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요정의 집 전격 개장
엘레노아의 방을 나선 칼스가 다음으로 들른 방은 오늘 방문한 손님들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마가렛이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그녀의 방앞에는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칼스는 그런 그들에게 다가가 안쪽에 기별을 해달라 부탁했다. 병사 중 한 명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곧 누군가가 안에서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마가렛의 호위 기사인 랜돌프 가리엔이었다.
"무슨 일이지?"
"허니 상단의 칼스님이 남작부인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흠. 잠시만 기다려보게."
그렇게 말한 랜돌프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문이 열리며 칼스를 방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마가렛이 머물고 있는 방은 요정의 집의 가장 끝 쪽에 위치한 방으로 다른 방보다 객실의 크기도 크고, 발코니 역시 더 넓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곳엔 마가렛뿐 아니라 나머지 두 부인도 함께 모여있었는데, 그녀들 역시 발코니의 티 테이블에 모여앉아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후후. 어서 오렴."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보다는 네가 더 즐거운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캐롤린이 당장에라도 엘레노아가 있는 방에 쳐들어가려는 걸 붙들어 놓느라 힘들었단다."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그래요?"
"아까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니까 혼자 조용히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건 나도 알겠던걸."
마가렛과 헨리에타 두 부인이 캐롤린을 보며 놀려댔고, 캐롤린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칼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 멀리 보이는 픽시들의 꽃밭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각 객실의 발코니는 작은 벽으로 나뉘어있었으나 그 안에서 나는 소리는 옆방까지 충분히 들릴 수 있다는 걸 잠시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칼스였고, 여전히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마가렛부인에게 고개 숙이며 답했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딱히 책잡힐 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어머.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아쉬운걸."
"언니!"
"호호. 더 이상 놀렸다간 진짜로 토라져버리겠네. 뭐 아무튼 여러모로 놀라운 저택인 거 같구나. 요정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위기에 가구들도 그렇고, 뭐 가장 멋진 것은 바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저 풍경들일 테지만."
"앗! 언니! 픽시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계속해서 꽃밭을 주시하고 있던 헨리에타가 저택을 향해 날아오는 픽시를 발견하곤 마치 소녀처럼 꺅꺅거리며 옆에 있는 캐롤린을 손으로 치며 즐거워했다. 캐롤린 역시 건물 외벽에 자라있는 꽃들을 살피는 픽시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역시 귀여운 것은 여자들에게 직방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적용되는듯했다.
"근데 저 픽시들은 어떻게 여기에 자리 잡게 된 거지?"
"아. 그건..."
칼스는 세 남작부인에게 작년 겨울에 아르덴 대삼림 깊은 곳에서 발생한 화재와 그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한편 엘레노아가 머물고 있는 방에도 손님들이 찾아들었는데, 그녀들은 바로 엘레노아의 언니들이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엘레노아를 향해 다가오는 파비올라의 입에는 고양이 같은 미소가 배어있었다.
"흐흥! 우리 귀여운 막내는 이 방에서 어린 남자아이와 무슨 짓을 했을까나~"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발코니에서 너희 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다 들리던걸? 내심 좀 더 진한 분위기로 넘어가길 기대했는데 아쉬워라. 아직은 어린아이라 그런가? 그러니 엘리 네가 좀 더 강하게 나갔어야지."
"언니는 칼스와 제가 이어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요?"
"뭐. 그땐 그랬지. 그런데 지금 와보니 제법 괜찮아 보이는 게 사실인걸? 이런 멋진 저택을 가지고 있는 데다 돈도 잘 벌고 있는 것 같고 말이야. 누구처럼 맨날 일터지면 밖에 나가서 사람 애타게 하지는 않을 거 아냐."
"맞아. 그건 좀 부럽긴 하네."
공교롭게도 엘레노아의 언니 멜리사와 파비올라는 기사를 남편으로 두고 있었고, 그녀의 친오빠인 알베르 마를르역시 일찌감치 기사서임을 받은 존재이기에 그의 아내인 리니아도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마를르남작가의 뿌리가 리온 왕가에 충성하던 근위 기사들을 배출하던 가문이었기에 자연적으로 기사 친화적인 가풍이 만들어져 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칼스는 아직 어리다고요."
"그 덩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여기 리니아보다 더 클 거 같던데."
"언니들이 지금 괜히 널 놀리려고 이러는 거 같아? 지금 주도권을 꽉 잡아놔야 결혼하고 나서 고생 안 한다니까?"
"으음... 놀리려는 거 아니었어요?"
"뭐. 놀리려는 의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마치 인형처럼 여기며 웃음을 터트리는 언니들의 모습을 보던 그녀는 사실 칼스가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저번 만남의 마지막엔 그토록 진한 입맞춤을 해오지 않았었던가. 그날 이후 잠자리에 들 때면 수시로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당혹해 하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엘레노아였다.
