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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82화 (82/432)

82화 - 제17장. 역전(逆轉)의 칼 (1)

둥! 둥! 둥! 둥!

포양진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북소리는 적군의 등장을 경계하라 알리고 있었다.

이미 군장을 갖춘 장수들은 병사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예견하지 않았던 정찰병의 적군 출병 보고 때문에 심장이 콩닥콩닥 뛸 정도로 내심 떨고 있었다.

“젠장, 아직 봄이 오려면 한두 달 더 남았다고!”

심규봉(心圭峰)이 짜증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 몸이 달달 떨리는 게 두려움이 아니라 추위 때문이라고 애써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심 부장!”

자신을 부르는 소리야 심규봉이 뒤를 돌아보았다.

휘황찬란한 은갑을 입은 대장군 남양이 그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휘날리는 붉은 망토 뒤로 부장들이 군장을 갖추고 입으로 하얀 입김을 토해 내며 남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심규봉은 서둘러 뛰어가 예를 갖추었다.

“대장군.”

“병사들 집결은?”

“거의 끝나갑니다.”

“조장들에게 맡기고 막사로 와라. 전열 지시를 하겠다.”

“예!”

남양은 부장들을 이끌고 우로 틀어 지휘부 막사로 들어갔다. 중앙의 지형도(地形圖)가 펼쳐진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설 무렵 심규봉도 막사 안에 들어와 합류했다.

“정찰병의 보고 내용부터 정리하지.”

남양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오른쪽에 있던 군사(君師) 마량(馬亮)이 정찰병이 보내 준 서신을 펼쳤다.

“일단 야율재와 그의 친위대인 흑풍대(黑風隊)가 잠시 후방으로 물러나 있다는 정보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타타르 부족에서 정체되었던 물자와 군마 보급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이쪽으로 이동 중인 병력의 편제는 보병 1만과 궁병 5천, 기마 1만으로 도합 2만 5천 군세라고 합니다.”

“총사령관이 없어도 자신 있다. 이건가?”

남양의 수족인 공손숙(公孫肅)이 투덜거렸다.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작년 장성 밖으로 넘어온 뒤로는 기가 많이 죽어있었다.

남양은 공손숙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이미 부하들에 대한 신뢰가 많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10만의 대군세로 장성을 공격하던 몽골족들을 몰아내는 일은 성공했지만, 북쪽으로 군세를 전진시키면서 험준한 산세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평원으로 접어들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몽골군의 기마술은 중원의 그것과 비교하면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고삐를 놓고도 말 위에서 화살을 자유자재로 쏘았으며 군마의 지구력에서도 차원이 달라서 기병대로 쫓았다가 되려 병력만 잃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초기에 거둔 대승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 독이 되면서 일진일퇴를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피해만 누적되어 겨울을 맞이할 때쯤엔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북쪽에 추위가 중원보다 빨리 찾아오면서 큰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병력은 이보다 더 줄어들었을지도 몰랐다.

2월의 현재 날씨도 여전히 추웠지만, 한동안 눈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몇 달간 혹한기를 보내면서 군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한두 달 정도는 적들도 발이 묶여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병 첩보를 받은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심하고만 것이다.

“기마 1만이라, 군마가 보충되긴 했나 봅니다. 원래는 5천 수준이었는데.”

“우리 기병은 얼마나 운용 가능합니까?”

“3천 기입니다.”

“턱없이 부족하군.”

부장들의 얘기를 듣던 남양이 탁자 한쪽에 모아 놓은 장기 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일단 창병으로 4천 명씩 다섯 부대로 편성하여 양 언덕 사이를 막는다. 우측 언덕은 경사가 높고 숲이 좀 있으니 보병 2천 5백과 궁병 3천을 별도로 배치하여 평지의 활동을 견제한다. 나머지 궁병 1만 5천 역시 오천인대로 나누어 2만 보병 뒤에 배치한다. 각 편제 담당 장수들이 지휘하도록. 심규봉 자네는 2천 5백 명 보병을 이끌고 좌측 언덕에 올라가서 적군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면 병사들을 시켜 먼지를 계속 일으키도록 해라.”

“허장성세(虛張聲勢) 계책입니까?”

“우리가 원군을 요청한 건 놈들도 알고 있을 테니 그 부분을 이용해야지. 난전으로 이어진 상황에서 황기(黃旗)로 신호를 보내면 내려와 포위해라. 그전까지는 우리에게 군세가 더 있다고 속여서 기세를 흔들 필요가 있어.”

