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쭈니>
「피했어?」
여자는 어디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흘긋 도영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도영은 나이프를 꾹 쥐었다. 화기도 없이 맨몸으로-말 그대로 속옷 한 장 입은-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이쪽이 진짜 칼을 가진 상황이니 해볼 만했다.
여자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움직이는 기색을 읽었다. 나뭇가지가 아슬아슬하게 팔을 비켜 지나가 바닥을 때렸다.
쿵!
“뭐….”
도영은 아연실색했다. 철 덩어리가 아니라 나뭇가지를 휘두르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난단 말인가?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바닥에 박혀있는 나뭇가지가 튀어 올랐다. 스치기만 해도 최소 중상이 분명했다.
도영은 거의 생존본능에 사로잡혀 몸을 젖혔다. 나뭇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뭇가지가 낼 수 없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또 도영이 피하자 여자는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뒤로 절벽이 보였다. 잘 밀어붙이면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도영이 나이프를 휘둘렀다. 여자는 팔로 막았다. 눈을 들어 그를 보는 붉은 눈에 불길 같은 살기가 번졌다. 그리고 도리어 도영의 팔을 잡으며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말 그대로 뻑 소리가 났다.
“……!”
온몸을 뒤흔드는 격통에 도영은 욕설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고통은 한순간이었다. 여기서 이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하면 죽음은 영원했다. 도영은 여자의 목을 노렸다.
여자는 분명 다리가 부러졌을 텐데도 멈추지 않는 도영에게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두 번은 당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훅 몸을 숙이는 뱀파이어의 눈빛이 허공에 잔영을 남겼다.
여자는 와락 도영을 붙잡았다. 그리고 붕 돌려 손을 놓았다.
“Putain….”
공중에 뜬 채로, 도영은 욕설을 내뱉었다.
뭘 어찌해볼 새도 없이 몸이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속에 처박혔다.
물속은 온갖 난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했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머리를 부딪쳤는지 점차 의식이 멀어졌다. 저 높은 하늘에서 뛰고도 멀쩡했는데.
맞는 묘사일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번 떨어트린 핸드폰이 멀쩡하다가도 책상에서 한 번 떨어졌을 뿐인데 제대로 맞아서 액정이 깨져버리는 원리 같았다.
‘이대로 물고기 밥인가.’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수면에 어렴풋이 그림자가 비쳤다.
쿵.
그리고 철근처럼 육중한 물체가 떨어진 듯이 물속 세계에 소란이 일었다.
어느 정도 거품이 가시자 여자는 몸을 펴고 그에게로 헤엄쳐오기 시작했다. 뱀파이어도 육지 생물인 한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으니 볼을 부풀리고 꼭 입을 다문 모습이 야무졌다.
물고기 밥이 아니라 뱀파이어의 밥인 모양이었다.
도영은 정신을 잃었다.
***
가말은 남자를 뭍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축축한 흙바닥에 내려놓고 얼른 몇 걸음 물러나 크고 넓적한 나뭇잎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상태로 한동안 지켜보았다. 남자는 푹 젖은 채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어 있는 게, 연기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갑자기 공격해서, 놀랐다. 그녀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데.
가말은 경계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간 얼굴을 쿡 찔렀다.
“음….”
남자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자 물방울들이 놀란 물고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얼굴을 타고 흘렀다.
가말은 남자를 좀 더 자세히 보았다. 낯설게 생긴 생김새였다. 얼굴은 여자처럼 예쁘장한데 몸은 전사 같았다. 싸우는 걸 봐선 인간 같지 않은데 인간이었다.
‘잘못된 건 아니겠지?’
인간이니까. 그래서 가말은 남자의 얼굴에 고개를 기울여보았다.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물방울이 갈색으로 그을린 남자의 가슴을 타고 겨드랑이 쪽으로 흘러내렸다. 모양이 잡혀있는 단단한 복부에 물이 고여 있었다.
가말은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고 다른 기척이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쓰륵. 쓰르륵.
풀숲에서 익숙한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내 가말은 남자를 제 등에 들쳐 업었다. 남자의 몸집이 더 컸기 때문에 그녀의 몸 위로 구부정하게 쏟아졌다. 그래서 가말은 남자를 수습해서 한 번 추켜올리고 그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워 갔다.
***
의식이 돌아와 도영은 어렴풋이 눈을 떴다. 눈가에 뭔가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나무 천장에 곶감처럼 주렁주렁 달린 모빌이었다. 색색의 유리와 돌, 조개껍질로 만든 거였다. 눈가를 스친 빛은 개중 유리가 틈새로 스며드는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었다.
땀이 도영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렸다.
사방이 어둡고 후덥지근해서, 순간적으로 자신을 익혀 먹으려고 화덕 속에 넣어놓은 건가 싶었다. 아마 수비드 조리법으로. 그늘 덕분에 미지근한 열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도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한구석에 누워있는 오두막은 비어있었고 아직 낮인지 나무 벽의 틈새로 쨍한 햇빛이 비쳐들었다.
‘여긴….’
양 손목이 밧줄로 묶여있었다. 나무줄기로 거칠게 꼰 밧줄이었는데 끝은 기둥에 단단하게 묶여있었다. 티셔츠는 입고 있었지만 그대로 언더웨어만 입고 있는 다리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부목이 대어진 상태였다.