"으읏! 아무튼 칼스가 조금 있다가 픽시들이 가꿔둔 꽃밭 근처로 내려갈 거라고 하던데. 다들 갈 거죠?"
"정말? 가까이 가도 괜찮대?"
"어떤 책에서 보면 픽시들이 사람을 홀리기도 한다던데."
"네. 이 마을의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픽시들과 어울려 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건 픽시가 아니라 그렘린들이라구요."
그 후로도 엘레노아와 자매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그 대화의 중심에는 역시 칼스에 대한 주제가 존재했다. 한 시간 여가 흘렀을 때쯤 칼스가 그녀들을 모두 불러 모으더니 픽시들의 꽃밭을 향해 나아갔다.
요정의 집에서 불과 수십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금세 꽃밭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그녀들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하게 배어 나오는 꽃향기에 얼굴을 상기시켰고, 픽시들 역시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녀의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처음 보는 인간들이야!]
"병사들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도록!"
[꺅! 우리를 잡으러 온 거 아냐?]
"이런. 우리들 때문에 겁을 먹은 건가 보구나."
"뭐. 병사들로서는 자신들의 일을 했을 뿐인걸요.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픽시들은 갑자기 꽃밭 주변을 둘러싸는 병사들의 모습에 겁먹은 모습을 보이더니 꽃밭의 중심으로 도망쳐버렸고, 마가렛은 그런 픽시들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그들의 대표격인 홀라홀라가 다급히 칼스를 향해 날아왔다.
[칼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이들이 모두 놀라서 떨고있다구.]
"미안해요 홀라홀라. 손님들이 왔는데 그 손님들을 지키는 병사분들이 함께 오는 바람에 놀라게 했나 봐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거지?]
"네. 저들이 여러분들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어요. 오히려 친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그래? 알았어 그럼 애들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그렇게 홀라홀라가 되돌아가더니 금세 다시 꽃밭에는 수많은 픽시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들의 표정도 풀어졌는데 오직 가리엔만이 혹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는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꺅! 방금 얘가 내 머리를 만졌어."
[헤헤헤. 우리랑 친해지고 싶었다면서?]
[안녕? 그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이거? 사실 맛있는 쿠키를 좀 가지고 왔는데 같이 나눠 먹을까?"
[좋아!]
칼스의 호언장담 덕분인지 더 이상 경계심을 내비치지 않는 픽시들 덕분에 금세 그들과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녀들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마를르가의 여인들은 요정의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어울리던 픽시들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아. 정말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어."
"그러게요 언니. 어릴 적 동화 속 세계를 직접 겪은 기분이랄까요?"
"마음 같아선 픽시 하나를 성으로 데려가고 싶은데. 안되겠죠?"
"그랬다간 네 예비 매제한테 한소리 들을 수도 있을걸?"
칼스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픽시들을 활용한 관광전략이 충분히 먹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에 지금 즐겼던 픽시들과의 만남 같은 경험들을 이곳에서만 겪을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을 주고 놀려오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으음... 픽시들의 만남 자체를 상품화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상단 관련 일을 하고 있는 둘째 부인 헨리에타가 칼스의 질문에 가장 빠르게 반응했고, 칼스는 그런 그녀에게 조금 더 부연 설명을 덧붙여 질문했다.
"정확히는 지금 묵고 계신 요정의 집의 숙박권을 판매하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픽시들과의 접촉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려고요."
"음.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데, 꼭 저 집에 묵어야만 꽃밭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만약 그냥 저 꽃밭에만 목적을 가지고 오는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 될 텐데."
"부인께서도 직접 와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마를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거진 반나절이 걸립니다. 제대로 된 픽시들과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이곳에서 묵어야 한다는 말이죠. 저는 그런 것들을 무기 삼아 이 마을 주변을 하나의 관광지로 만들어볼까 합니다."
관광지라는 개념이 제대로 서있지 않은 시대였으나 이곳에도 휴양을 위해 방문하는 도시나 영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칼스가 하는 말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픽시 하나만 보자고 이곳까지 와서 숙박을 하기엔 조금 모자란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픽시들의 모습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 하나 보자고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 마를르성에 사는 이들이야 호기심에 찾을 수 있겠다만..."
"그래서는 결국 손님이 금방 고갈되어 버리겠죠. 픽시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을 추가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에서만 먹고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나 술, 혹은 엘프나 드라이어드들의 음식과 음악 같은 것들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이곳에서 판매하는 거고?"
"네. 역시 상단 일을 하시는 분이니 금방 알아채시는군요."
"음... 그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 물론 지금처럼 이런 자택 하나 달랑지어놓고 부른다면 깨나 곤욕을 치르겠지만."
헨리에타의 말에 다른 부인과 딸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녀들이 생각해도 아직까지 이곳을 멀리에서 찾아올 만큼의 매력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칼스 역시 아직 보여주지 않은 카드도 있는 데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이곳 에올론 마을에서 즐길만한 것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좀 성급하다고 생각했기에 일단은 가능성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