“기병 3천은 어떻게 할까요?”

“2천은 공손숙 장군이 맡아 좌측후방에서 대기하였다가 적들의 돌진이 장창병대에 닿으면 뒤로 돌아 그 후방을 치시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마량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만약 놈들이 견제 위주로 돌아선다면 어찌할까요? 놈들은 보병이나 기병이나 모두 활을 갖고 있을 테니 전면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는 견제가 심할 것입니다. 수천이 죽고 나서야 돌진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진지를 지키는 게 저희의 목표이니 창병들은 혹한기 동안 제작한 방패까지 장비해야 합니다.”

“군사께서 말씀하실 줄 알고 이미 지시해 두었습니다.”

“잘했소.”

마량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심규봉을 보았다.

심규봉은 본래 병사들 가운데서도 고참 병사로 벌써 나이 50세였다. 그는 자신들을 이끌던 상관이 죽은 상황에서 지휘력을 발휘하여 전멸을 면하고 퇴각로를 방어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수로 승진된 인사였다. 꼼꼼한 성격이 시기적절하게 발휘되는 것을 보면 대장군에게 천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남양도 심규봉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팽 부장에게 기병 천 명을 줄 테니 천호대(天虎隊)와 함께 통솔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팽무양(彭武煬)은 하북팽가의 가주로서 황명에 호응한 창천맹이 500명의 무림인으로 편성한 파견단의 수장이었다.

원래 남양은 이들을 각 군에 대충 배치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림인들이 창천맹이나 문파 안에서 저들만의 규율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엄정한 군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보니 불협화음이 심하게 일어났었다.

남양은 팽무양에게 장수 직을 주고 이들을 다시 별도 편제 하에 두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천호대였다. 이들은 보병대로도, 기병대로도 활약이 뛰어났다. 야율재의 흑풍대가 숫자도 많고 기강도 잘 잡혀 있어서 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별동대의 역할 수행은 충분하여 야율재의 골칫거리 역할을 잘 해 주고 있었다.

“아, 계속 날아다닐 수는 없으니 노획한 몽골의 군마들을 주겠소.”

“감사합니다.”

“하하하!”

남양의 농담에 제장들 사이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다소간 높았던 긴장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천호대의 개개인 활약은 확실히 뛰어났는데 그마저도 현재는 400명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얕잡아 봤던 무림인들이 이제는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참. 창천맹에 증원은 요청하셨소?”

“전서를 받긴 했는데 중원 상황이 만만치 않아 편성이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늘 이맘때쯤부터 인원을 편성하여 보낼 것이라고 하였으니 한 달 정도면 도착할 것입니다.”

“아쉽군. 지금 딱 와 주면 좋았을 텐데. 천 맹주는 얼마나 보내 준다고 하셨소?”

“역시 500명으로 생각됩니다.”

“서쪽 전선에 더 많은 인원이 파견된다지?”

“아무래도 마교의 주력이 그쪽에 있다 보니.”

“알겠소. 마 군사, 조태상의 2군은 어디쯤이라던가?”

“이틀 전 보고로 미루어 볼 때, 예상으론 포양진에 도착하기까지 사흘 거리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행군을 서둘러 달라는 내용을 가지고 병사들을 출발시켰습니다.”

“너무 멀군.”

“흑풍대가 없다고 하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야율신(耶律迅)이 지휘하고 있지 않나?”

야율신은 야율재의 사촌 동생이자 흑풍대 일원으로 알려진 자였다. 종종 흑풍대가 아닌 별도의 기마대를 이끌고 남양의 군대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그 무공이나 지휘력이 매우 뛰어난 장수로 인지하고 있었다.

보통의 몽골 기병도 뛰어난데 야율신의 지휘를 받는 기병대의 돌파력은 흑풍대 못지않아서 적장 가운데서도 주의할 인물이었다.

남양이 수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팽 부장이 그놈을 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으흠!”

팽무양은 이미 야율신과 한 차례 겨뤄 본 바 있지만, 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전장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예측하면서 계획을 좀 더 다듬는 내용이 오고 갔다. 이윽고 병사들의 집결이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대장군 남양은 출병을 지시했다.

야율신의 몽골군이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약 한 시진 가량 시간이 남아 있었다.

