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쭈니>
“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라헬은 손끝으로 스치듯 도영의 목덜미를 훑으며 뒤로 돌아갔다.
“혹시 뱀파이어도 취향이 다 다른 거 알아? 성별을 떠나서 예쁜 여자를 선호하는 뱀파이어도 있고, 잘생긴 남자를 선호하는 뱀파이어도 있지. 피가 많다고 오히려 뚱뚱한 인간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어. 그중에 난….”
귓가에 따듯한 숨이 다가왔다.
“강한 남자들이 참 좋아.”
라헬은 도영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목을 타고 쓸어 올리면서 속삭였다.
“근육으로 꽉 찬 남자들을 억누르고 피를 빨 때 말이야, 제 몸과 힘에 대한 확신으로 똘똘 뭉쳐있는 남자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당하면서 멘탈이 붕괴되는 걸 보는 즐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거든.”
안 그래도 따라 들어온 깍두기 같은 남자들이 하나같이 목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도시락통이라도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라헬이 목을 타고 올라와 귀 뒤에 코를 박고 있어서 고개가 살짝 숙어진 도영은 눈을 들고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목이 좀 민감하거든? 숨은 적당히 쉬어줬으면 좋겠는데.”
라헬은 고개를 들었다.
“간만에 팔팔한 게 들어왔네. 그냥 마셔버리기엔 아깝잖아.”
라헬은 물러섰다.
“자, 시작해볼까?”
그 말에 효도르가 울고 갈 것 같이 생긴 한 백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바로 주먹을 휘둘러서 뻑 소리가 나도록 도영의 얼굴을 쳤다. 의자가 바닥에 고정되어있지 않았다면 옆으로 날아가 굴렀을 것이다.
도영은 힘겹게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깜빡이는 켜고 들어오지 그래.”
“걱정 마. 그쪽은 인간이니까.”
라헬은 다른 남자가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말했다.
“그거야 이런 솜방망이 주먹만 봐도 알아.”
도영이 말하자 남자는 제대로 된 권투 자세로 복부에다가 주먹을 먹였다. 동작을 읽고 복부에 힘을 주긴 했지만 아무런 방비를 못한 사람이 맞았다면 최소한 장 파열이었다. 맷집을 키운다고 팀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루아스 대원에게 때리라고 한 조교가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도영은 쿨럭이다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라헬은 훗 웃었다.
“그래도 스페츠나츠(러시아 특수부대)였어. 화나지 않게 하는 게 좋을걸.”
“와우, 러시아 형님. 무섭지. 쓰파씨바.”
도영이 웃음을 토해내고 말하자 라헬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MCTC에선 포로로 붙잡혔을 때 상대를 자극하라고 가르치나 봐?”
“설마. 날 가르치길 포기했을 뿐이야.”
라헬은 웃으며 왼쪽 팔걸이 쪽으로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아쉽네. 틴더에서 만났으면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자연스러운 만남을 선호하는 편이어서.”
갑자기 스페츠나츠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도영의 얼굴을 터뜨려버리려는 것처럼 움켜쥐고 소리쳤다. 러시아어를 조금 알긴 했지만 하도 거칠게 소리쳐서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영은 스페츠나츠를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이는 닦았지?”
스페츠나츠가 도영을 발로 걷어찼다. 한 번으로 안 되자 두 번을 걷어찼고, 결국 의자는 도영이 앉은 채로 나뒹굴었다. 넓은 공간에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죽이진 마.”
라헬은 느긋하게 말하고는 일어나 다가왔다.
“자, 소령. 잘 생각해봐. 우리가 누구일 거 같아?”
도영은 고개를 젖혀 바닥에 뒷머리를 대었다.
“SN의 잔당이겠지.”
“잔당이라니, 2세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봐. 불사조란 건 말이야, 어느 순간이 오면 직접 불을 놓아 자신을 태워 죽이지. 그리고 그 재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는 더 강하고.”
라헬이 말하는 데 맞춰 하이힐 소리가 다가왔다.
“완전하고.”
또각….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법이야.”
옆에 온 라헬은 도영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확실히 누워서 보자니 안 그래도 키가 커서 높이 있는 데다 역광을 받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는 라헬을 보며, 도영은 웃었다.
라헬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지만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뭐가 웃기지?”
