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쭈니>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도영은 바다에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가 급강하하지 않았다면 절대 자신이 무사하지 못했으리란 자각이 밀려왔다.
이제는 강하 훈련을 할 때 팀원들과 장난삼아 공중제비를 돌며 점프하는 수준이지만 이렇게 낙하산 없이 맨몸으로 물에 부딪히는 충격은 거의 그의 몸만 한 주먹에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아래로 끝을 알 수 없게 검은 물이 입을 벌리고 누워있었다.
도영은 정신을 차리고 수면을 향해 다리를 박찼다. 그가 내버린 수갑은 깊은 바닷속으로 홀로 가라앉아갔다.
촥.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Putain!”
공기를 만나자마자 욕설부터 터져 나왔다.
“무서워 죽을 뻔했네!”
아무리 자주 강하 훈련을 했어도 비정상적으로 비행하는 비행기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경험은 그 섬뜩함이 가슴에 새겨질 정도였다.
겨우 좀 진정하고 도영은 얼굴을 쓸어 올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망망대해뿐이었다. 뭐 다른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정말로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도영은 팔을 휘저어 사방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흐릿하게 섬이 하나 보였다.
‘맨몸으로 헤엄쳐 가기에는 너무 먼데.’
하지만 이대로 있을 게 아니라면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도영은 몸을 쓰는 일이라면 뭐든지 자신 있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자신이 있는 거라면 수영이었다. 헬 위크(훈련기간)에도 수영 하나로만 살아남을 정도였으니까.
도영은 섬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
도영은 물을 휘저으며 해변으로 올라섰다.
혹사당한 팔다리가 끊어지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훈련받은 몸이라고 하지만 역시 섬은 보이는 것보다 멀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기운이 다해 고비를 맞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특수부대원이라는 이름이 아깝지는 않아서 어지간한 뱀파이어도 힘들 거리를 어떻게든 끝까지 헤엄쳐올 수 있었다.
“Putain de merde….”
도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해변에 드러누워 쭉 뻗었다. 그리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촤아아, 솨아아아.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그의 몸 아래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밀려 나갔다 반복했다.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욱신거리는 몸뚱이가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도영은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투명한 하늘빛 바다가 백사장에 가만히 밀려들고 있었다.
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바로 숲이 이어지고, 저 멀리 깎아지는 듯한 거대한 돌산이 중첩되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꼭 웅크리고 잠들어있는 거인의 등뼈 같은 느낌이었다.
섬은 생각보다 커 보였다.
‘설마 무인도는 아니겠지.’
도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서….
제 손목밴드를 꺼냈다.
분명히 레기온에 뺏긴 물건이었다.
그 불곰 같은 스페츠나츠가 갖고 가는 걸 보고 몰래 도로 훔쳤기 때문이다.
원래 제 것이니 훔쳤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도영은 예전에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전설의 소매치기로 이름을 날리다가 MCTC에 입대한 대원한테 스킬을 사사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목밴드는 먹통이었다.
“젠장.”
아무리 흔들고 때려 봐도 완전 돌덩이가 된 걸 보니 레기온 측에서 일부러 고장을 낸 것 같았다.
도영은 하늘을 보았다.
이렇게 되면 MCTC에서 제 위치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트리폴리에서 사라진 그를 누가 태평양 한가운데서 찾을 생각을 하겠는가?
도영은 무심히 빛나는 태양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첩첩이 산중이군.”
하지만 한국 속담에 괜히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섬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도영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먹통이 된 손목밴드라도 손목에 차고 일어났다.
***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일수록 빨리 인정하는 편이 다음 대책을 강구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무인도군.’
이곳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이곳에 떨어진 시점부터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도영이 이런 환경에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그처럼 특수부대원이었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를 데리고 야생으로 생존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그리고 합격자보다 탈락자가 배로 많다는 BUD/S(미군 신병 교육 과정)가 차라리 편해 보이는 MCTC의 신병 교육 프로그램만 받아도 이런 환경에서 크게 동요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칼 한 자루, 소량의 음식만 가지고 정글을 헤치고 나오는 훈련을 하니까.
사실 지금은 그 최소한의 준비물마저도 없었지만 말이다.
도영은 사람만큼 큰 잎사귀를 젖히고 나갔다. 그리고 잠깐 상황도 잊고, 눈앞에 드러난 풍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허….”
반경이 100m 정도 되는 호수 가운데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엄청난 수량이 물에 부딪히며 주변으로 물보라를 일으키고, 두텁게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들이 군데군데 솟아있었다.
에메랄드를 녹여놨다고 볼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색의 물속에는 거대한 나무 기둥들이 쓰러져 수장되어있는 모습이 장엄했다. 물과 흙, 풀의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푸드득.
