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요정의 집 전격 개장
이 시대의 결혼은 대부분 딱히 큰 의식이나 행사 없이 새로이 부부가 될 두 사람과 그 주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함께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점차 인간들 사이에서 계층화가 이루어지면서 부와 권력을 지닌 이들은 단순한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닌 각각의 가문에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요소로 사용했고, 그러면서 결혼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칼스의 형 케인의 경우 귀족은 아니었으나 한마을의 촌장의 장남으로 차기 촌장직을 이어받을 유력한 존재였고, 그런 그의 아내로 점찍어진 수잔 역시 비슷한 규모의 이웃 마을에서 제법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의 딸이었다.
"칼스. 네 덕분에 정말 멋진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겠어. 고맙다."
"뭘 이런 거 가지고, 형수님 되실 분은 언제 오신대?"
"바로 옆 마을에 사는 만큼 당일 아침에 오지 않을까 싶다."
"뭐 식 관련해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 중이니까 형은 그쪽에 신경 쓰지 말고 총각의 마지막 나날을 만끽하라고."
"짜식이... 너도 인마 곧 나처럼 결혼하게 될 거면서. 아무튼 부탁한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형의 모습을 지켜보던 칼스는 16세인 케인이 벌써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이곳이 지구와 다른 세계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형수가 될 수잔은 겨우 열넷.
"아청법이 있었다면 죄다 쇠고랑을 찼을지도... 하긴. 우리 부모님도 그 정도 나이에 결혼을 하셨을 테지."
케인의 나이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보다 한 살 어린 엘레노아 마를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자신이 마를르남작에게 당장에 엘레노아와의 약혼을 미룬 가장 큰 이유가 장남인 케인이 먼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형이 결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가 오갈 테고, 이미 내년이면 열여섯이 되어 혼기가 꽉 차게 될 엘레노아와의 혼인은 곧 현실로 닥치게 될 것이었다.
"허... 이거 열셋에 예비신랑이 되게 생겼네. 저쪽 세상에선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 했는데 말이야."
잠시 한숨을 내쉬던 칼스는 이번 결혼식의 공증인 역할을 해주실 하이디아 사제를 만나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다. 원래 마을에 신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런 결혼식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 두 부부가 속한 마을의 촌장이 공증을 해주거나 도시에서 신전에 일정 금액을 내고 사제 한 분을 모셔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마을 안에 신전이 들어섰으니 한결 수월해졌다.
"왔느냐. 이번에 제법 일을 크게 벌이는 모양이더구나."
"하하. 아무래도 하나뿐인 형의 결혼이니까요."
"그래.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축복의 장이니만큼 함께 누릴 이가 많을수록 좋은 거겠지."
"하이디아님은 준비가 다 되셨나 보네요."
"나야 할게 뭐가 있다고, 그냥 두 사람에게 앞으로 잘 살라고 축언만 내려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듣자 하니 그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내놓을 거라면서? 우리 신전의 아이들도 이끌고 갈 거니까 넉넉히 준비해야 할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굶주리더라도 손님들은 배불리 먹게 해드릴 테니까요."
그 후로 며칠이 지나고 케인의 결혼식 날이 밝았다. 규모가 작기는 하나 그래도 어엿한 한마을의 촌장이 될 사람의 결혼식이었기에 주변 마을의 촌장들이 찾아왔고, 마를르성에서도 결혼식 하루 전날인 어제 제이콥과 몇몇 한센의 지인들이 들어와 머물고 있었다. 칼스는 몰려드는 손님들을 요정의 집 1층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오. 네가 한센의 작은 아들인가 보군. 반갑다 나는 보얀 마을의 촌장 볼튼이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칼스입니다."
"그나저나 한센 이 친구가 결혼식을 크게 치를 거라길래 그래봐야 얼마나 거창할까 했는데 기대를 해도 될 거 같구나. 듣기로는 이번 결혼식의 준비는 네가 다 했다면서? 덕분에 우리 마을에 남아있던 치즈들을 처분할 수 있어서 좋았다만."
"하하. 뭐 이번에 일이 좀 잘 풀려서 가족들의 행사이니만큼 주머니를 좀 털어봤어요."
"앞으로도 우리 마을의 치즈 좀 많이 사주렴."
보얀 마을의 촌장 볼튼 외에 델시, 론체스 마을의 촌장도 속속들이 도착해 자리를 채웠다. 어느 정도 손님맞이가 끝나가고 결혼식이 진행될 시간이 가까워오자 칼스는 식장에 들어와 손님들의 자리에 놓인 술과 치즈들을 챙겨준 후 본격적인 잔치 음식을 준비 중인 주방 쪽을 살폈다.
"거기 고기 타지 않게 불 조절에 유의해! 오늘 지원 온 인원들은 밑재료가 떨어지지 않게 계속 다듬어두고!"
"아까 오전에 짜둔 양젖과 우유는 어디에 뒀나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음식까지 감안했을 때 백인분이 넘는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만큼 오늘은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남은 직원들이 죄다 이 결혼식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중에도 많은 수의 직원들이 주방 쪽에 배치되었고, 덕분에 주방 안은 그야말로 전쟁통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요리의 상태를 체크하는 고든으로부터 음식 준비 상황을 들은 칼스는 이쪽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기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케인을 만나러 2층의 객실로 향했다.
