 인간들의 마을임에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아."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드라이어드와 엘프들은 마을 안에 들어서서는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칼스는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고 릴리나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아요 릴리나. 근데 저분들은 누군가요?"
"아. 칼스가 저번에 부탁한 가구에 대한 일을 해결해 주실 분들이에요. 하늘궁전에서 쓰이는 가구들은 거의 대부분 저분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런 분들이 왜 여기까지."
"그게..."
릴리나가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를 하려는데 마을을 둘러보던 그들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칼스를 발견하곤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이 어린 인간이 그 친구인가 보군.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안하게 됐네. 나는 엘기간테에서 나무 만지는 일을 하는 이케라라고 하네."
"나는 이 엉터리 엘프 녀석이 기껏 키워낸 나무를 망치지 않나 감시하는 프리츠일세."
"허니 상단의 칼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 어린아이가 이곳에서 좋은 가구를 원한다고 주문을 하러 오더구나. 그래서 어디에 넣을 가구인가 물었더니 엘기간테에는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직접 건물을 보고 그 안에 어울릴 거 같은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거절했더니. 그냥 가구만 만들어주면 숲의 숨결 한 병을 내어준다고 하길래 냉큼 이곳까지 직접 달려온 것이지."
"하여간 나날이 술만 늘어가는 늙은이라니까."
"남 말하긴? 자네도 어머니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숲의 숨결을 꼭 맛보고 싶다고 따라온 거 아닌가."
꽤 오랜 기간 함께했던 동료인 둘은 금세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였고, 칼스는 그런 둘에게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내미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숲의숨결이요? 드리겠습니다. 두 분에게 각각 한 병씩 드릴 테니 진정하세요. 사실 약간 시간이 촉박해서 걱정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니?"
"한 달 후면 제 형님이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전까지 건물 내부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했거든요."
"후후. 한 달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지. 어느 건물인가 당장 안내해 주게."
이케라와 프리츠는 당장 작업에 착수해야겠다며 칼스를 닦달했고, 칼스는 그들을 이끌고 마을 밖 언덕 위에 지어진 저택으로 들어가 내부의 각 방의 구조와 필요한 가구들의 위치 및 배치 등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음. 생각보다 방이 제법 많군. 그래도 한 달 안에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어. 문제는 나무의 수급인데... 어이 프리츠 저쪽 숲에서 적당히 베어와도 상관없겠지?"
"아마도 그럴 거 같은데. 오는 길에 보니 인간 마을 근처의 숲 치고는 잘 보존되어 있더군. 그쪽은 내게 맡겨두게."
"들었지? 저 녀석이 목재수급까지 다 해준다고 하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아! 자잘한 일을 도울 일손이 좀 필요하긴 한데 그 정도는 지원해 줄 수 있겠지?"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시고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그럼 일단 장정 열 명 정도만 뽑아서 이쪽으로 보내주게."
프리츠의 말에 칼스는 당장 마을로 돌아가 아버지 한센과 형 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을 뽑아 그곳으로 보냈다. 그의 가족들 역시 이번 결혼식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적극적으로 이일에 협조해 주었다.
그 후로 작업은 큰 문제 없이 착착 진행되었는데 중간중간 칼스가 들러서 내부를 확인해보니 어떤 식으로 가공했는지 모르겠지만 매력적인 원목의 무늬를 살린 가구들이 하나씩 저택 안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건물 내부 작업과 별개로 케인의 결혼식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는데 먼저 새로 지어진 저택에 [요정의 집]이라는 공식 명칭을 붙여주었다. 요정의 집 주변에는 픽시들이 만든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1층에 마련된 큰 연회장엔 중앙을 가로지르는 복도 양옆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무대가 갖춰져있어 차후에 있을지 모르는 공연 같은 것을 대비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번 엘기간테에서 온 상품 중에 숲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진귀한 식자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이번 결혼식에서 요리로 선보이기로 했다. 그렇게 약속된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이 커라 와 프리츠는 작업을 모두 마무리 짓고 엘기간테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