* * * *

“정말 오랜만이구나!”

커다란 대문 위 현판에 쓰여 있는 ‘천무방’이라는 글귀를 올려다보며 주유현이 잠깐 추억에 잠겼다.

하나뿐인 혈육이자 누이였던 주약화가 천무경의 곁에서 중병으로 끝내 세상을 뜬 이후엔 줄곧 사패련에 있었다. 그리고 사패련 해체 이후, 창천맹이 창설된 이후에도 천무경 곁에 남아서 그의 일을 돕고 있던 그였다.

“오, 과연 천무방 명성만큼 웅장하군요!”

주유현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도사가 탄성을 자아냈다. 주유현은 고개를 돌려 도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아주 맑고 깊은 눈을 가진 도사였다. 옷자락의 가장자리만 남색의 밋밋한 배색을 가진 백의에 아래는 남색 하의로 단정하게 갖춘 도복과 검은 도관을 머리에 쓴 차림이 그저 평범한 도사로 보였으나 그 신분은 무당파의 진산제자였다.

“들어갑시다.”

때마침 수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고 있었기에 주유현은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주 공자!”

때마침 외원을 가로질러 마중 나오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총관 서일헌이었다. 그는 단숨에 달려와 주유현을 와락 껴안았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창천맹 창설 이후엔 통 올 기회가 없었으니 벌써 4, 5년 된 것 같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잘 오셨소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악수한 손을 연신 흔들면서 미소로 마주 보았다. 주약화, 주유현 남매는 과거 꽤 험악했던 천무방의 분위기 속에서 서일헌과 함께 긴장을 풀어주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기에 관계가 매우 가까웠다.

서일헌은 주유현의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복식도 제각각인 데다가 기세가 만만치 않은 무림인들이었는데 들어오는 것을 물러서서 지켜보니 그 숫자만 500명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사흘 정도 정비하고 북부로 가신다지요?”

“그렇습니다. 창천맹에서 빠르게 올라왔기에 말들도 쉴 필요가 있고 저희도 전쟁은 처음이니 필요한 준비를 해야지요.”

“맹주께서 미리 연락을 주셨습니다. 필요한 건량과 숙영 물자 등을 준비해 두었으니 점검 후에 가져가시면 됩니다. 다행히 저희도 확장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구역들이 있어서 신축한 숙소에서 여독을 푸시면 됩니다.”

주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일헌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우리를 이끌어 줄 대장은 준비되셨습니까?”

서일헌은 능히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후후! 반 시진 전에 목욕 재개하러 들어갔으니 지금쯤이면 쉬고 있을 것입니다. 대청에서 방주대행과 얘기 나누고 계시면 숙부께 인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뵐 수 있을까요?”

무당파 도사가 쭈뼛 뺨을 긁적이며 물어보자 서일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 혹시 이분이…….”

“아! 실례했습니다. 소도 청명(淸明)이라고 합니다.”

“무당파의 검선이라는 소요자의 제자시지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광혈종과 구룡문의 전투에 개입하여 광혈종을 물리친 무당파의 검선 소요자의 명성은 이미 강호에 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호사가들은 천하오절을 다시 논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들도 있었지만, 소요자가 겸손으로써 뜬소문에 대응하면서 그런 논지는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가 정파를 대표할만한 절대고수라는 점에서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화산파가 화산의 그림자 아래나 천하 각지에 흩어져 그 명맥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무당파는 말 그대로 일찍 봉문을 하고 강호와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추구한 결과가 바로 소요자였으며 은밀하게 어린 제자들을 모집하여 꾸준히 육성해온 결과가 청명이었다.

청명은 무당파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광혈종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한 바가 있던 그는 이번 전란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구제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참전하라는 스승 소요자의 지시로 인하여 하산한 상황이었다.

“저희도 보러 가면 안 되오?”

무리 중 누군가가 외치자 주유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분간은 계속 볼 텐데 성급하게 굴지 말고 여독이나 푸시게들.”

“쩝, 알겠수다.”

“비무제 때 못 봤나 보지?”

“광동(廣東) 사람이 거기까지 언제 가냐?”

투닥거리는 소리에 담긴 그들의 심중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에 주유현은 웃으며 돌아섰다.

“전 이들을 안내할 테니 두 분은 천무전 대청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서일헌은 두 사람을 보내 주며 500명 무리 앞으로 걸어갔다.