"이야! 정말 멋진데 형?"
"말도 마라. 아침부터 이 옷을 차려입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하하. 형수님은 다른 방에 계시는 거야?"
"어. 아까까지는 옆에 같이 있었는데 보얀 마을에서 친구들이 몇 찾아온 모양이야."
"으흠. 아침에 보니 정말 예쁘게 차려입었던데 그 사이를 못 참고 일을 벌이면 안 돼. 적어도 식은 끝나야 한다는 거 잊지 말라고."
"나 참... 이 형을 뭘로 보고. 그나저나 너도 좀 고생할지도 모르겠더라."
"왜?"
"수잔을 만나러 온 친구들이 대부분 또래 여자아이들이었는데, 그 부모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꾸 네 취향 같은 걸 묻더라고."
"하하하. 그럼 준비해야 할 게 많은 동생은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늦지 않게 내려오라고. 아 참! 에일린 누나는 어디 있대?"
"제레미 씨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본 거 같은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고. 알았어."
허니 상단에 제레미가 합류한 이후 칼스의 누이인 에일린은 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했다. 처음 몇 달간은 그저 멀리서 그의 활동을 구경하기만 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직접 찾아가 치근덕대기 시작했는데, 제레미는 그런 그녀의 접근이 부담스러웠는지 어지간하면 허니 상단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며 만남을 최소화하고 있었으나 이번 결혼식에는 그 역시 참석해야 했기에 에일린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뭐... 제레미 정도면 정말 좋은 남편감이긴 한데. 당사자가 싫다는데 강제로 진행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좀 더 힘내보라고 누나."
어릴 적에 그토록 자신을 귀찮게 했던 에일린이었으나, 요 근래엔 나름대로 신부수업도 받으며 얌전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었기에 내심 응원을 해준 칼스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은 케인과 수잔이 식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받으며 공증인인 하이디아의 앞까지 나아가 두 사람의 결합을 맹세하는 것으로 끝났다. 지구의 결혼식보다는 간소한 의식이었으나 다들 진심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칼스가 준비한 음식과 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부부는 각 테이블을 돌며 축하의 인사를 받았고, 특히 새신랑은 결혼식 날 축하하러 온 이들의 술잔을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케인의 얼굴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칼스는 그런 케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다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과 술을 만끽하고 있는 제이콥을 발견하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제대로 맞이해드리지도 못했네요. 음식과 술이 모자라지는 않죠?"
"하하하 물론이지. 이거 결혼식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고, 제법 돈 좀 썼겠던걸? 그나저나 정말 멋진 연회장이더라 어제 하루 묵는데 최고였어. 이 내부 장식들 모두를 엘프들이 직접 해줬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네. 사실 이 건물은 귀족들을 초청해서 묵게 할 용도로 만든 곳이라서요. 가끔은 이런 식으로 큰 행사를 치를 때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요."
"흐흐. 그래서 엘레노아 아가씨를 부추겨서 영주님 가족분들을 초청하려고 했던 거군? 이 건물을 보여주려고 말이야. 안 그래도 이번 결혼식 때같이 오고 싶다고 하셨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쉬워하더군. 며칠 뒤에 마를르성에 돌아오신다니 말이야."
"가서 잘 좀 이야기해 주세요. 나름대로 준비해둔 비장의 무기들이 몇 개 있거든요."
"호~ 이곳만 하더라도 제법 멋진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더 있단 말이지? 걱정 말게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이곳의 음식과 술에 푹 빠진 이들이 제법 많아 보이니까."
그의 말마따나 제이콥과 함께 결혼식을 찾은 마를르성의 인사들은 갖은 향료로 간을 해 구워낸 고기들과, 치즈를 이용해 고소하게 구워낸 빵들을 먹으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칼스의 아버지 한센 역시 많은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는데 가끔씩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칼스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거나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엘레노아 아가씨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게 하나 더 생길 모양이야."
"뭐를요?"
"뭐긴. 어린 남편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제법 많아 보인다는 이야기지. 저기 저쪽에 있는 아가씨는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던데?"
"어휴. 말도 마세요. 아까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 바퀴 도는데 얼마나 들러붙던지. 정말 영주님의 딸과 약혼할 예정이라는 말을 안 했으면 큰일 날뻔했다고요."
칼스는 아까 노골적으로 자신의 팔을 끌어안으려 하던 이웃 마을 촌장의 딸을 생각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름 예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으나, 척 봐도 칼스와 동갑이거나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였기에 오히려 기겁을 하고 도망쳐온 칼스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거야. 그러니 잘 견뎌내 보라고. 읏차... 그럼 적당히 즐겼으니 돌아가 봐야겠군."
"벌써 가시게요?"
"지금 출발해야 해가 지기 전에 마를르성에 닿을 수 있을 거 같아. 아! 엘레노아 아가씨와 함께 이곳에 방문하게 될 인선이 확정되면 바로 연락하도록 하지."
실제로 제이콥 외에도 멀리서 방문한 손님들은 슬슬 자리를 털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이웃 마을의 손님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는 모습이었고,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요리도 따로 준비해 나누어 주었으니 마을에서도 지금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그날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이어진 연회는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고, 마를르남작령의 동부지역에 칼스가 새로 지은 [요정의 집]에 대한 소문과 허니 상단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