“꼭 SN 같은 말투라서. 거기선 그렇게 말하는 법이라도 가르쳐?”
라헬은 훗 웃었다. 걷어차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스스로 그런 우아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
“팔팔하면 팔팔할수록 날 더 즐겁게 해줄 뿐이야. 인간들은 너무 약하니까. 좀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을 수 없는데 찾아도 끝까지 버티질 못하더라고. 하지만 동족 남자는 싫어. 너무 뻣뻣하거든. 몸도, 정신머리도.”
라헬은 도영을 내려다보며 붉은 혀로 천천히 제 입술을 핥았다.
“반면 인간 남자는 아주 야들야들하지.”
소름이 끼쳤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라헬은 인간 남자를 성노예로 부리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그녀의 수중에 떨어졌다가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는 것 같았다.
그때 다행히 전화가 울렸다. 라헬은 울리고 있는 제 손목밴드를 보고 밴드를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그러고는 라헬은 잠깐 상대가 하는 말을 듣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도영을 돌아보았다.
“대표님께서 직접 보겠다고 하시는군.”
여기서는 수괴를 대표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라헬은 도영을 고갯짓했다.
“데려가.”
곰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러시아 형님 둘이 도영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라헬이 손가락 하나로 도영의 턱을 들어 올리고, 뱀 같은 눈동자로 말했다.
“일이 끝나면 넌 내 거야.”
남자 둘이 도영을 끌고 갔다. 그리고 방을 나서서 복도를 지나갔다. 하얗고 깨끗한 복도는 이곳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없을 만큼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령탑을 잃고 분해되어 지하로 숨어든 테러단체 지부가 소유하고 있진 않을 만큼 크고 제대로 된 건물 같았다.
쿵.
복도 끝의 문이 열리고 격납고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는 이미 출항 준비를 마친 군용 수송기가 준비되어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군용 수송기였다. 겉에는 어떤 마크도 없어서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도영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정규군에 못지않은 시설과 기기를 가지고 있는 거지?
남자 둘은 램프도어(화물 적재문)를 통해 들어가 의자에 도영을 내리찍듯이 앉혔다. 이어서 라헬이 근위대를 사열하는 여왕처럼 우아하게 올라탔다. 그리고 치마의 깊은 슬릿 사이로 드러나는 다리를 뽐내며 앞을 지나갔다.
“출발해.”
램프도어가 닫혔다. 쿵, 하고 도영의 운명에 마침표를 찍듯이.
***
도영은 눈짓으로 뒤쪽 유리를 보았다.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대표’라는 수괴 녀석을 만나면 경비가 더 삼엄해질 것이다. 탈출할 기회는 무조건 지금뿐이었다. 하지만 이 하늘에서 어떻게?
“앞에 봐.”
양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루아스 중 한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하여간 정이 안 가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수가 없었기에 도영은 고개를 원위치 했다. 라헬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보았다.
여자들이 도영을 좋아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그로서도 그 사실을 딱히 싫어하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그 흥미를 좀 거둬줬으면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때 수송기 승무원이 다가와 라헬에게 말했다.
“전방에 군용기입니다. 저희의 신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라헬은 도영은 흘긋 보고 물었다.
“MCTC야?”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도영부터 회의적이었지만 역시 승무원은 대답했다.
“아닌 거 같습니다.”
“일부러 공해를 돌아서 가고 있는데 왜 그런 게 붙은 거야?”
“알아보겠습니다.”
도영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삐.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났다. 도영이 들은 걸 옆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왼쪽 남자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서 여전히 등 뒤로 손이 묶여있는 도영을 보았다. 그 순간 옆에서 팔꿈치가 그의 턱을 후려쳤다.
“네 턱이 날아가는 소리!”
인간에 비하자면 탱크처럼 단단하지만 그래도 턱은 기본적으로 급소이기 때문에 잘만 때리면 충분한 대미지를 줄 수 있었다.
“수갑을 어떻게…!”
오른쪽에 앉은 남자가 놀라서 외쳤다.