머리 위로 이름 모를 새가 날아갔다. 도영은 새까맣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지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호숫가는 온갖 자연의 소리로 가득하면서도 고요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처녀지란 말은 정말 이런 곳에나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 아마존만 해도 꽤 사람의 손이 많이 닿아서, 아주 깊은 곳이 아니면 테마파크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도영은 태평하게 중얼거리고 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티셔츠를 벗어냈다. 바닷물에 젖었다가 마른 데다가 땀을 흘려서 티셔츠는 털면 소금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티셔츠를 물에 헹구고 뭉쳐서 조심히 얼굴에 난 상처를 닦았다. 쓰라려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났다.
“무식하게도 팼군.”
그래도 부러진 곳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구조대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만약 어디라도 부러졌다면 생존 자체가 위험했을 것이다.
도영은 그대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 폭포가 호수에 부딪히며 일으키는 물보라가 세서 그 주변으로 하얗게 안개가 낀 것 같았다.
갑자기 도영은 일어나 바지 버클을 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폭포 쪽으로 다가가다가 가운데서 퐁, 머리까지 잠수해 들어갔다.
시간이 흘렀다. 1분, 2분….
갑자기, 아까 도영이 있던 자리에 발이 나타났다.
신발을 신지 않은 하얀 맨발은 당황한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딜 둘러 봐도 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이렇게 오래 잠수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발은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촤아아.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폭포는 발이 걸어온 곳에서 연결되는 단에 부딪혀 꺾여 바로 아래 호수로 떨어졌다.
발은 얕은 물을 헤치고 폭포 앞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물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발목에 휘감겼다가 풀어졌다.
물은 냄새를 지우고, 물의 소리는 기척을 지웠다. 예민한 귀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폭포를 가르고 도영이 나타났다. 동시에 양손으로 단단히 말아 쥔 티셔츠로 목을 걸어 홱 잡아당겼다.
“……!”
여자는 반사적으로 목을 조이는 티셔츠를 잡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넌 뭐야?”
도영은 소리쳤다. 거센 폭포수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분노하는 것처럼 번뜩거리는 눈동자, 외치는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여자가 허리를 틀어 도영을 잡았다. 동시에 도영을 뒤로 밀었다.
비인간적으로 강한 힘이었다. 도영은 속수무책으로 폭포 너머 얕게 디귿 자로 파여 있는 공간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온몸이 울릴 정도로 세게 등이 부딪혔다.
쿵.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도영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고 올려다보는 건, 여자였다. 이 지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여자는 아름다웠다.
단순히 희고 매끄럽다기보다 비현실적인 윤기가 흐르는 피부에, 젖어서 몸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는 검고 긴 머리카락, 그리고 그를 마주 응시하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힘은 뱀파이어의 것이었다.
도영은 온 힘을 다해 여자를 걷어찼다. 여자는 순간 비틀거리며 도영을 놓치고 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물속에 빠졌다.
폭포수 소리에 여자가 물에 빠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영은 따라서 당장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물거품이 어지럽게 이는 사이로 벌써 저 멀리 팔다리를 휘저어 멀어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뭍에 닿자마자 올라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영은 여자를 쫓았다.
육체 능력이 인간보다 훨씬 비범한 뱀파이어인 데다가 주변 지형을 잘 아는지 엄청난 속도였다. 이대로는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어느 순간이었다. 여자가 갑자기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
여자는 주춤하며 자신이 이미 지나온 길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옆쪽 수풀에서 튀어나온 도영이 몸으로 그녀를 밀어버렸다. 그리고 둘은 엉켜서 굴러갔다.
“넌 뭐냐고?”
도영은 여자의 목에 나이프를 누르고 소리쳤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목적이 뭐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아까부터 깨달았다.
여자는 꽤 오래전부터 도영을 따라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조용히 뒤를 밟는 기척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걸 깨달았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바로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척했을 뿐이다.
여자는 아주 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I ♡ NY’이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이게 얼핏 보면 웃긴 것 같지만 여자가 이곳이 아니라 밖에서 왔다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여자는 팔을 돌려 땅을 짚는 동시에 다리 힘으로만 몸을 뒤집었다. 아차 할 새도 없었다. 도영은 자세가 그대로 반전되어 등이 바닥에 떨어졌다. 등이 울부짖었지만 당장 몸을 돌렸다.
쿠웅!
도영이 누워있던 자리에 여자의 발이 꽂히며 땅이 파이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도영은 얼른 몸을 일으켜 거리를 벌렸다.
역시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였다. 아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강했다.’ 지금까지는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반면 여자는 놀라는 기색이었다.
「피했어?」
어디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