‘얼마나 지난 거지?’
상처는 전부 원시적인 방법으로 치료되어있었고 밧줄이 닿는 거리에 물과 음식을 담은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잘 말린 그의 전투복 바지가 개켜져 있었다.
‘그 뱀파이어가 두고 간 건가…?’
아무래도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준 놀부처럼 제 다리를 부러뜨리고 치료해준 사람은 그 여자 뱀파이어인 것 같았다.
‘왜 이런 무인도에 뱀파이어가 있는 거야.’
참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뱀파이어 테러리스트에게서 겨우 탈출해온 곳이 뱀파이어의 둥지라니.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여자 뱀파이어는 요즘 루아스들에게 부과된, 흡혈과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법에 구애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게 싫어서 밀림이나 지하로 숨어드는 루아스들이 꽤 있는데 그런 루아스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영은 부목이 대어져 있는 제 다리를 보았다. 묶어놓긴 했어도 상처를 치료해준 걸 보면 당장 해칠 의도는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먼저 공격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낯선 환경에서 위험한 존재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데 악수를 청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순간 안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살려놓고 피를 뽑아먹는 용도로 쓰려는 건 아니겠지.’
쓸개 제공용 곰처럼 말이다.
도영은 일어나서 제 손목을 묶은 밧줄을 살폈다. 기가 찼다.
‘내가 진짜 곰이냐?’
정말 곰도 묶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두께의 밧줄이어서, 이건 도저히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피를 뽑아먹는 게 목적이든 다른 목적이 있든 중요한 건 그 뱀파이어가 당장 자신을 죽이려는 셈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즉, 그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도영은 그 여자 뱀파이어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벽 쪽에 키가 맞지 않는 나무 상자 몇 개가 놓여있고 내부를 쭉 둘러 벽에 달린 선반에는 온갖 물건들이 올려져 있었다. 다시 보니 오두막이라기보다 통나무집에 가까웠다.
좀 건축을 아는 사람이 지었는지 아닌지 불분명한 게 전체적인 모양은 잘 잡혀있는데 마감이 들쑥날쑥했다.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잘 모르지만 시간은 누구보다 많았던 누군가’가 지은 모양새였다.
햇빛에 비친 유리 모빌이 바닥에 그린 빛 그림자가 천천히 넘실거렸다. 그에 천장에 시선이 멈추었다.
얼핏 볼 때는 몰랐는데 천장을 꽉 채울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빌은 저마다 섬세한 매듭 공예가 되어있어서 원시 부족의 공예품 느낌이었다. 저걸 다 만들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도영이 깔고 누워있는 천도 직접 짠 것처럼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여기가 뱀파이어의 소굴이라면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꼭 허름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시골 할머니 집 같은 느낌이었다.
도영은 문을 보았다. 꽤 지났는데도 뱀파이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나야 파악을 하지.’
꼭 화덕 속에 넣어놓고 까먹은 음식이 된 느낌이었다.
도영은 돌아누웠다.
***
끼익.
조심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얀 발이 살그머니 들어왔다.
도영은 문을 등지고 누워있었는데 자는 것 같았다. 이제 바지는 입고 있었다.
그제야 가말은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가 비어있는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죽일 생각은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때 도영이 말했다. 막 그릇을 잡으려던 손이 움찔했다.
가말이 돌아보자 도영이 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말은 흠칫하며 물러섰다가 문 쪽으로 달려갔다.
“잠…!”
도영은 벌떡 일어나다가 통증이 느껴지는 다리 때문에 움찔했다.
“젠장.”
도영이 거칠게 중얼거리자 가말은 멈칫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나갈지 말지 고민하듯 주춤거리며, 다리를 끌어올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도영은 겨우 돌아앉았다.
“거기서 그렇게 보고 있을 거면 좀 도와주지 그래?”
가말은 한 번 더 주저하다가 도영에게 다가가 그가 벽에 기대앉게 도와주었다. 도영은 그녀를 위아래로 한 번 보았다.
“내 말 이해하지?”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덧붙이는 말이 없어, 도영은 다시 물었다.
“근데 왜 말을 안 해?”
가말은 주저하다가 입을 뗐다.
“말을… 오래 안 해서….”
여자는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묘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외모에 휘둘리면 안 되지.’
도영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내가 프랑스어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알았어?”
“프랑스 말로 나쁜 말 했어.”
그건 납득했다.
“다리, 아파?”
가말은 도영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아프겠어? 그렇게 무식하게 걷어차 놓고.”
도영이 기가 차 말하자 가말은 우물쭈물하더니 물었다.
“너… 인간이야?”
“어이, 어딜 봐도 뱀파이어 씨. 누가 누구한테 묻는 거야?”
가말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너처럼 강한 인간은 본 적 없어. 놀랐어. 다리 찼어. 미안해.”
도영은 여자를 유심히 보았다. 프랑스어가 모국어는 아닌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는 외국인이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외모로는 국적을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어디 사람이야?”
물었지만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도영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름은 물어봐도 되는 거지?”
도영은 시니컬하게 물었다.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이번에 가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가말.”