옆의 놈이 한 대 얻어맞는데도 한가하게 놀라고 있다니 도영은 기본 육체의 힘이 세서 때로 안이해지는 이 뱀파이어란 족속의 속성이 이럴 때는 차라리 고마웠다. 아마 양옆에서 마크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인간이 뭘 할 수 있겠냐고 본능으로부터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데 알려나 모르겠다. 이래 봬도 그의 직업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뱀파이어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연구하고 훈련하는 거라고.
도영은 오른쪽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역시 평소라면 별 타격을 주지 못했겠지만, 수갑을 너클 삼아 파괴력을 올렸기 때문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피가 터지는 얼굴을 감쌌다.
도영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주먹을 날리는 순간 이미 풀어낸 벨트를 내팽개치며 뛰어나갔다.
쾅.
그 순간이었다.
미사일에라도 맞았는지 비행기가 격하게 요동쳤다.
도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의자의 그물을 붙잡았다.
“뭐야!”
라헬은 거의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런데 비행기가 한 대 맞고 나니 여압(기압이 낮은 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 따위에서, 꽉 막혀 기체가 통하지 않는 기내에 공기의 압력을 높여 지상에 가까운 기압 상태를 유지하는 일. 네이버 국어사전) 장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도영은 시선을 돌렸다. 수송기 벽에 붙은 램프도어 오픈 버튼이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레기온 녀석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빠서 그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터.
겨우 기체가 안정된 순간 도영은 달려 나갔다. 그리고 화물을 고정해둔 끈을 붙잡으며 램프도어 오픈 버튼을 손바닥으로 내리찍듯이 눌렀다.
쿵.
위이잉.
램프도어가 열리기 시작하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역시 비행할 때, 즉 여압이 작동하는 상태에서만 램프도어가 잠기는 기체일 거라고 예상한 게 맞았다.
“뭐…!”
그제야 레기온 대원들이 놀라서 도영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램프도어가 열려 뻥 뚫린 허공이 다 내다보이는 이상 다들 뭔가 붙잡고 있느라고 다가오지 못했다.
오늘 아침 라헬의 머리를 세팅한 헤어 디자이너가 울 것 같은 바람 속에서,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리는 사이로 라헬이 비웃었다.
“인간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도영은 웃었다.
“이대로 끌려가는 거보다는 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지만 말마따나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면 아무리 바다에 떨어져도 수면과 부딪치는 순간 벽과 손바닥 사이에 짓눌린 모기 꼴이 날 것이다. 낙하산이 없으니.
한 마디로, 문만 열어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도영이 허세를 피우고 있다는 걸 깨달은 루아스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려는 기색을 보였다. 하여간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녀석들 아니랄까 봐 눈치도 짐승 수준이었다.
쿵.
갑자기 추락하는 충격이 느껴질 정도로 몸이 훅 아래로 꺼졌다. 정확히는 비행기가.
순간 적기를 피하느라 비행기의 고도가 가파르게 낮아진 것이다. 이들의 적기가 어디 소속인지는 몰라도 정말 도영에겐 생명의 은인에 다름없었다.
“이봐, 조심…!”
레기온 대원 중 누군가가 소리쳤지만 지금 조종사에게 그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모두 뱀파이어여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붙잡고 버텼다. 특히 라헬은 한 손으로 의자의 그물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한, 즉 혈통이 있는 뱀파이어인 모양이었다.
도영도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 팔의 혈관이 모조리 팽창하면서 최대치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장 바다에 처박힐 듯이 고도가 낮아졌다. 초고속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아찔했다.
거센 바람이 거의 피부를 벗겨갈 것처럼 몰아쳤다.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도영은 깨달았다. 지금 뛰어내리지 않으면 살 가능성은 없었다.
뛰어내린다고 산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도영은 끈을 놓는 순간 몸을 돌리며, 뛰어내렸다. 정말 인간이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미친…!”
그 순간 수송기가 재빠르게 위로 솟구치며 평형을 찾았다.
남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라헬을 쳐다보았다.
“인간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살아날 리가 없습니다. 설령 살아나더라도 이 근방은 전부 무인도입니다.”
라헬이 먹이를 놓친 뱀처럼 계속 아래를 보고 있자 남자가 덧붙였다.
“GPS가 없으니 MCTC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운 좋게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겨우 도착한 무인도에서 생을 마칠 겁니다.”
라헬은 고개를 들고 코웃음을 쳤다.
“아깝네. 아끼는 장난감이 될 것 같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