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요정의 집 전격 개장
기사 수행을 위해 집을 나서고 꼬박 반년 가량을 수련에 매진하고서야 마를르에 돌아온 엘레노아는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의 부분에서는 수도 리온의 외할아버지의 집보다 불편하지만 심리적으로는 훨씬 안정감을 주는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똑똑똑
"엘리 방에 있지?"
"응 언니. 들어와도 좋아!"
잠시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엘레노아는 친언니인 파비올라의 목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답했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게 차려입은 파비올라가 다가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아주었고, 엘레노아역시 그녀를 마주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집에 돌아왔으면 언니부터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니니?"
"이제 막 방 정리하고 쉬던 차였어. 숨 좀 돌리고 가려고 했는데 언니가 너무 빨리 온 거라고."
"그런가? 어머. 세상에 이 팔다리의 상처 좀 봐. 엘레노아 넌 네 몸을 좀 더 아껴줄 필요가 있어 보여."
"후후 언니도 참. 난 기사가 될 거라고, 몸에 상처하나 없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나저나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조카 소식은 없고?"
"이게. 나만 보면 놀려먹을 생각뿐이지?"
"놀리긴. 이제 슬슬 생길 때가 됐다 싶어서 물어본 거지. 혹시 뭐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지?"
"문제는 무슨. 이게 다 남편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라고. 요 몇 달간 그이가 집에서 함께 잔 게 손에 꼽을 정도라니까? 게다가 올 때마다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파비올라의 남편은 마를르남작 휘하에 있는 루그니 가문의 기사였다. 그는 올해 발생한 베르뉠 후작과 바렌튼 백작의 충돌로 인해 불안해진 북서쪽 방면의 요새로 전출되어 밀려드는 난민 중에 혹여나 범죄자가 섞여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난민들이 모여 도적 집단으로 변모하지는 않는지 등을 감시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긴. 왕도에서도 그 일 때문에 시끌시끌하더라."
"누가 이기든 상관없으니 빨리 좀 정리됐으면 하는 기분이야. 그 일 때문에 성에서는 딱히 재밌는 일도 없고, 삭막한 하루하루의 연속이라고."
한숨을 푹 내쉬던 파비올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여동생 앞에서 더 이상의 신세한탄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네 어린 예비 신랑이 요새 잘나가는 모양이던데?"
"그래? 편지에서는 딱히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오호라. 편지도 주고받으며 지낸 모양이야?"
"우리 사이에 서로 편지 정도는 주고받을 수도 있지. 근데 무슨 일이길래 그래?"
"며칠 전에 루엠상단의 제이콥이 그 마을에 다녀왔거든."
"아아. 칼스의 형인 케인의 결혼식 말하는 거지? 사실 날짜만 맞았다면 나도 가려고 했는데 아쉬웠지."
"응. 정말 멋진 저택 하나를 새로 지은 모양이야. 제이콥도 그렇고 같이 갔던 상인들이 다들 멋진 곳이었다면서 찬사를 하더라고, 듣기로는 그곳에서 픽시들이 사는 꽃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던데?"
파비올라의 말에 엘레노아는 그가 편지에 자신과 가족들을 초대하는 것이 바로 그 저택을 구경시켜 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 음... 언니! 우리 한번 놀러 가볼래?"
"어딜?"
"에올론 마을 말이야. 안 그래도 칼스가 나한테 가족들과 함께 놀러 오라고 편지에 적어놨거든."
"너 혼자 몰래 놀러 오라고 적어둔 게 아니고?"
"언니도 참. 칼스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야."
"열두 살치고는 덩치가 크던데? 그나저나 에올론 마을이라... 한번 가볼까?"
"뭐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놨다고 편지에 적혀있던데. 잘 생각해 봐 언니."
파비올라의 긍정적인 반응에 엘레노아는 본격적으로 에올론 마을로 함께 갈 인원들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놀랍게도 마를르남작가의 여인들 모두가 이에 응했는데, 다들 주변 귀족 간의 갈등 상황으로 인해 몇 달간 칩거 아닌 칩거 생활을 한데다 며칠 전부터 들려온 에올론 마을의 이야기에 호기심들 보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이 커져버려 당황한 엘레노아는 일단 칼스에게 연락해 모두 함께 방문해도 괜찮겠냐는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 * *
한편 성공적으로 형 케인의 결혼식을 마친 칼스는 요정의 집 내부에 들어갈 여러 가지 물품들을 채워 넣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를르성에서 엘레노아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고, 그 내용을 살피던 칼스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엘레노아가 제대로 한건 해줬네. 마를르가의 여인들이 모두 함께 방문한다 이거지? 그럼 수행원들까지 대동할 테니 이번에 제대로 요정의 집의 매력을 선보인다면 홍보효과는 끝내주겠군."
이왕이면 다른 지역의 귀족들도 같이 와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던 칼스였으나. 이내 너무 큰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하고 일단 마를르남작가의 여인들을 상대로 자신이 준비한 카드들을 선보이고, 과연 그것이 제대로 통할 것인지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일단 형님 부부의 말로는 정말 좋았다곤 하는데, 귀족들의 입맛은 또 다를 수가 있으니 말이야."