주유현과 청명은 곧장 내전으로 들어갔다.

서쪽 장로전은 적멸당이란 이름으로 현판을 바꿔 달고 연무장과 숙소를 건설하는 확장공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그 안에선 종종 비명이 들리곤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청명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즘 수련에 한창이라더니…… 소리가 끔찍하군요.”

“정파 무학은 내유외강(內柔外剛), 내강외유(內剛外柔)를 많이 논한다고 들었소만, 다른 사파 문파들은 모르겠으나 천무방은 외강내강(外剛內剛)을 추구하오. 부드러움 또한 내외로 강건해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소.”

“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내전을 가로질러 전면의 거대한 천무전을 바로 보며 걸어갔다. 비교적 주변이 한산했는데 사람이 없는 이유는 하인들 대부분이 적멸당과 황검당의 수련을 위한 수발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준은 대청의 상석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오는 주유현을 알아보고 일어나 반겼다.

“이런! 주 공자, 어서 오시오.”

“방주대행을 뵙습니다.”

“방주대행을 뵙습니다.”

주유현과 청명이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천준은 멋쩍게 웃으면서 두 사람의 숙인 허리를 바로 세워 주었다.

“대행 따위에게 그런 예의까진 차릴 필요 없소이다. 이쪽이 무당파의 청명 도사?”

“청명입니다.”

“반갑소. 마침 차를 따뜻하게 달여서 준비해 놓았으니 두 사람 모두 차 한잔하면서 얘기합시다.”

“고맙습니다.”

천준은 두 사람을 탁자의 오른쪽 자리들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잠시 앞으로 밀어두었던 차대를 당겨서 미리 준비해 둔 다기(茶器)에 차를 따라 차례대로 두 사람 앞에 가볍게 밀었다.

물 흐르듯 찻잔은 탁자 위를 미끄러져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찻물의 흔들림은 가벼운 파문(波紋)으로만 지나갈 뿐이었다.

“천 대행 무공이 대단하십니다.”

“큭큭! 요새 수련보다는 붓을 들 일이 많다 보니 이런 식으로 노는 게 취미가 되었소. 처음엔 찻물이 넘쳤는데 요새는 꽤 성공률이 높다오. 이게 얼마나 미세한 공력 조절이 필요한지 아시오?”

“하하하, 창천맹에 있는 맹주님도 요새 비슷한 처지이십니다. 얼마 전에 검림에 다녀온다고 떠나셨는데, 그때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이던 게 천 대행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천준과 주유현은 그동안 못다 했던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주유현 남매는 천무경이 천무방의 보배처럼 아꼈기 때문에 활동적이었던 천준도 서일헌 못지않게 그와 가까웠었다. 이는 주유현이 기본적으로 천무방에 대해 큰 존중을 보여 주었기에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스스럼이 없었다.

반면 청명은 조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가 무엇인지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얘기에 그가 끼어들 여지는 당연히 조금도 없었기에 그저 주유현 옆에서 멋쩍게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북쪽에 군수물자를 올려 보내 주던 하오문이 운영하는 표국의 표사가 와서 소식을 하나 준 게 있는데, 혹시 남양 대장군과 합류하면 한 번 알아보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얼마 전에 황실에서 5만 명의 군세를 편성해서 몽골과의 전장으로 출병시켰소. 그런데 그 무리 중에 화산파의 영은성과 개방의 소개 최현걸을 보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왜…… 창천맹과 따로 움직인 것인지?”

“쓰읍……, 정보를 알려 준 표사가 확신하고 얘기해 준 것은 아닌데 말이오. 두 사람 가까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자의 인상착의 설명이 아무래도…… 진도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니.”

“진도건? 그 진도건 말입니까?”

그때였다.

쾅!

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대청에 불쑥 들어왔다.

아직 반쯤 젖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어온 여인이었는데 특별히 분을 바르거나 입술에 연지를 찍지 않았음에도 그 미모가 실로 아름다워서 청명은 앉아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은 이내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일찍이 만나보고 싶었던 사패소룡비무제의 우승자였다.

“누가 살아 있다고요?”

청아한 목소리 속에서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다소 힘이 들어가 외치듯 물어보는 천서은의 얼굴엔 말로는 어찌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복잡한 심경과 그리움이 한데 뒤섞여서 흔들리는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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