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1화 (1/110)

01화<쭈니>

“내 이름은 도영 드페르.”

치직, 치지직. 낡고 녹슨 녹음기에서 거슬리는 기계음이 났다.

녹음기는 이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기종이어서 작동시키기까지 꽤 애를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거라도 감지덕지였기 때문에 도영은 불평하지 않았다.

“MCTC TF-퍼시픽 1팀 소속, 계급 공용코드 OF-0, 콜사인 이글 일곱. 국적 프랑스. 현재 시각 5월 12일, 추정 시간 19시.”

언어를 바꿔가며 똑같은 내용을 세 번째 녹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녹음이 누군가에게 전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위치, 불명.”

치이익…. 녹음기에서 기계음이 길게 이어졌다.

쓸모없는 노력이겠지만 기계음이 좀 잦아들도록 녹음기를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난 아직 살아있다.”

주변은 어두웠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리고, 문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 가운데 검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림자가 도영을 덮치듯이 길게 늘어졌다.

도영은 녹음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난 붙잡혀있다.”

저 야수에게-

***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도영을 보았다. 크고 또렷해서, 바위 아래 어둑한 공간에서도 잘 닦아놓은 유리가 햇빛에 반사되듯이 윤기를 발했다.

여자는 도영을 더 바위에 밀어붙이며 그의 한 팔과 다른 쪽 팔뚝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맨 등에 닿는 바위가 이끼로 미끈거렸다.

콰아아아….

그들이 뚫고 지나온 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사방에 부딪쳐 하얗게 몸을 부서뜨렸다.

서로 쳐다보고 있는 짧은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영은 자신이 어쩌다 이 상황에 놓이게 됐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30시간 전.

“소령님.”

부르는 소리에 도영은 읽고 있는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서 있는 한 중사가 고갯짓했다.

“곧 도착합니다.”

난기류에 비행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전투복을 입은 대원들은 저마다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누군가는 도영처럼 책을 보거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한 대원은 등산용 물주머니 같은 투명 주머니에서 사과 주스 같은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한 중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입은 군용 조끼의 겨드랑이에 엄지손가락을 건 채로 물었다.

“맥코이 하사, 곧 랜딩인데 배부르지 않아?”

“이게 좋은 점은 아무리 먹어도 과식한 거 같지 않다는 점이거든요.”

맥코이 하사는 대답하며 이쪽을 보았다. 아직 눈동자가 붉어지기엔 어려서 인간일 때와 같은 푸른 눈동자가 꼭 불어난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순간 힘이 나게 해주죠.”

한 중사는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그런 거 좀 있었으면 좋겠다.”

“스테로이드 있잖아.”

다른 대원이 말하자 한 중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 설 수도 있잖아. 내 주니어는 소중하거든.”

곧 작전에 들어가는 특수부대 팀이라고는 보기 힘든 한가한 투였다.

도영은 책을 상의 포켓에 넣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 중사 옆으로 가서 특수 소재 장갑을 꺼내 끼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바다를 지나 슬슬 육지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현재 인간과 뱀파이어는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찮은 사건을 계기로 뱀파이어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인류는 강한 육체 능력을 지닌 그들이 인류의 군대에 복무한다는 걸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인간 대원과 뱀파이어 대원이 함께 일하는 다국 대테러부대 연합, 즉 ‘MCTC(Multilateral Counter-Terror Coalition)’가 결성되었다.

바로 도영의 팀이 속한 곳이었다.

“줘봐 봐.”

그때 한 중사가 뱀파이어, 즉 요즘 이름으로는 ‘루아스’라고 불리는 맥코이 하사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루아스들이 늘 피 대신 마시는 그거 무슨 맛인지 궁금했는데 한 번 마셔보자.”

한 중사는 심심한 탓인지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졌다.

사실 작전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미 작전 계획은 모두 자다가도 읊을 정도로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고 괜히 작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봤자 긴장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주의를 좀 환기시키는 편이 나았다.

한 중사는 맥코이 하사에게 건네받아 한 모금 마시더니 불에 덴 듯이 입을 떼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맛없죠?”

맥코이 하사는 짐짓 웃었다. 한 중사는 손을 저었다.

“반쯤 남은 상태로 얼음이 다 녹아서 식은 모히토에다가 사카린을 섞은 거 같은 맛이야.”

맥코이 하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러더니 씩 웃고는 이랬다.

“인간은 생고기의 맛을 모르는 법이죠.”

“생고기 맛은 그쪽도 모르거든?”

한 중사는 지지 않았다.

“비유 모르십니까, 비유?”

그 대화를 들으며 도영은 헬멧을 썼다. 그리고 귀 뒤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NVG(야간투시경) 기능이 포함된 오토바이 헬멧 앞 유리 같은 렌즈가 내려왔다.

“자, 갑시다. 밥값 할 시간입니다.”

***

멀리 초록색으로 보이는 NVG 시야에 캠프 경비병들이 확인됐다.

정면에 둘, 측면에 하나였다. 어지간한 정규군 못지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 경비병들은 무료해 보였다.

도영은 수신호를 보냈다. 어둠 속에서 팀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뭐…!”

경비병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인근에 루아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들은 신속하게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는 얼마 전에 다급하게 짐을 싸서 떠난 모양새였다. 버려진 물건들이 몇 있었지만 특별히 증거가 될만하지 않은 쓰레기들뿐이었다.

그런데 책상 한편에 쓸어 담다 남은 흰 가루 같은 게 퍼져있었다.