이미 요정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케인 부부가 며칠간 묵으며 그 감상평을 들었던 칼스였고, 그나마 이곳에서 귀족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제레미와 고든에게도 피드백을 받았으니 큰 문제만 터지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수행원들이 묵을 장소를 마련하는 건데... 세 남작부인이 모두 방문하는 거니까 병사들도 제법 따라붙을 테고, 기사들도 있겠지? 기사들은 요정의 집에 있는 사용인들 방을 적당히 배정해 주면 될 테고, 병사들이 문제인데... 일단 상단 건물의 빈방에 최대한 밀어 넣고 그래도 모자라면 마을의 집 몇 곳을 비워주는 수밖에 없겠네."
칼스는 혹시나 마을 사람들의 집을 비워서 빌려줘야 할 상황이 생길 때를 대비해 미리 아버지 한센과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러고는 엘레노아에게 출발 일자가 잡히는 대로 연락을 해달라고 답장을 보낸 후 대대적으로 마을 주변의 길을 정비해 최대한 깔끔한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엘레노아가 출발할 것이라 말한 날이 밝아왔고, 이른 아침부터 미리 요정의 집 내부의 침구류 등을 점검한 칼스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멀리 남작부인의 마차 행렬이 보인다는 밍슈펠트르의 말에 촌장인 아버지 한센과 함께 그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밖에 있는 요정의 집의 정문으로 향했다.
오늘 에올론 마을에 오는 이들은 마를르남작의 세 부인인 마가렛, 헨리에타, 캐롤린과 그들의 딸인 멜리사, 파비올라, 엘레노아. 그리고 엘레노아의 오라버니인 알베르의 부인 리니아까지 총 7명이 주빈급 인원이었다. 엘레노아의 편지에 적힌 바로는 마를르남작의 장자인 레오폴드의 부인 역시 함께하고 싶어 했으나 만삭의 몸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에 그녀는 마를르성에 남아있게 됐다고 했다.
일곱 명의 남작가의 여인들을 수발할 사용인들도 근 스무 명가량이 함께했고, 그녀들을 수행하는 기사만 셋에 병사도 서른 명이나 동원되었다. 십여 대의 마차가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몰려나왔고, 어린아이들 몇몇은 어른들의 어깨 위에 올라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 히히히힝!
"나는 마를르남작가의 검인 랜돌프 가리엔이다. 이곳이 남작부인과 그 일행분들이 묵을 장소인가?"
"네. 이 저택이 바로 요정의 집이라 이름 붙인 저택입니다."
"잠시 위험한 요소가 있는지 확인을 좀 하도록 하겠으니 협조 바란다."
가장 선두에서 마를르남작가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던 기사가 멈춰 서고, 그 뒤로 수많은 마차들이 줄줄이 멈췄다. 기사는 병사들을 부려 혹여나 마을 사람들 사이에 무장을 한 채 숨어있는 이들이 있는지 살피게 했고, 잠시간의 검문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가장 선두에 있던 마차의 문 앞으로 다가가 안쪽에 기별을 넣었다.
"남작부인. 이제 내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언제 내렸는지 몇몇 하녀들이 마차의 문 앞에 작은 발판을 가져다 두자 곧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아름답게 치장한 남작가의 세 부인이 차례로 내렸고, 그 뒤에 서있던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이들까지 모두 내리자 마부들은 잭의 인도하에 저택 앞에 마련되어 있는 마차를 세워둘 수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칼스는 아버지 한센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첫째 부인 마가렛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궁벽한 마을까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올론마을의 촌장인 한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실례는 아닐까 모르겠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이제부터는 제 아들 녀석이 여러분들을 모시게 될 겁니다. 칼스. 혹시라도 모자란 것이 있다면 곧장 말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병사분들은 여기 제 아버지를 따라가시면 쉴 곳을 안내해 줄 겁니다. 사용인분들은 저기 있는 저희 직원의 말을 들어주시고 손님 여러분은 저를 따라 들어오세요."
칼스는 캐롤린부인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엘레노아에게 가벼운 목례를 해주곤, 그들을 이끌고 요정의 집 내부로 향했다.
* * *
마가렛은 사실 에올론마을까지 오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는 친자매나 다름없어진 헨리에타와 캐롤린이 함께가자고 하여 이번 여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본디 아르투르 백작가의 영애였던 그녀는 마를르 남작과의 결혼이후 몇차례 남편을 따라 영지순방을 하곤했지만, 에올론 마을처럼 궁벽한 마을까지 가본적은 없었기에 사실 큰 기대를 하진 않고있었다.
"그러니까요. 요새 남작님이..."
"바렌튼 백작가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이른 아침부터 출발준비를 하느라 약간 피곤했기에 편안히 기대앉아 눈을 감은채 마차에 함께 타고있는 시종들의 재잘거림을 듣고있던 마가렛은 마차가 멈추는 느낌이 들자 감고있던 눈을떳고, 밖에서 그녀의 호위기사인 가리엔경이 주변정리를 하는소리를 들었다.
- 똑똑똑
"남작부인. 이제 내리셔도 될것같습니다."
"알았어요. 고생이 많네요 가리엔경."
오전내내 마차에 앉아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온 그녀는 상쾌한 숲내음과 그사이에 섞여있는 은은한 꽃내음에 내심 오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앞에 서있는 칼스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흠. 한창 클 나이이긴하지만 반년사이에 훌쩍 더 자란느낌이네. 예전에 봤을때도 나이에 비해 훤칠해 보였는데.'
마차에서 내리자 칼스의 아버지이자 이곳의 촌장이라는 이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준 후, 칼스의 뒤를 따라 요즘 성내에 소문이 자자한 저택의 안뜰로 들어서며 과연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확인해보리라 마음먹은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