도영은 가루를 찍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분쇄되어있었지만 꼭 크리스털 같은 결정이 메스암페타민, 즉 필로폰 같아 보이는 가루였다.

한 중사도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아이스(메스암페타민을 지칭하는 은어) 입니까?”

도영은 장갑에 묻은 가루를 털어냈다.

“아닙니다.”

한 중사는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니에요?”

“정확한 건 가져가서 검사해봐야겠지만 마약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도영이 지나가고 나자 한 중사가 가루를 찍어 살짝 맛보았다.

“그러게요. 이게 뭐지?”

신종 마약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통하지도 않는 걸 만들진 않을 것이다.

루아스에게는 인간들이 쓰는 마약류가 듣지 않기 때문에 루아스에게 마약의 쓸모라고는 인간에게 판매하는 용도뿐이었다. 하지만 인간보다 더 신을 닮은 육체로 다시 태어나서 겨우 하는 짓이 마약 딜러라면 그 루아스도 영 포부가 부족했다.

물론 인간일 때처럼 쉽게 돈을 벌려는 양아치들도 있었지만 이런 장소까지 갖춰놓고 조직적으로 마약 판매 서클을 운영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때 팀에서 유일한 루아스인 맥코이 하사가 방으로 들어오자 한 중사가 불렀다.

“아홉, 이것 좀 맛봐.”

맥코이 하사가 가루를 찍어 혀끝으로 맛보았다. 다들 무슨 반응이 나오려나 싶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맥코이 하사는 표정이 묘해지는가 싶더니 침을 퉤 뱉었다.

“이상한 맛이군요.”

확실히 마약은 아닌 모양이었다.

“더 둘러보죠.”

도영이 손짓하고 팀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삭.

군용 워커에 자잘한 잔해들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순간 도영이 흠칫하고 외쳤다.

“여덟!”

하지만 한 중사는 아직 무슨 일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도영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몸으로 한 중사를 밀치는 순간이었다.

쾅.

한 중사 옆에 있던 캐비닛 안에서 폭탄이 터졌다.

폭발 에너지를 정면으로 맞은 도영은 그대로 밀려나 벽에 처박혔다. 벽이 거미줄 모양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어딘가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타다당.

갑자기 연달아 총성이 울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적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함정이다.’

도영은 깨달았다.

일렁거리는 시야에 대원들이 서로 엄호하고 사격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영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귓가에 이명이 심해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아무리 훈련받은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이런 충격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 중사가 무어라 소리치며 도영을 잡아 끌어당겼다. 도영은 그 힘에 끌려 한 걸음 내디뎠다가, 쓰러졌다.

쿵.

바닥에 닿는다고 의식하는 순간 도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냄새. 낯선 약품 냄새가 그랬다.

도영은 흐릿하게 눈을 떴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전투복을 입은 제 다리가 보였다. 다리는 한발씩 도영이 앉아있는 의자 다리에, 손은 뒤로 묶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병원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장은 전부 해제되어있었고 상의는 전투복 안에 받쳐 입는 검은 군용 티셔츠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벗은 기억은 없으니, 누군가가 벗겼을 것이다.

끼이익. 쿵.

그때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기척이 났다. 도영은 아직 뻐근한 고개를 들었다.

컨테이너 안으로, 검은 남자들을 거느린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다리 옆에 슬릿이 들어간 치마가 발목까지 오는 붉은 정장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려해 보일 정도로 밝은 플래티넘 블론드에 눈동자도, 입술도 입고 있는 옷 같은 색이었다.

도영은 한눈에 알았다. 여자는 뱀파이어였다.

하도 뱀파이어를 보다 보니 직감적으로 알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것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쥐를 보는 뱀 같은 눈이 여자가 포식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게 불타오르는 것 같은 색과 정반대로 그 눈은 아주 차갑고 비정한 느낌을 주었다.

여자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도영의 눈에 라이트를 비춰보고는 말했다.

“루아스는 아닙니다.”

여자는 훗 웃었다.

“그건 냄새만 맡아도 알아. 동족 남자한테서는 이런 달콤한 냄새가 안 나거든.”

여자는 앞에 와 서서 도영을 내려다보았다.

“미남이네.”

도영은 싱긋 웃었다.

“고마워.”

사실 도영은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라헬.

3년 전 수괴가 붙잡히면서 거의 와해된 뱀파이어 테러단체 ‘SN’의 파편화된 세력 중 하나로, 최근 들어 가장 위협적으로 분류되고 있는 ‘레기온’의 모집책인 고위 간부였다.

그가 정신을 잃고 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작전은 레기온의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대원들은 모두 무사한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갈지 걱정부터 해야겠지만.

“가져와.”

라헬이 고갯짓하자 옆에 있는 테이블에 남자들이 물건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도영의 물건들이었다. 라헬은 티파니 매장에 반지를 사러 온 여자처럼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일 자로 펴져 있는 손목밴드 안쪽을 돌려 보았다. 거기에 인식표가 새겨져 있었다.

“도영 드페르 소령….”

라헬은 손목밴드를 툭 던졌다.

“몇 살이지? 스물일곱?”

라헬도 도영이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고 질문한 건 아니었겠지만 도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피부미용 따위 생각할 수 없는 직업치고 서른한 살에 스물일곱으로 봐주는 거면 선방한 거 아닌가 싶었다.

“아니, 소령이니까 좀 더 나이가 있겠네.”

라헬은 도영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리고 손끝으로 스치듯 목덜미를 훑으며 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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